시원에 가 닿는 광활한 주름의 언어,
시공을 반죽하는 이미지 축조술,
강정의 시는 자성을 띠고 전율하는 태초의 자석이다!
■추천사■
강정은 ‘공기의 다른 형태를 부추겨 예술이라는 망집을 낳고’ 거기 들어가 ‘폐광’의 ‘광부’처럼 사는가 보다. 그는 ‘폐광의 영화관’ 속에서도 ‘빛을 도륙당한 몸 안의 탄진들로’ 누군가와 겹쳐진 존재로 존재하는데 그 누군가는 아버지나 연인, 죽은 나이기도 하지만 ‘안팎’과 ‘죽음 너머’와 ‘이곳에 없음’과 ‘지척이 광년으로 늘어나는 격조’ 등 무한일 때도 있다. 이것은 시공을 자유자재로 늘였다 뒤집었다 하는 그의 놀라운 이미지 축조술 덕분에 가능한 것인데, 이렇게 겹쳐진 존재로 있음이 강정의 시적 공간을 넘치도록 광활한 주름으로, 시원에 가 닿게, “전부 멀리로 흘러가는 영화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그의 시적 표현은 ‘여자로 울려고 태어난 몸처럼’ 관능적이고, 그의 시적 해석은 전율의 자성을 띤 채 시 속에서 태초의 자석처럼 진동한다. 이만큼 한국어를 자유롭고 찬란하게 부재와 버무려서 시공(時空) 없는 시공에 가 닿게 하는 시인도 드물겠다. -김혜순(시인)
물과 거울에 비친 세계가 아니라, 물과 거울이 쏟아 낸 세계. 시인이 시를 붙든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점령해 버린 형국. 죽음의 한가운데서 에로스의 꽃이 핀다. 강정은 혼쭐이 났겠다. 정신이 없었겠다. 강정은 강정이 아니었겠다. 강정은 “삶도 죽음도 이미 다 겪은 건강한 노인”이었다가, “여자라 여긴 모든 형상과도 다른 여자”였다가, 그 모든 것이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가…… 지금은 기진하여 강정으로 돌아와 뻗었는가. 강정은 강정이 아닌 먼 길을 달려 강정에 거의 닿았으니, 시집 뒤에 드러누운 자는 이제 막 태어난 새끼 사자, 새끼 사슴, 순결한 아기 강정이다. 시가 강정을 낳았다. -김행숙(시인)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시, 저마다의 강정으로 존재하는 시, 자유롭고 찬란한 한국어로 쓰인 에너지 그 자체인 시. 한국 문학에서 가장 ‘시인 같은 시인’으로 손꼽히는 강정의 여섯 번째 시집 『백치의 산수』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귀신』(문학동네, 2014) 이후 2년 만이자 1996 출간한 첫 시집 『처형극장』 이후 20년 만의 작품. 2015년 ‘현대시작품상’ 수상작 중 1편인 「토끼 소년의 노래」를 포함해 모두 40편을 담았다.
강정의 시는 반영과 반사의 산물이라기보다 스스로가 원료이자 재료인 시다. 시원으로서 그의 시는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료의 질감으로 파악하는 회화, 음역과 장단을 통해 단도직입하는 음악처럼 언어의 질감을 최대한 많이 인식하는 것이 강정 시와 교감하는 방법이다. 영혼의 근육을 이완하고 수용할 수 있는 소리와 리듬, 감각의 한계를 확장할 때 강정의 언어는 인식의 지반을 흔들고 영혼에 지진을 일으킨다.
이번 시집 『백치의 산수』는 기존 시집들과 다른 지점에서 시적 파동을 전달한다. 일찍이 당져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시어들이 강정 시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핵심이었다면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당겨진 활시위가 놓여난 순간,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화한 순간 발생하는 혼돈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표제작 「백치의 산수」는 외부와 내부가 공존하는 ‘현관’이라는 공간에서 행해지는 ‘백치의 연산’을 통해 생사의 경계,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뒤섞는다.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백치의 산수」에서
첫 시집 『처형극장』에서 강정은 시인을 일컬어 “살아서 죽음을 보여 주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죽음을 살아낼 테야.” 죽음을 살아내는 강정 고유의 역설은 『처형극장』 이후 출간된 어떤 시집에서도 독자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 시집 『백치의 산수』에서도 ‘죽음의 생기(生氣)’는 시 곳곳에 등장한다. 「흡혈묘목」은 어둠과 피, 즉 ‘죽음’을 통해 영원히 사는 드라큘라를 모티프로 강정 시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어둠의 실체를 보여 준다. 그곳은 “해의 진심”에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 주는 생명의 밤, 치유의 어둠. 신작 『백치의 산수』는 시인 강정의 시론을 발견할 수 있는 ‘강정 읽기’를 위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래, 나는 밤이 되어서야 살고
밤의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당신의 혈관을 탐식하는 것이다
나를 만지면 모두 죽는다
내가 못 죽을 죽음을 대신 사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 하면 모두 거짓말쟁이
거짓의 태초를 박멸하는 짓이다
(중략)
누구, 해의 진심에 상처 입은 사람 있다면
볕을 피해 내 곁에 와 쉬라
아무 말 않고 울렁대는 대낮의 신음이 낯선 시로 들리다면 친구여,
내 뿌리를 거둬 당신의 쪽방 한구석에
신이 버린 생명의 뼈대인 양 자그맣게 걸어 두셔도 좋겠다
네 피를 마셔 네가 오래 아픈 이유를 보여 줄 테니
밤이 길다
나는 나의 누명을 혼자 사랑한다
내 안의 모든 핏기를 지워
잎도 열매도 키우지 않는
지상의 단 한 그루 나무가 되리
-「흡혈묘목」에서
1부 백치의 산수
총
광부
사진사
웃는 거울
마임
잊힌 부계父系
토끼 소년의 노래
인어의 귀환
무릎이 꺾인 음악
머뭇거리는 기도
피아노의 피안
비탈의 새-동혁에게
녹슨 꽃
공기놀이
죽음의 외경畏敬, 혹은 외경外經
할 말 없이
그림공부
백치의 산수
화염무지개
달의 혈족
2부 흡혈 묘목
실패한 산책
평범한 전이轉移
가을 산파
침묵 사냥
수은의 새
물의 백일몽
정오의 지진
잃어버린 말
너를 사랑한 흡혈귀
가시
흡혈 묘목
맴도는 나무
사슴과 사자
예수의 뜰
바닷가 화가
게면조
첼로의 바다
꽃의 그림자
경부 회귀선
무조無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