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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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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원제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re

밀란 쿤데라 | 옮김 이재룡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1999년 1월 20일

ISBN: 89-374-0067-7

패키지: 반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60쪽

가격: 7,500원

분야 외국문학 단행본


책소개

메디치상, 몬델로상, 예루살렘상, 클레멘트루크상 수상  작가 쿤데라의 대표작.TIME 誌 선정 80년대 소설 베스트 10.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어느 쪽이 옳은가. 니체의 영원한 재귀는 무거움이지만 실제요, 진실이다. 반면 우리의 삶은 단 한 번이기에 비교도 반복도 되지 않아 깃털처럼 가볍다. 질투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약한 테레사, 사비나의 외로운 삶.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무거움이요 사비나는 가벼움이다. 일인칭이면서 전지적이요 직선이 아닌 반복 서술,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분법의 의해, 그런 메타포에서 탄생한 인물들. 쿤데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매끄러움과 개연성을 거부하는 실험적인 기법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아픔과 삶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 권택영/문학 평론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8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전재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고, 발표 직후 1988년 11월 20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당시에는 독문학자 송동준 교수가 독일어 판본을 옮겨 펴냈으나, 1999년 2월에 불문학자 이재룡 교수의 변역으로 다시 펴냈다. 이는 원저자인 밀란 쿤데라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쿤데라는 프랑스어 판본을 옮기는 것이 자신의 원작에 가장 충실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독일어 판본을 옮긴 송동준 전 서울대 교수의 번역으로 처음에는 양장본 디자인(디자인/ 정병규)을 했으나 이후 1993년 6월에 반양장으로 바꾸었다(디자인/박상순). 불어판을 정본으로 삼아 이재룡 교수가 옮긴 현재의 책은 1993년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목차

제1부 가벼움과 무거움
제2부 영혼과 육체
제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제4부 영혼과 육체
제5부 가벼움과 무거움
제6부 대장정
제7부 카레닌의 미소


편집자 리뷰

무경험의 행성 / 크베토슬라프 흐바틱(박진곤 옮김)
쿤데라는 문학지 《라 켕젠 리테레르(La Quinzaine littéraire)》와 행한 대담에서, 문학 작품보다는 철학자들이 쓴 책을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그 철학자들이란 플라톤, 데카르트, 니체,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와 체코 철학자 라디슬라브 클리마(Ladislav Klima)와 얀 파토츠카(Jan Patocka)를 말한다. 쿤데라는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는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와서 현상학적인 분석을 적용함으로써 이 철학은 더욱 심오해졌다. 쿤데라가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프라하에서 쿤데라는 이미 체코 문학에는 철학적인 풍토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쿤데라가 1982년 파리에서(1978년 쿤데라는 부인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고 고등 연구원(Ecole des Hautes Etudes)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탈고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대목에서 니체의 생각, \’영원 회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바로 니체의 철학에는 현대의 역사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인간적 실존의 위기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니체는 이성 개념을 또다시 탐색하는 것을 단념하고 계몽의 변증법과 결별한다. 니체는 역사적인 이성이라는 사닥다리를 이용한다. 결국에는 이 사닥다리를 내팽개치고 이성에 맞서서 신화의 세계에 굳건히 서려는 의도로 말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그렇다고 쿤데라가 야스퍼스, 하이데거, 핑크 또는 엘리아데와 같은 니체 연구가들과 겨루어보려고, 니체의 철학을 이루고 있는 \’사상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이 영원 회귀라는 니체의 신화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쿤데라가 이 소설의 첫 대목에서 니체를 언급한 이유는,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성찰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사상적인 배경을 암시하고자 함이다. 이 사상적인 배경을 뒤에 두고서 쿤데라는 독특한 두 쌍의 연인 이야기――이제 더 이상 \’우스꽝스러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를 풀어가고 있다.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와 프란츠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소설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금언을 또한 생각나게 한다. 피에르 다니엘 위에(Pierre Daniel Huet)는 유럽 최초의 소설론인 『소설의 기원론(Traité de l\’Origine des romans)』(1670)에서 이 유명한 금언을 한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다.
소설이란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가르칠 요량으로 산문으로 씌어진 연애담이다.유럽 소설이 가장 오랫동안 다루어온 이야깃거리인 사랑은 시대와 풍속의 변화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상상 속의 여인 둘치네아를 향한 돈키호테의 사랑은 기사 계급이 품고 있던 이상적인 사랑의 반영이며, 19세기 부르주아의 산문에서 마담 보바리가 맛본 환멸은 낭만적인 사랑의 이상이 어떻게 천박스럽게 변해 버렸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쿤데라는 20세기 말, 두 세계의 경계에 살고 있는 두 쌍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 실존의 위협을 성찰하고 있다.
소설의 첫머리에는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주제의 핵심――즉 \’무경험의 행성\’으로서 우리의 세계를 생각하기――을 가리키고 있다. 이 행성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똑같은 숙명적인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귀의 가능성이란 없기 때문이다. 한 번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두 번 살면서 이전에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기회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선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선택의 순간성은 결과의 예측을 당연히 허용하지 않는다. 획득한 경험과 조화를 이루면서 행동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쿤데라가 \’영원 회귀\’라는 신화를 해석하는 핵심이다. 이야기가 가닥을 잡아가는 가운데, 이 신화를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체코 외과 의사 토마스는 해설하듯이 표현하고 있다.
며칠 뒤 토마스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앞장을 보충하는 뜻에서 나는 이 생각을 여기 인용하겠다. 우주에 모든 인간이 다시 한번 태어나는 혹성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인간은 지상에서의 그들 삶을 회상하고, 그들이 지상에서 했던 모든 경험들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 지상에서(제1혹성, 무경험의 혹성), 혹성에서 우리는 다른 혹성들의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데 대해 아주 막연한 표상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은 보다 더 현명해질 것인가? 성숙이라는 것이 도대체가 인간의 가능성에 놓여 있는 것인가? 인간이 그러한 성숙에 반복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부정적인 유토피아를 기저음으로 쿤데라는 두 쌍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 소설은 『웃음과 망각의 책』보다는 훨씬 전통적인 소설 구성을 취하고 있다. 기승전결에 따른 시제, 삼인칭 서술자 시점, 인물들의 시각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그들의 의식을 읽는 화자가 바로 그것이다. 쿤데라의 이 화자는 작가 전지적인 화자이다. 하지만 이 화자는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설하며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종래의 태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설과 분석은 화자만의 독자적인 텍스트 가닥을 이루고 있다. 화자는 주인공들을 텍스트에 끌어넣기도 하고 독자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문학적 허구, 즉 상상력의 산물임을 잊지 않도록 한다.
작가가 자신의 작중 인물이 실제 살았노라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다면 이것처럼 바보짓거리도 없을 것이다. 작중 인물은 어머니 뱃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몇몇 암시적인 문장이나 어떤 키 포인트가 되는 상황에서 탄생한다. 토마스는 \’한 번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라는 관용어에서 태어났고 테레사는 꾸르륵거리는 배에서 태어났다.
체코 신경외과 의사 토마스와 식당 종업원 테레사 외에 체코 여류 화가 사비나와 스위스 언어학자 프란츠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토마스를 A, 테레사를 B, 사비나와 프란츠를 C로 표기하기로 하고, 이 소설의 각 장이 어떤 인물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지를 도식화하면 그 결과는 이렇다. A-B-C-B-A-C-B.
그들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발전 양상까지도 아주 상반된 두 쌍의 연인은 톨스토이의 고전적인 연애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취하고 있는 시제를 생각나게 한다. 이 소설에서는 안나와 브론스키, 레빈과 키티라는 두 쌍의 운명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두 소설 모두에서 한 쌍은, 한 사람이 비극적으로 죽게 된 결과, 서로 헤어지게 되고 두번째 쌍은 시골에서 공동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쿤데라 소설의 제1부과 제5부는 그 제목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으로 같다. 제2부와 제4부도 모두 \’육체와 영혼\’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같은 제목을 단 이 각각의 장에서는 동일한 주제를 다른 인물로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주제를 동일한 인물이 발전시켜 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비나와 프란츠가 중심 인물인 제3부과 제6부의 제목은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과 \’대장정\’이다. 제6부는 새로운 주제인 키치를 다루면서 서서히 주제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전원의 풍경이 담긴 제7부 \’카레닌의 미소\’로 소설은 종결된다. 소설의 서사적 구조는, 주제의 폭과 쉬제에 맞게, 일관성 있게 아주 잘 짜여 있다. 사건 및 소설의 주제에 관해 성찰하는 텍스트 가닥 또한 이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유형학적으로 보자면, 소설의 주인공인 토마스는 돈 후안과 트리스탄이 결합된 인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방탕한 사랑(돈 후안)이 낭만적 사랑(트리스탄)으로 변모한 화신이 토마스이다. 토마스는 우리가 쿤데라의 이전 소설에서 익히 보아온 바람둥이의 모습과 부합한다. 섹스란 그에게, 정서적 또는 도덕적 의무와는 무관한 유희 내지는 위신의 문제이다. 테레사를 만나면서 토마스는 책임감, 동정심, 연정에 사로잡힌다. 여태까지 이런 감정을 모르고 살아온 토마스에게는 생의 전환이 시작된다. 테레사는 토마스보다 약하다. 테레사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토마스보다 열등하다. 그녀는 시골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진사로 일한다. 토마스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들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게 바로 이 우연이다. 그가 테레사를 보았을 때, 그에게 떠오른 것은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버려진 아기의 모습이었다. 작가가 소설에서 차용하고 있는 이 장면은 성경에서 유래한다. 파라오의 딸이 강에서 건져올린 아기 모세.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 탄생될 수 있다\’라는 견해를 화자는 피력하고 있다. (우연한 만남과 결정의 시학은 청년 쿤데라가 체코의 초현실주의 시인 비테슬라브 네즈발의 작품에 보낸 경탄의 유산이다.)
테레사의 사랑은 거침이 없으며, 자신이 받은 사랑의 상처를 단 한번의 불륜을 통해 완화시키려는 헛된 시도를 한다. 그녀는 토마스의 방탕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으며, 자신들의 사랑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악몽으로 발전한다. 테레사와 관련된 텍스트 가운데 상당한 양이 꿈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청년 시절에 작가가 점성술과 꿈에 경도된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쏟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테레사가 약하다는 점, 상처받기 쉽다는 점은 바로 그녀의 강점이기도 하다. 1968년 침공한 러시아를 피해 달아난 스위스에서도 토마스가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과 토마스가 계속적으로 화가인 사비나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테레사는 프라하로 되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면 자신의 직업적인 생존이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토마스는 그녀를 따라간다. \’정상화\’라는 압력에 눌려 토마스는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책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의사라는 직업 자체를 전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유리창을 닦다가, 결국 프라하를 떠난다. 그의 사회적인 몰락의 원인은 한 편의 글――몰락은 이 글에서도 나타난다――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철회하기를 거부한 한 편의 글 때문에.
토마스와 테레사는 쇠락한 협동농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 시골에서조차 테레사의 마음이 평안한 때는 애완견 카레닌과 함께 있는 순간뿐이다. 그녀는 카레닌의 부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희생도 카레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카레닌을 통하여 그녀는 자연의 침묵하는 존재로 되돌아간다. 서서히 죽어가는 카레닌 때문에 소설 후반부의 분위기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비애로 뒤덮여 있다. 테레사는 자기의 \’약함\’이 이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토마스가 받은 편지들은 여자들한테서 온 것이 아니라,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것을 알고서 테레사는 자책한다.
그녀는 또한 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 번번이 시험해 보려고 하는 것처럼 그를 자기에게로 불렀다. 그가 여기에 올 때까지 그녀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불렀다. 그 동안 그의 머리는 세었고, 몸은 지쳤으며 손은 반 불구가 되었다. 그의 손은 다시는 결코 해부도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 원 이럴 수가.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마침내 그녀가 믿도록 정말 여기까지 그들이 와야만 했던가?
토마스는 이 패배를 사실로 인정하며, 그녀와 함께 이곳에 있게 되어 행복하노라고 테레사를 안심시킨다. 이제 그들 사이에서 강자와 약자를 구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그 후에 바로 그 둘은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들의 죽음은 이미 그전에 스쳐 지나가듯이 살짝 언급(제3부와 제6부 끝부분에 있는, 토마스의 아들이 사비나에게 보낸 편지 내용 가운데)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 방식 때문에 이들의 죽음에서는 문학적인 비극성과 격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토마스와 테레사가 마을 무도회에 뒤이어 맛본 행복한 밤의 장면으로 끝난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는 사비나와 프란츠의 이야기를 화자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경우, 강한 쪽은 사비나이다. 프란츠가 사비나와 맺고 있는 관계는 단어 의미의 다양성에 근거하고 있다. 사비나와 프란츠는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의미를 담아서 사용한다. 쿤데라는 언어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의미론적 패러독스를 이 소설의 제3부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에서 분석하고 있다.(브로흐도 \’가치의 타락\’에 관한 에세이를 『몽유병자들』에 끼워넣고 있다.) 마지막 표제어인 \’진실에서 산다\’에 관한 논평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설의 줄거리와 연결되고 있다. 이렇게 쿤데라의 단어 목록은 소설 시제의 전개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목록의 첫 단어인 \’여자\’는 프란츠와 사비나가 맺고 있는 관계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두 사람의 상이한 유년 시절, 그들이 성장한 아주 다른 분위기의 환경은 동일한 언어 표현에 상이한 의미를 부여하고, 상이한 가치 연상 및 심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여인들을 대하는 프란츠의 태도에 형태를 부여한다. 프란츠는 무엇보다도 동정과 존경, 충실의 덕목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여인들을 대한다. 사비나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다. 사랑은 세계로부터, 의무로부터 도망쳐나가는 길이다. 이 세계는 미의식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마저 강요를 한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자유인 동시에 배반이다.
사비나는 달아나는, 키치의 세계로부터 달아나는 인간이다. 제6부 \’대장정\’에 나오는 스탈린 아들의 자살에 대한 에피소드는 키치의 주제를 상세하게 전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전체성과 서유럽 좌익의 신화, 캄보디아 지지를 위한 \’대행진\’에서 일어난 프란츠의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일련의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화자는 여기에서 작가의 사색을 별개의 텍스트 가닥으로 풀어가고 있다. 이 사색은 소설의 주제 구성을 확장시키면서 전통적인 연애담의 벽을 허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키치란 인생의 어두운 구석, 즉 죽음과 배설물의 영역을 은폐하는 일종의 벽이다.
전적인 키치의 제국에서는 대답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적인 키치의 본래적인 적은 질문하는 사람이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질문은 무대화의 그려진 캔버스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를 볼 수 있도록 갈기갈기 잘라버리는 칼과 같다.
키치의 적은 죽음의 실존을 외면하지 않고 의심하는 인간이다.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질문의 형식을 취한다.\’ 쿤데라는 하이데거를 이렇게 변형하고 있다. 헤르만 브로흐에게도 키치는 \’예술의 평가 체계에 있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키치란 불완전하고 \’비예술적인\’ 예술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미학 코드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 미학 코드는 후기 낭만주의 이래로 기생충처럼 예술의 육체에 얹혀 살면서 대중 매체를 통하여 사람들의 의식에 키치를 심고 있다. 키치의 시학에서는 \’아름다운 거짓\’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거짓에서 파급되는 정서적인 효력은 대중의 정서를 타락시킨다. 이런 이유 때문에 키치란 미학적인 범주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범주인 것이다. 키치는 예술의 영역에 있는 악이다. 이 악이란 특정한 미학적 태도뿐만 아니라 허위에 찬 삶의 태도까지를 말한다.
키치에 관한 조리 있는 논의를 전개한 쿤데라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소설에서 독자적인 무기로 무장한 키치를 굴복시킨다. 죽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소설의 구성을 통하여(이 죽음이 스쳐지나가듯이 언급되고 미리 앞질러서 예시됨으로써) 텍스트 내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독자는 토마스와 테레사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보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화음이 울려퍼지는 모습을 눈앞에 보면서 이 책을 덮는다.(쿤데라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주 잘 의식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쿤데라는 이 복합적인 주제를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구분하는 파르메니데스와 영원 회귀의 유토피아를 생각해 낸 니체로부터 이끌어낸다. 삶의 회귀와 반복의 가능성은 책임의 엄청난 부담을 인간 존재에게 짐지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삶의 비반복성은 아찔한 가벼움을 인간 존재에게 부여한다. 우리의 이성은 회귀(다른 사람이 되어 이 세상으로 오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은 일회적이며 최종적이다. 우리의 삶은 반복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만회할 가능성 역시 없는 것이다. 자연의 존재와 인간 현존 간의 근본적인 차이――현대 현상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는 뜨고 진다. 계절은 때에 따라 바뀐다. 바닷가에서는 한치도 어김없이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난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신의 인생길을 단 한 차례만 밟고 지나간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회수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영장의 선물, 즉 의식, 사고로 무장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의 유한성을 어찌할 수 없다. 그의 \’자의식\’은 자신의 유한성의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불가피성의 의식이다. 자아는 자신의 현존을, 그러나 동시에 탄생과 죽음으로 경계지어진 자신의 행로의 비극적 제약성 또한 잘 알고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존재와 맺은 관계에서 알게 된 이러한 의식은 고통스러운 형태를 취한다. 악마에게 우리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서로 이야기했던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사랑하면서 저지른 수많은 실수 가운데 대부분의 실수는 피할 수가 있을 텐데라고.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회귀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를 입에 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바람이다.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텐데, 시간을 되돌려놓기만 한다면 사태의 흐름을 되돌려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바람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다시금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지나간 오류를 되돌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경험이 풍부해진 뒤에 결정하게 되면 훨씬 더 이성적이고 훨씬 더 지혜롭게 결정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 회귀의 유토피아뿐만 아니라 인생은 실험실――이 실험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실존이 어떤 형태인가를 철저하게 시험해 볼 수 있다――이라는 무질의 생각마저도 논박한다. 세계를 실험실에 비교하는 것은 그에게 이제 옛 생각을 다시금 일깨웠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최상의 형식을 철저하게 시험하고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위대한 실험실이 인생이라고 그는 전에 종종 생각했다.
프란츠의 눈으로 보면, 사비나는 혁명의 \’대장정\’과 1968년 프라하의 봄이 구현하려고 했던 혁명의 근본 정신의 회복을 부단히 꿈꾸는 인물이다. 사비나 자신에게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스울 뿐이다. 오히려 사비나는 감당하기 힘든 모든 개별적인 숙명과 개개의 진지한 인간 관계가 몰고 오는 중압감으로부터 자꾸만 달아나려는 인물일 뿐이다. 사비나는 억지 웃음, 억지 사랑, 억지 행복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의 키치로부터 탈출한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러나 사비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취감이 아닌, 공허일 뿐이다. 그녀를 위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사람도 전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는 사람조차 전혀 없으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전혀 없다.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가 새로 사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신의 고향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상투적인 것일 뿐, 실상과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뒤늦게 맞닥뜨린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새로운 현상이다. 고대의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자명성, 유희성, 자발성으로 이해했던 가벼움은 후세에 무구속성, 무의미성 그리고 덧없음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프란츠와 사비나의 관계는 풍요와 사회적 성공을 이룬 시점에서, 가벼움을 빈정대는 분위기 속에서 서로 갈라섬으로 끝이 난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관계는 이와는 달리 신분적으로 더 이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곳이 없는 곳, 사회에서 소외된 저 시골 구석, 물질적으로도 궁핍한 상황에서 조화를 맛보게 된다. 이 조화는 정적인 것이 본질인 전원의 세계에서 극치를 누린다. 이 조화는 참평안이지, 계속되는 발전이나 또 다른 길의 모색은 결코 아니다.
전원시란 말이 테레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가?
구약성서의 신화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전원시란 낙원에 대한 회상으로서 우리들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는 하나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낙원에서의 삶은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직선의 진행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모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아는 것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낙원에서의 삶이 갖는 단조로움은 지루함이 아니고 행복이었다.인간이 시골의 자연 속에서 가축들에 둘러싸여, 계절과 계절의 변화 속에 보호받고 살았던 때만 해도, 적어도 낙원 전원시의 반영이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쿤데라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전원은 현대의 체코 마을이 아니다. 어찌됐든 그곳에서 토마스는 정비 상태가 불량한 트럭을 몰고 가다가 노면 상태가 형편없는 도로에서 죽는다. 현대의 마을 거주민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몰라보는 아담이 결코 아니다. 테레사에게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삶의 리듬에 대한, 토마스와 그녀의 개 카레닌이 늘 그녀 곁에 있어서 생활 영역이 늘 일정한 삶에 대한 동경이다. 소설 끝부분을 휘감고 있는 것은 이에 대한 동경의 침울함이며, 이 침울함은 한 마리의 개에 대한 사랑과 그 개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갈 때 나타난 동정심에 잘 구현되어 있다.
어려웠던 시간은 이러한 침울한 조명을 받으며 우리의 시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가장 주목할 만한 현대의 사랑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이 전면에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을 하며, 동정을 베풀며 전원 세계와의 융화를 동경하면서 덧없음과 \’망각의 시간\’이라는 가소로운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유럽과 미국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유력한 일간지들의 문학 비평란에 앞다투어 소개되는――그러나 그 서평자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지 않았다――영광을 누린 소설이다.
이 소설을 미국 영화 감독 필립 카우프만(Philip Kaufman)이 영화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영상화법은 쿤데라의 지적인 소설 문체는 영상 언어로 옮겨질 수가 없다는 점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시나리오는 텍스트의 철학적인 층위와 꿈의 층위는 사상시키고, 사비나와 토마스의 거울 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나리오는 텍스트의 다의성을 파괴했다. 토마스, 테레사와 사비나에 대한 이야기가 구태의연한 삼각관계의 사랑놀음으로 축소되었고, 그들의 미세한 애정 관계는 할리우드 식의 진부한 정사 장면들의 나열로 변질되었다.
쿤데라의 소설 문법은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소설가들—-이들 작가들은 자신들의 전언을 사건과 등장 인물 속에 감춘다. 그리고 그 전언에 상징과 은유와 알레고리라는 옷을 입힌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언어를 부린다—-의 문체와는 확연히 다르다. 쿤데라의 언어, 쿤데라만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 쿤데라의 지적인 문체는 분명한 의미 전달만을 문제삼는 현대의 문장론을 파괴—-문학 텍스트의 다의성과 단의성 간의 긴장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하려고 나섰다. 쿤데라 소설의 화자는, 그가 어떤 이야기꾼의 탈을 쓰고 (소설의 시작과 함께, 또는 소설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 등장하든 간에, 이성적인 논평과 성찰을 하며 사건의 진행 속으로 몸소 뛰어들고, 자기가 한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핵심을 드러내며 독자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해설한다. 그러나 이야기에 곁들여지는 화자의 이 해설보다는 이야기 그 자체의 맛이 훨씬 더 독창적이고, 맛도 풍부하고, 훨씬 더 깊이가 있다. 쿤데라의 논평은 독자들의 회의를 무효화시킨다.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토마스의 난봉꾼 기질, 또는 토마스에 대한 테레사의 낭만적인 성격이 그 좋은 예이다. 소설을 읽어가게 되면 텍스트 스스로가 작가의 의도—-이 의도는 소설 곳곳에서 마주치는 화자의 성찰을 통하여 획득된다—-를 서서히 노출시킨다. 결국 독자는 토마스와 테레사에 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생각은 새로운 차원의 정신 활동이며, 작가가 작품 속에서 펼치고 있는 제한된 해설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다양하게 보게 만든다—-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를 뛰어넘도록 하는 소설의 미덕—-이 미덕을 쿤데라는 톨스토이가 창조해 낸 안나 카레니나의 문학적인 성격(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도덕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의 처절하게 비극적인, 따라서 독자들의 심금과 연민을 일깨우는 형상으로 바뀐다.)을 예로 들면서 언급한 바 있다—-은 새로운 관점에서 토마스와 테레사를 보도록 유도한다. 해설자로 등장하는 쿤데라는 소설과 거리를 유지하며 조롱기 어린 목소리와 비판적 회의를 거침없이 토해 낸다. 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은 소설의 미덕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인공들을 피가 통하는 인물로 부각시키고, 종전 이후 유럽문학에 등장한 가장 매력적인 연인들 가운데 한 쌍으로 각인시키는 것 역시 이 미덕의 공로이다.

Copyright ⓒ 1994 Carl Hanser Verag Munchen Wien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1997 Minumsa
『밀란 쿤데라의 문학』 (크베토슬라프 흐바틱/박진곤 옮김.1998, 민음사)에서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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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1929년 체코의 브륀에서 야나체크 음악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란 쿤데라는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프라하의 예술아카데미 AMU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1963년 이래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억압으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1968년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만이 쿤데라가 고국 체코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농담 La Plaisanterie』이 불역되는 즉시 프랑스에서도 명작가가 되다. 그 불역판 서문에서 아라공은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한바 있다.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들을 썼고 프라하의 고등 영화연구원에서 가르쳤다.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그리고 장차 체코의 누벨 바그계 영화인들이 될 사람들은 두루 그의 제자들이었다.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무렵의 숙청으로 인하여 그의 처지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은 도서관에서 제거되었고 그 자신은 글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되는 역경을 만났다. 1975년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왔을 때 “프라하에서 서양은 그들 스스로가 파괴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르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다가 1980년에 파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레사와 토마스는 우연히 서로 만났다가 사고로 함께 죽는다. 그들의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 배경에는 60년대 체코와 70년대 유럽을 뒤흔들어놓은 시련이 깔려 있다. 지금은 멀어져버린 체코이지만 쿤데라의 작품 한복판에 주인공인 양 요지부동으로 박혀 있는 체코,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라기보다는 신화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나라, 유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그 본질이 더 잘 보이는 듯한 그 나라. 변함 없는 성실성과 배반,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찢겨진 존재들의 복합성, 그리고 또한 둘로 쪼개진 세계와 유럽의 드라마와 작가의 근원적 정신질환의 원인은 체코에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 후 소설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가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1968년까지 나는 체코 국내의 소설가였을 뿐 아무것도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작품들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습니다만 체코 안에서 작가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프랑스를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선택한 겁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은 파리였고 나로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다. 지혜의 그물망이 촘촘하게 얽혀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농담』『생은 다른 곳에』『불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별』『느림』『정체성』『향수』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탁월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아서 메디치 상, 클레멘트 루케 상, 유로파 상, 체코 작가 상, 컴먼웰스 상, LA타임즈 소설상 등을 받았다. 미국 미시건 대학은 그의 문학적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8년에 출간된 『이별』은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문학상 프레미오 레테라리오 몬델로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별』은 현대의 살아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우리의 삶을 마치 모자이크처럼 정교하게 수놓으면서 사랑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 번역가 등의 거의 모든 문학장르에서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최근 작품으로는 『향수』와 오늘날 현대 소설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의를 쿤데라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지식, 문학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풀어 낸 에세이집 『커튼』등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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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룡 옮김

성균관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소설, 때때로 맑음 1, 2』, 『꿀벌의 언어』, 옮긴 책으로 『정체성』, 『도살장 사람들』, 『도망치기』, 『장엄호텔』, 『일 년』, 『포옹』, 『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이별 연습』, 『가을 기다림』, 『거대한 고독』, 『로즈의 편지』, 『사랑하기』,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 『고야의 유령』 등이 있다.

"이재룡"의 다른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