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안녕인 세계

주영중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5년 8월 20일 | ISBN 978-89-374-0832-8

패키지 양장 · 148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일상에 밴 무색무취의 악몽을 감지하는 주영중의 첫 번째 시집

몰락과 묵시와 침묵의 언어로 집요하고 내밀하게 그려 내는 회화적 시 세계

편집자 리뷰

■ 당신의 일상에 미세한 틈과 균열을 내고 스며드는 새로운 목소리

주영중의 첫 시집 『결코 안녕인 세계』는 회화적이다. 이런 특징은 “누구나 한번쯤 정물이 되는 때가 있다”(「두 사람」)나 “검정 크레파스로 죽죽/ 한 대여섯 가닥이면 뒷모습이 완성된다/ 사내가 금방 되돌아볼 것만 같다”(「검은 사내」) 같은 시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주영중 시인의 관심은 시와 회화를 수렴시키는 것에 있다. 시 「또 하나의 내가 빛 속으로 증발했다」는 파울 클레의 그림 「Destroyed Place」에서, 시 「목매단 자의 집」은 폴 세잔의 그림 「La maison pendu」에서 출발한다.

 

녹색은 따스하고 배경은 심심하다

창은 검어 잠잠하고

지붕의 삼각형은 약간 비틀려 있다

냉정하다면 시선을 거둬야 한다

이따금씩은 이중의 흔들림

그때마다 그가 비참하고 슬프다

그는 멀고도 왜 가까운지

그의 출몰의 배경에는 그러니까

바닥을 뒹구는 의자와 기울어지는 화병

질기게 매달려 흔들리는 끈

몸 안에서 누군가 목매었으므로

나는 집이 되었던 거다

―「목매단 자의 집」

 

세잔의 같은 제목의 그림을 언어적으로 데생한 이 시에서, 화자의 시선은 그림의 표면에 머물지 않는다. 검은 창 안쪽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을 상상함으로써 그림 속 사건에 가닿는다. 그리고 그 시선은 사건을 거쳐 마침내 내면을 꿰뚫는다.

 

무너지던 것에 대한 거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게

암석의 일부였는지 코뼈였는지

사랑이었는지 신념이었는지

―「비중격만곡증」

 

가령, 고요와 불안이 교차하는 곳에서

혁명은 싹텄는지 모른다

 

사랑할 수 없는 날이 오면,

떠날 것

무언의 직물을 짜고 있는 구름처럼

 

물음은 떠남에 있지

그래도 떠남은 돌아오는 것

 

나는 지나간 것들을 모르고

너를 잊는 기술을 모르고

―「구름의 서쪽」

  

몰락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눈을 지우는 방식으로 침묵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나는 몰락하는 방식으로만 아름다울 것

지워지는 방식으로만 아름다울 것이다

―「당신의 서판(書板)」

 

주영중의 시들에서는 삶의 여러 면에서 몰락의 신호를 감지라는 예민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몰락 그 자체가 아니라 “몰락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몰락은 결과이지만, 몰락을 향해 가는 것은 과정과 의지의 문제다. 몰락을 기꺼이 감내한다는 비장한 의지가 아니라, 몰락을 향해 가는 과정과 방법을 기꺼이 자초하겠다는 것이다. “눈을 지우는 방식으로 침묵하는 것”만이 비로소 진실을 보는 것을 가능케 한다. “몰락하는 방식”으로만, “지워지는 방식”으로만 아름다워진다고 믿는다. 일상적이고 친밀하고 관습화된 시선을 버리고, 이처럼 몰락과 묵시와 침묵을 통해 세계를 신선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작업은 혁명의 성격을 띤다. 그의 시는 이러한 일상의 혁명을 통해 미세한 틈과 균열을 내고 스며들어, 우리의 일상이 “결코 안녕인 세계”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 작품 해설에서

“사랑할 수 없는 날이 오면 떠날 것”, 조건은 언제나 사랑이다. 이 모든 사태의 유통기한은 사랑이다. 방법은 침묵이다. “무언의 직물을 짜고 있는 구름처럼” 단단하게 떠 있는 것, 떠서, 무(無)로 언어의 그물을 짜는 것, 그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눈앞의 비옥한 흙을 배반하고 몰락의 중력을 배반하고 시간의 미련을 배반하고 망각을 배반하고 떠남과 귀환의 사필귀정을 배반하고 급기야 무언을 배반할 생래적 모순을 품은 언어, 바로 거기, 고요와 불안이 교차하는 곳에서 혁명은 싹트는지 모른다. 이 시인의 붓끝을 보라.

—조강석(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주영중에게는 일상에 밴 무색무취의 악몽을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아궁이의 실금 속으로 사라지는 벌레, 신발 밑창의 파도 무늬 사이에 박혀 빠지지 않는 작은 돌, 선홍빛 내장을 도로에 쏟아 놓고 밭은 숨을 몰아쉬는 고라니…… 그런 것들이 문득 꿈틀거리며 생활의 공포로 둔갑하는 순간을 주영중은 무표정하고 진지한 얼굴로 응시한다. 그의 눈은 “영혼이 없는 유리”를 뚫고 들어가 “고무로 된 영혼”에 닿는다. 눈 밑에 경련이 인다. 식은땀이 난다. 그러나 그는 외면하지 않는다. 탄식하지 않는다. 함부로 차가워지지 않는다. 섣불리 뜨거워지지 않는다. 다만 열중할 따름이다. 이토록 정직하고 독하게 열중하는 자의 눈을 빌려, 당신은 이 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차원 X”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해욱(시인)

 

목차

1부

 

아침 운전

식탁보

춤추는 망령

목격자를 찾습니다

차원 X—변종들 혹은 흑마술

크레인 위에 올라앉은 달빛 고양이

횟집 칼잡이의 하루

녹슨 기계 수리공

바닥

카페 N

비중격만곡증

또 하나의 내가 빛 속으로 증발했다

소용돌이

요람을 흔드는 손

새의 기원

레인메이커

정지 비행

호루라기

기념일

 

 

2부

 

검은 사이프러스 숲

한강대교 북단에서 남단 방면 여섯 번째 교각에서

구름의 묵시록

시계

구름의 서쪽

피의 광장

분홍꽃

박수무당

당신의 서판(書板)

산 자의 초상

여장의사와 에로 비디오

그 자리

이불의 세계

목매단 자의 집

 

 

3부

 

망각의 숲으로 진입하시오

 

 

4부

 

검은 사내

진흙 속의 아이들

아이들이 오후 네 시를 통과한다

사랑의 인사

빙판 위를 날아가는 퍽

토크쇼

두 사람

곰팡이들의 시간

달랑게와 시지프스

깃털 같은 이야기

투시도

푸른 알을 낳는 거위

장난감 도시

구름의 신전

변신 놀이

 

 

작품 해설 | 조강석

고요와 불안의 구도

작가 소개

주영중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 《현대시》에 「정지 비행」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현재 대구대 기초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자 리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