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 전집 1

소설

계용묵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4년 11월 30일 | ISBN 978-89-374-1201-1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524쪽 | 가격 25,000원

책소개

탄생 100주년 기념 작가 계용묵의 소설과 산문집 출간 인간적 가치에 대한 긍정, 현실에 대한 담담한 묘사장인 정신이 빚어낸 언어적 품격 계용묵이 「백치 아다다」의 작가로만 기억되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낭만적이고 모호한 현실 인식을 걷어내고 당대적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포착한 작품을 창작해 낸다. 특히 당대의 현실을 묘사할 때,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거시적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일상적 삶의 국면에서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미시적 문제에 집중한다. 때문에, 총체적인 역사 인식이 부재하는 대신 당대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세목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난다.

편집자 리뷰

●계용묵은 「백치 아다다」 한 작품만으로도 한국 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사실 「백치 아다다」는 높은 지명도와 함께 계용묵의 소설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내세우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러나 계용묵이 「백치 아다다」의 작가로만 기억되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낭만적이고 모호한 현실 인식을 걷어내고 당대적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포착한 작품을 창작해 낸다. 특히 당대의 현실을 묘사할 때,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거시적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일상적 삶의 국면에서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미시적 문제에 집중한다. 때문에, 총체적인 역사인식이 부재하는 대신 당대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세목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난다. 사실 계용묵은 소품의 작가요, 과작의 작가다. 단편 분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품들이 허다한 데다가, 일생 동안 창작한 작품 수를 모두 헤아려도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데에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유별난 그의 장인정신이 적잖은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계용묵은 문장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공을 들였으며, 허투루 작품을 남발하지도 않았다. 계용묵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밝혀내지 못한 다양한 면모가 숨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새로운 면모를 밝혀내는 연구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정석(문학평론가)│작품 해설 중에서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가 계용묵의 소설과 산문을 묶은 전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전집은 2001년 이래 매년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가들을 기념해 문학제를 열어온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발의해 태어나게 된 것으로, 그동안 ‘과작의 작가’라는 이유 등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계용묵의 발표 작품들뿐 아니라 미발표 작품들까지 새로이 발굴해 엮었다. 엮은이 민충환(부천대 교수)는 발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너무 강렬한 것들, 큰 것들에만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용묵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집을 발간하면서 문득 이런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계용묵은 소품의 작가요, 과작의 작가다. 단 한편의 중ㆍ장편도 남김없이 오직 단ㆍ장편(掌篇)으로 일관한 작가며,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거나 그에 정면으로 맞서,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주제 의식이나 실험적 형식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작고 잔잔한 작품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기서 많은 미덕을 발견해 내게 된다. 계용묵은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친일적인 작품을 양산하지 않고, 올곧은 작가 정신을 견지하며 작품을 창작했다. 또 문장 하나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완벽에 가깝도록 공을 들였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 당대인이 처한 삶의 국면을 생생하게 포착해 내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계용묵이 지닌 그 모든 미덕들이 점점 잊혀만 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따라서 계용묵 전집의 출간이 그의 작품세계의 총체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특별히 이 전집에는 단순히 산재한 작품들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간 간행된 작품집에도 실려 있지 않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그의 등단작 「상환」, 그리고 「제비를 그리는 마음」과 야담 「효양방의 애화」, 서간문 「김환기 형」 등을 비롯해 계용묵 선생의 장남이신 명원(明源) 씨의 협조를 받아 작가의 소장본 원고(제목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수정된 판본)를 찾아 실었다. 또 가능한 대로 사투리를 복원하고 제목의 혼란을 바로잡은 것도 그 의의가 작지 않다. ■ 인간적 가치에 대한 긍정, 현실에 대한 담담한 묘사 작가 계용묵을 일러 흔히 ‘인생파 작가’라 일컫는다. 계용묵의 초기작들은 최서해 등 경향파 작가들의 작품들과 같이 사회 하층민들을 집단적으로 등장시켜 식민화로 인한 궁벽한 시대적 현실을 그리는 데 주력한 바 있다. 지주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유민으로 전락하는 소작인을 그린 「최서방」이나 일본 탄광 노동자로 끌려갔다가 불구의 몸이 되어 버린 인물을 등장시킨 「인두지주」 같은 작품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이 경향성이라는 다소 경직된 관점에 일관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면, 1935년의 작품 「백치 아다다」에 이르러 그는 ‘인생파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백치 아다다」에서는 소박한 인간적 가치에 더 주목하게 된 것이다.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는 순수와 욕망이라는 두 개의 극단화된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인간에 대해 연민을 보이고 있으며, 그 바보스러움에서 외견상의 정상인이 갖지 못한 순수함을 찾아낸다. 이는 계급적 대립이나 궁핍한 상황 자체의 노출에 주력하던 전작들에서보다 더 누그러진 시선으로 삶의 세세한 가치들을 주목하는 것으로, 혹자는 현실과의 적극적인 대결을 꾀하지는 않고 갈등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계의 거시적 맥락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고 생의 단면적 제시에만 국한”된 작가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인생을 담담하게 묘사한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치 아다다」에 이르러 기존의 경향성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계용묵은 지속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무엇보다 계용묵은 ‘소박한 행복에의 기대와 그 기대의 좌절’을 연민 섞인 관조적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생의 비애와 삶의 질곡을 담담하게 성찰했으며, 궁극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선량함과 순수성을 옹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인 정신이 빚어낸 언어적 품격 모두 44편의 소설을 모은 제1권과 102편의 산문이 실린 제2권의 짤막한 글들에서 빛나는 것은 언어적 조탁의 흔적이다. 원래 과작인 데다 콩트풍의 단편만을 썼으나, 짧은 것일수록 기교를 중시하고 예술적인 정교한 맛이 풍부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작은 작품임에도 울림만큼은 작지 않게 느껴진다. 앞서 발간사에서 엮은이가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 수가 적은 이유 역시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유별난 그의 장인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계용묵은 문장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공을 들였으며, 허투루 작품을 남발하지도 않았다. 성실한 작가, 계용묵의 미덕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소품에 불과한 짧은 작품에다가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넉넉하게 담아낼 줄도 알았다. 계용묵은 우리에게 단편 소설 「백치 아다다」뿐 아니라, 교과서에도 실렸던 수필 「구두」를 통해서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 가던 사내의 구두 소리가 앞서 가던 여자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는 이 일화에서도 인물의 심리가 재치 있게 잘 그려지고 있다. 또한 「심월」에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는 인물의 심리를 재미있게 묘사하며, 「후심」에서는 함정을 파놓고 동네 아이들에게 뜀박질 경쟁을 시키는 인물과 함정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뜀박질을 하다가 거기에 빠져 낭패를 보는 아이들을 통해, 짓궂은 인간의 내면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더욱이 계용묵은 평북 선천 출신답게 작품 속에서 평안도 사투리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있다. 「심월」 같은 짧은 작품에도, ‘쉬쌀’(‘수수쌀’의 방언), ‘뒤란’(‘뒤뜰’의 방언), ‘가리’(‘어리’의 방언. 병아리 따위를 가두어 기르는 물건), ‘곰배님배’(‘곰비임비’의 방언. 일이 계속하여 거듭되는 모양), ‘술가리’(‘언저리’의 방언) 등 감칠맛 나는 평안도 사투리들이 수두룩하다. 이는 김동인 이외에 평북 언어를 구사한 작가가 드문 현실을 감안할 때, 의미 있는 현상이다. 또 ‘재냥스레’(동작이 매우 재빠르고 야무지다), ‘방싯이’(문 따위가 소리 없이 살짝 열리는 모양), ‘얼결수’(얼떨결에 이루어진 수), ‘물러걸음’(뒤로 물러나는 걸음) 등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운 우리말도 계용묵의 작품이 지닌 미덕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계용묵(1904~1961)
1904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조부에게서 『천자문』, 『소학』, 『대학』, 『논어』, 『맹자』 등 한학을 배웠고,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1921년 상경해 중동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김억,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유하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으나, 조부가 신학문을 반대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다시 상경,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다시 강제로 낙향하게 되어 고향에서 4년간 지내면서 외국 문학 작품들을 탐독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하고 야간에는 정칙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1931년 집안이 파산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은 「상환(相換)」으로 1925년 《조선문단》에 실렸다. 1935년에는 정비석, 석인해 등과 함께 동인지 《해조(海潮)》의 발간을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938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43년 일본 천황 불경죄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방송국에 들어갔으나 사흘 만에 그만두었다. 1945년 정비석과 함께 종합지 《대조(大潮)》를 창간하고, 1948년에는 김억과 함께 ‘수선사(首善社)’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웠다. 또한 1·4후퇴 당시 피난을 갔던 제주도에서 월간 《신문화》를 펴내기도 했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엮은이 민충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부천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이태준 연구』, 『이태준 소설의 이해』, 『임꺽정 우리말 용례사전』, 『이문구 소설어 사전』, 『송기숙 소설어 사전』, 『박완서 소설어 사전』 등이 있다.

목차

<계용묵 전집> 발간에 부쳐 ㅣ 민충환   상환 최서방 백치 아다다 장벽 인두지주 제비를 그리는 마음 연애삽화 고절 병풍에 그린 닭이 심월 목가 오리알 심원 붕우 청춘도 유앵기 캉가루의 조상이 신기루 후심 시 마부 부부 희화 이반 준광인전 묘예 시골 노파 수달 자식 불로초 별을 헨다 금단 인간적 바람은 그냥 불고 일만 오천 원 짐 이불 수업료 물매미 환롱 치마감 치마 거울 설수집   부록 작품 연보 연구 자료 해설-과작의 작가 계용묵의 적잖은 미덕 ㅣ 이정석(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계용묵

1904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조부에게서 『천자문』, 『소학』, 『대학』, 『논어』, 『맹자』 등 한학을 배웠고,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1921년 상경해 중동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김억,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유하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으나, 조부가 신학문을 반대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다시 상경,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다시 강제로 낙향하게 되어 고향에서 4년간 지내면서 외국 문학 작품들을 탐독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하고 야간에는 정칙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1931년 집안이 파산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은 「상환(相換)」으로 1925년 《조선문단》에 실렸다.
1935년에는 정비석, 석인해 등과 함께 동인지 《해조(海潮)》의 발간을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938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43년 일본 천황 불경죄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방송국에 들어갔으나 사흘 만에 그만두었다. 1945년 정비석과 함께 종합지 《대조(大潮)》를 창간하고, 1948년에는 김억과 함께 ‘수선사(首善社)’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웠다. 또한 1·4후퇴 당시 피난을 갔던 제주도에서 월간 《신문화》를 펴내기도 했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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