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고민상담소

독자 상담으로 본 근대의 성과 사랑

전봉관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4년 6월 20일 | ISBN 978-89-374-8922-8

패키지 반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24쪽 | 가격 19,800원

책소개

1930년대판 「마녀사냥」,
그 시절 청춘들의 뜨거운 고민이 되살아나다

『경성기담』의 저자 전봉관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고민’과 ‘사랑’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풀어내기 위해 1930년대 신문 독자상담 코너에 주목했다. ‘남녀 문제, 가정 문제, 어찌하리까?’라는 표제 아래, 그 시절 사람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뜨거운 고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하던 1930년대는 ‘성 윤리의 아노미 시대’라 할 만큼 혼란했고, 마마보이, 폭력 남편, 바람둥이 등이 그 틈을 비집고 기승을 부렸다. 이 책은 뜨거웠던 청춘의 고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당대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분석하고, 근대인들의 일그러진 일상을 추적한다.

편집자 리뷰

■ 왜 근대의 사생활인가?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하던 1930년대는 ‘성 윤리의 아노미 시대’라 할 만큼 혼란했다. 자유연애의 도입으로 이제 막 사랑에 눈뜬 근대인들은 전근대 가족 윤리와 끓어오르는 연애 감정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잦은 폭력으로 병상에 누운 아내를 강제 퇴원시키고 그 돈으로 오입질하는 남편, 처제를 임신시키고도 자살하라 명하는 뻔뻔한 형부, 관계하고 나니 재미가 적어졌다며 약혼을 해소하려 드는 파렴치한이 판치는 시대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왜 이 혼란의 시대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때, 지금 우리의 사생활을 규정하는 가족 문화와 성 윤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이어졌던 조혼의 병폐가 공론화되고,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의 해법으로 이혼이 제시되었으며, 양육비나 위자료 같은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가혹한 시집살이와 고부 갈등은 지금도 수많은 가정불화의 주요 원인이고, 성차별적인 정조 관념 역시 잔존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구조적 모순이 낳은 성 문제, 가정 문제로 고민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문학자 특유의 날 선 통찰력으로 개인의 사적인 고민 뒤에 숨은 사회구조적 모순들을 짚어 낸다. 저자는 1930년대 남성들의 성적 방종, 제2부인 문제, 가정 폭력의 기저에 조혼 풍습, 뿌리 깊은 정조 관념, 남성의 간통죄를 규정하지 않는 법 규정 문제 등이 얽혀 있었음을 확인하고, 길항하는 가치들의 충돌이 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비극으로 몰아갔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 성폭행 당한 여성은 간통녀?

아내가 강간당했다. 여자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침입한 괴한의 소행이다. 아내는 있는 힘껏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아내의 행동도 미심쩍어 재차 물었더니 사정을 털어놓았다.
일반적인 남편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내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성폭행범에 대한 분노에 힘들어 하며, 우선 아내의 상처를 보듬으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런 후 개인적으로든 경찰의 힘을 빌려서든 범인을 찾아 처벌하려 했으리라. 하지만 1930년대 남성들은 달랐다. 그들은 아내를 간통녀로 몰고, 집에서 나가라고 악다구니 쳤다. 심지어는 간음한 여성과는 살 수 없으니 재혼 비용을 대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면서도 성폭행범을 찾는 데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면식범의 소행임을 고려할 때, 아마도 범인이 남편과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남성들이 이토록 어이없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강간과 간통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무지해서일까? 무지가 원인은 아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은 이유를 불문하고 간통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대의 상식’이었다. 당대 최고 엘리트이자, 진보 인사였던 변호사 신태악 역시 그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의 처가 되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였다 하는 것은 법률상으로 보든 도덕상으로 보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임은 물론이지만 당신의 처가 한 번 실수로 그와 같이 실행한 뒤 지금 와서는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당신에게 그처럼 전후사를 자백한 뒤 다시는 그런 비행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이상 이제 구태여 지나간 일을 들추어 문제를 삼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든 당신 처를 위해서든 하지 않을 일인가 합니다. (197~198쪽)

근대 교육을 받은 변호사조차 강간과 간통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자유연애와 여성 권리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었으나 정조에 집착하는 전근대 성 윤리가 훨씬 뿌리 깊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고도 위로받기는커녕 그보다 훨씬 가혹한 2차 피해에 시달렸지만, 남성들은 방종에 가까운 성적 자유를 누렸다.

■ 남자를 만나 정조를 잃느니 차라리 동성연애를 하려무나!

이성과의 만남보다 동성애가 더 자유로웠다? 이성 간의 연애는 당연시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떨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1930년대에 상황이 이러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유연애의 확산으로 연애에 대한 갈망은 커졌지만, 뿌리 깊은 정조 관념 때문에 이성과의 만남에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한창 나이의 학생들이 한 공간에 모여 단체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동성애 확산에 기여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남녀공학보다 여학교, 남학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이 시기 동성애 붐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신문 기자, 산부인과 의사 등 내로라하는 여성 명사들이 잡지 지면에 자신의 동성애 경험을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여학생 시절에 동성연애를 안 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경험해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도 더러 있지요. (252쪽)

열네다섯 살 때 진명여학교를 다니면서 동성연애를 많이 했습니다.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았을 걸요! (253쪽)

기성세대가 동성애에 관대했던 것은 그들의 만남이 ‘정조의 파괴’라는 물리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는 학생들의 동성애를 동기간의 우정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당시의 동성애는 정신적인 사랑뿐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동반하는 것이었다. 아래 글은 당시 동성애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는 나를 마치 여성처럼 받아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손을 만지고, 껴안고, 뺨을 대고, 키스를 해도 다 가만히 받아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둘 다 남성이면서도 꿀 같은 연애 생활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256쪽)

이처럼 1930년대 한국은 이성애보다 동성애에 더 개방적인 특이한 현상을 보였다. 자유연애 풍습을 받아들이면서도 봉건적 정조 윤리를 고집한 결과였다. 그 같은 괴리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대개 수많은 청춘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 아이까지 낳고 보니 남편은 부인 있는 사나이

금년 21세의 여자올시다. 이미 남의 아내 된 지 4년, 또한 자식이 둘씩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남편에게는 멀쩡한 본처와 자식이 오 남매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안 저는 참 기가 막힙니다. 이제 와서 아니 살자니 천덕구니 자식 볼 생각에 불쌍해 못 견디겠고, 서로 헤어지기는 매우 곤란한데 세상에 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선생님, 아니 살아야 옳을까요, 그대로 살아야 할까요? (66쪽)

위 내용은 「어찌하리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연 가운데 하나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에게 본처와 자식들이 줄줄이 달렸더라는 제2부인들의 절절한 신세 한탄 말이다. 실제로 1930년대에는 한 남성이 둘 이상의 아내와 사는 일이 흔했다. 물론 식민지 조선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일부일처제 국가였기 때문에 법적인 중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번째 아내를 전근대적 의미의 첩과 비교하기도 어려웠다. 자유연애를 통해 남편과 맺어진 제2부인은 사랑이라는 확실한 결혼의 근거를 갖고 있었고,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 면에서 본처보다 우월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기이한 혼인 양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제2부인 문제는 주로 조혼 풍습의 만연과 신여성들의 결혼난 때문에 발생했다. 10대 초반에 부모의 강요로 결혼한 젊은 남성들은 종종 학교에서 만난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스스로 선택한 이도 아니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구여성 아내보다 신여성 애인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연령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배우자감으로 적당한 남자들은 대부분 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신여성들도 별 수 없이 제2부인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여자의 외도는 엄격하게 처벌하면서 남자의 외도는 묵인하는 성차별적인 간통 법규도 문제였다. 구여성 본처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새 살림을 차려도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었고, 오히려 내쫓김을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남편의 외도를 구실로 이혼을 신청할 수는 있었지만, 위자료 및 양육비 지급에 대한 규정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었다. 더구나 여성의 직업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당시 뚜렷한 지식이나 기술도 없이 이혼한 여자 혼자 생계를 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제2부인 문제의 최대 피해자는 물론 구여성 본처였지만 그렇다고 제2부인들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불안정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본처와 혼인신고를 마쳤을 경우, 제2부인은 법적으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자식을 낳아도 아버지 호적에 올릴 수 없거나 서자로 기록되어 차별을 받았다. 본처를 두고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 남성이 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제2부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또한 차가웠다. 그들은 가정 파괴의 가해자인 동시에 사회구조적 모순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이렇듯 기묘한 사회 구조 속에서 남성들은 입맛에 따라 본처를 내치거나 제2부인을 들이고, 새로운 여성을 찾는 등 무한한 성적 자유를 누렸다. 1930년대 남성들에게는 혼인의 신의성실의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나쁜 남자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 ‘시월드’의 탄생

시댁이 싫어 ‘시’ 자로 시작하는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를 봐도 착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건 언제나 시어머니 혹은 예비 시어머니들이다. 최근에는 ‘시월드’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언제부터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이렇듯 깊은 골이 생긴 걸까?
흔히 고부 갈등이 유교 관념이 철저해 여성의 권리가 낮았던 조선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시대에는 고부 갈등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넓은 의미의 갈등에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학대도 포함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갈등은 쌍방의 대립과 충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일방적으로 학대한 전통적인 시집살이를 고부 갈등으로 보기는 어렵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남성을 두고 격렬히 대립한 고부 갈등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에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본문 156쪽)”
그렇다면 시집살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물론 시집살이 그 자체는 유교 윤리의 산물이다. 남녀 간의 성 역할을 구분하면서 여성에게는 남성에 비해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대신, 어머니에게는 ‘효(孝)’라는 덕목을 내세워 높은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권력 관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집착하는 이유 역시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유교 관념과 잘 맞아 떨어진다. 이에 따르면 여자는 남편이 죽고 난 후 아들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같은 원리에 의해 며느리 역시 그녀의 남편인 아들을 따라야 하므로 두 여성은 부득이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근대적인 남녀평등 사상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었다. 신문명의 혜택을 받은 여성들은 시어머니에게도 남편에게도 무조건 순종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경험한 며느리상과 완전히 다르게 행동하는 신식 며느리에게 불만을 느꼈고, 며느리 역시 시어머니의 부당한 대우를 계속 참을 수만은 없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 결국 고부 갈등으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부 갈등으로 몸살을 앓는 가정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1930년대의 고부 갈등이 전근대와 근대의 교차점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현상이었다면, 80여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불합리한 시집살이에 저항하던 용감한 모던 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녀들은 모두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는 전통적인 시어머니가 되고 말았는가?

지금은 당연시되는 성 윤리는 전근대와 근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복잡하게 얽힌 특수한 공간에서 만들어졌다. 길항하는 윤리 구조 사이에서 개인들의 욕망과 기획, 좌절과 고통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지만 모두 무형의 근대가 이식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보편적 가치인 듯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랑과 연애 역시 근대의 탄생과 발맞추어 일정한 틀로 주조되었고, 모든 사랑과 연애, 가족은 아직도 그 진한 그늘에서 작동하고 있다. 독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감정과 삶의 방식의 탄생 지점을 돌아봄으로써 그것의 인공성과 우연성, 특수성을 중층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1장 조혼이라는 감옥
1. 꼬마 신랑 꼬마 신부
2. 학자까지 대 주며 뒷바라지했건만
3. 모두가 불행한 선택, 조혼
경성 스케치 – 그녀들의 마지막 선택: 살인, 방화, 자살

2장 제2부인의 탄생
1. 남편의 이혼만 기다립니다
2. 신여성의 결혼난과 제2부인을 향한 시선
3. 기혼 청년들의 항변
경성 스케치 – 춘원 이광수와 그의 두 아내

3장 바람난 가족
1. 남자의 사랑은 무죄?
2. 참고 또 참아도
3. 아내, 반란을 일으키다
경성 스케치 – “외도를 하면 배우자에게 더 충실할 수 있다.”

4장 여성 수난사
1. 고부 갈등의 탄생
2. 매 맞는 아내
3.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할지니
경성 스케치 – 미신과 사교(邪敎)

5장 과도기의 성
1. 전근대 성 윤리의 그림자
2. 정조 윤리의 해체
3. 관계하고 나니 재미가 적어
4. 어느 미혼모의 고백
경성 스케치 – 여학생이라면 동성애 한 번쯤은

6장 금지된 사랑
1. 이혼녀, 연상녀, 과부
2. 사랑과 우정 사이
3. 이중 연애, 누구와 살아야 할까요?
경성 스케치 – “전남편의 정충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맺음말

작가 소개

전봉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KAIST 인문사회과학과 및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근대 문학을 공부하다가 그 시대 문화의 발랄함과 역동성에 매료되어 박사 학위 취득 후 본격적으로 근대 문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근대 조선의 살인 사건, 스캔들, 투기, 사기·협잡, 자살 사건, 가정 문제, 애정 문제 등을 매개로 현대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비판하는 독특한 형식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

독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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