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흐르다

신달자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4년 2월 28일 | ISBN 978-89-374-0823-6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40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고립의 새벽, 그 속살을 어루만지는 시의 숨결

어둠과 빛이 하나가 되어 흐르는 시간

허공에 한 장 그림이 걸리듯 치솟아 오르는 밀도 높은 시의 순간

 

반백 년 시와 함께 흘러온 삶이다. 2011년 『종이』 이후 3년 만의 신작 시집 『살 흐르다』는 1964년 등단 이후 50년 동안 쉼 없이 시를 써 온 신달자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다. 갓 스물에 등단한 시인은 어느덧 일흔을 넘겼다. 『살 흐르다』에 실린 70편의 시들은, 고립의 새벽, 어둠이 빛을 깊이 끌어안고 하나가 되어 흐르는 시간에 허공에 한 장 그림이 걸리듯 치솟아 오른 밀도 높은 시편들이다.

삶의 실존론적 고뇌를 섬세한 여성적 감성으로 표현하며 우리 문학에서 여성 시의 영역을 개척하고 대표해 온 신달자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불모의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모성과 여성성을 통해 생기 넘치는 생명의 세계를 보여 준다.

그녀의 시들은 일상적인 소재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만지는 모든 것은 시가 된다. 시로 밥을 짓고 시로 국을 끓인다.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잘 우려낸 깊은 맛의 국물, 그 “고요의 맛”으로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 준다. “굳은 것들 자근자근 풀리고” “온몸을 따스히 흐르다 차오”른다.

시인은 질곡의 세월 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서 깨달은 인생의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보여 준다. 삶의 한 고비를 넘어온 여성의 여유로움과 따스함, 모성과 포용력이 느껴진다.

신달자 시인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시를 만난다. 그녀가 만나는 모든 것들의 속내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저승에서도 영 받아 주지 않던” “그 상처의 미라들”에게 “의자가 되어 주는 일 오늘 소일거리다”라고 말하는 그녀, “쫓겨난 슬픈 별이라고 말하며 널 받는” 그녀. 그것이 바로 그녀의 시가 어둠 속에 빛처럼 우리의 삶에 스며드는 까닭이다.

편집자 리뷰

■ 흘러 사라져 버리는 새벽의 속살을 어루만지다

순두부, 물오징어, 북엇국, 손톱 관리, 가정백반, 스타벅스, 삼익떡집, 선지 해장국, 강남구 신사동 먹자골목…… 어느 시장 골목에 간판으로나 걸릴 법한 단어들이지만, 그녀의 시집에서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의 시들은 이런 게 어떻게 시가 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일상적인 소재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만지는 모든 것은 시가 된다. 시로 밥을 짓고 시로 국을 끓인다.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잘 우려낸 깊은 맛의 국물, 그 “고요의 맛”(「국물」)으로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 준다. “굳은 것들 자근자근 풀리고” “온몸을 따스히 흐르다 차오”(「스며라 청색」)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시가 단순히 생활의 일상적 감정을 전하는 데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살가운 손끝은 그저 방법론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것은 할머니와 어머니와 나와 내 딸의 시간과 공간을 아우른다.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내리고 있다

살 흐르는 소리가 살 살 내리고 있다

30년 된 나무 의자도 모서리가 닳았다

300년 된 옛 책장은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

그 살들 한마디 말없이 사라져 갔다

살 살 솰 솰 그 소리에 손 흔들어 주지 못했다

소리의 고요로 고요의 소리로 흘러갔을 것이다

조금씩 실어 나르는 손이 있다

멀리 갔는가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

 

거기 가늘가늘 소리 들린다

 

다 닳는다

 

다 흐른다

 

이 밤 고요히 자신의 살을 함께 내리고 있다.

―「살 흐르다」 전문

 

“어둠까지 얼어 아침은 오지 않을 것만 같”고 “숨 쉬는 일 없이 딱 멈춰 백년 갈 듯한” “적막의 뿌리”에 가 닿은 “고립의 새벽”, “혹한의 침묵”(「적막의 뿌리」) 속에서 시인은 어떤 소리를 듣는다. 고요의 소리.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의자의 모서리가 닳아 있고 책장의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 그 ‘살’들이 말없이 사라져 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살들을 조금씩 실어 나르는 동안,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듯, 살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것은 고요의 세계와 그 세계의 비밀이다. 시인은 관조의 눈으로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이루고 있을 평화로운 “어느 흰빛 마을”을 바라본다.

2부에 실린 다섯 편의 「혀」 연작시는, “단 한마디로/ 천년 덕을 누리고// 단 한마디로/ 만년 덕을 허무는” “말의 빛”과 “말의 그늘”을 노래한다. 하루 동안 내가 했던 “살인적 독설”과 “포악한 말의 소나기”들을 설거지하며, “묵상의 책상” 앞에 꿇어 엎드려 “입안에 촛불 하나 켜”고 “수위 높은 침묵”과 “고요 한 덩어리”로 “진실”을 숙성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녀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결혼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수발하며, 시어머니와 어머니의 죽음, 본인의 암 투병 속에서도 세 딸을 홀로 키우며 희망을 잃지 않고 시에 대한 열정으로 고통을 이겨 냈다. 화려한 삶 뒤에 감추어진 처절한 고통의 나날들을 견디며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건져 올렸다. “이마로 날파람을 격파하며 살아온”(「턱」) 여장부였으며, “둥근 슬픔 하나로” 장미꽃을 세우기보다 “차라리 가시를” 세우고 “발포를 하듯 불”을 질러 “지구 하나”를 그 “이빨 사이에서 가루”(「불 지르다」) 내려 했던 모험가였다.

 

밤새 내리고 아침에 내리고 낮을 거쳐 저녁에 또 내리는 비

적막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래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계속 보여 주는구나

고맙다, 너희들 다 안아 주다가 늙어 버리겠다 몇 줄기는 연 창으로 들어와

반절 손을 적신다 손을 적시는데 등이 따스하다

죽 죽 죽 줄 줄 줄 비는 엄마 심부름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춤추듯 노래하듯 긴 영화를 돌리고 있다 엄마 한잔할 때 부르던 가락 닮았다

큰 소리도 아니고 추적추적 혼잣말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비

이젠 됐다라고 말하려다 꿀꺽 삼킨다 저 움직이는 비바람이 뚝 그치는

그다음의 고요를 무엇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표현이 막막하다.

―「내 앞에 비 내리고」 부분

 

지옥 같은 삶 속에서 “너희들 다 안아 주다가 늙어 버리겠”지만, 시간이 흐르듯 살도 흘러 사라져 버리겠지만, 끝내 “고맙다”라고 말한다. 삶의 한 고비를 넘어온 여성의 여유로움과 따스함, 모성과 포용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질곡의 세월 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서 깨달은 인생의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보여 준다.

신달자 시인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시를 만난다. “미동도 하지 않는 너의 속내를/ 귀 기울이는 것이 나의 시”(「혀 3」)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가 만나는 모든 것들의 속내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저승에서도 영 받아 주지 않던” “그 상처의 미라들”에게 “의자가 되어 주는 일 오늘 소일거리다”라고 말하는 그녀, “쫓겨난 슬픈 별이라고 말하며 널 받는”(「잡티」) 그녀. 그것이 바로 그녀의 시가 어둠 속에 빛처럼 우리의 삶에 스며드는 까닭이다.

 

한 줄 시에

한 생을 음각하고 있네

거기 생을 새겼으므로

수억 년 후에도 지워지지 않을 것

흘러 흘러 가고 있을 것

별마다 찾아가 노래 불러 주고 있을 것

저 하늘 구름 한 덩이

―「구름 시비」 부분

 

 

 

■ 시인의 말

 

여명의 어둠이 아주 조금 엷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 저는 버릇처럼 창 앞에 섭니다. 그리고 새아침을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설렙니다. 어둠과 빛의 분량이 비슷한 그 순간의 어울림은 청색입니다. 거기 나의 안식이 있을 듯도 합니다. 거기 생의 의문과 답이 다 있을 듯도 합니다. 잠시 그 청색은 환해지면서 어둠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리고 밝은 빛이 가득해지지요.

저는 그 청색 빛의 어둠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흐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 청색 빛의 시간이 흘러 저녁의 어둠 속 청색에 가 닿고 그리고 하루는 어둠의 고지를 넘어 다시 아침으로 흐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저도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여러 불순물 때문에 몸과 생각이 다치기도 했으나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새 시집 한 권을 들고 무엇인가 민망하고 절박하게 조금은 떨면서 서 있습니다. 그대를 만나면 조금은 환해질 것을 믿으며 말입니다.

 

 

■ 작품 해설에서

 

햇빛에 드러난 삶도 달빛에 젖는 삶도, 삶은 자주 팍팍한 모래밭인데, 신달자 시인에게서는 그럴수록 밀도 높은 시의 순간이 허공에 한 장 그림이 걸리듯 문득 치솟아 오르곤 한다. 신달자 시인은 어느 길목에서나 그 시를 만난다. 가구들의 살이 흐를 때 오래 고뇌했던 한 육체의 살도 흐르는데, 미뤄 둔 빨랫감이, 돌리다 만 청소기가,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낡은 상자들이 푸른빛의 기운을 띤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가. 신달자 시인은 두 다리와 두 눈을 지금 이 자리에 두고 살면서도 여전히 다른 것을 본다. 내가 그의 시집 발간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목차

1부

 

내 앞에 비 내리고

살 흐르다

스며라 청색

불 지르다

가정백반

10주기(週忌)

딸들의 저녁 식사

국물

헛눈물

대화

비 온다

외로움도 스트레칭을 한다

고요 속으로

씀씀이

연분홍빛 풍경

너의 아침 나의 밤

빗질

아버지 가라사대

잡티

순두부

벙어리 고모

 

 

2부

 

혀 1

혀 2

혀 3

혀 4

혀 5

 

 

3부

 

백색 소리

칼이 없다

먼 산

저 여자!

겨울 만해마을 1

겨울 만해마을 2

겨울, 설악 바람

갑옷을 입은 호랑이 떼들일까

두 개의 손

겨울 산

막고굴 1001호

나의 적막

적막의 뿌리

고요 우묵하다

압구정역에서 옥수역까지

물오징어

북엇국

살림하는 바람

키스

모자

일박

압축

있다 없다 전설 같은 연애 하나

무너지는 소리 나는 듣지 못했다

손톱 관리

대장장이 강호인

어름사니 권은태

풀피리 문화재 박찬범

깊은 잠

다시 겨울

지나가는 것

식당 풍경

스타벅스에서

삼익떡집

더 희극적으로

이스라엘 고양이

선지 해장국

수필

철버덕

구름 시비

강남구 신사동 먹자골목

 

발문/황현산

허공에 걸린 그림처럼

작가 소개

신달자

194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했고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했다. 『열애』, 『종이』, 『북촌』 등 다수의 시집이 있다.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정시문학상, 만해대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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