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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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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이장욱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3년 12월 13일

ISBN: 978-89-374-7304-3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95x135 · 276쪽

가격: 14,000원

시리즈: 오늘의 젊은 작가 4

분야 오늘의 젊은 작가 4


책소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A의 교통사고가 불러일으킨
세 남녀의 예측할 길 없는 하룻밤 기묘한 여행
언어의 연금술사 이장욱이 선보이는 매혹적인 “신(新)서사”의 탄생

우리 시의 미래에 이장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 소설의 미래도 이장욱을 가졌다.
―백지은(문학평론가)

소설을 읽는 동안 당신은 “천국보다 낯선” 희열을 맛보게 될 것이다.
―강지희(문학평론가)


목차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정(鄭)
무방비 도시 ․ 김(金)
시계태엽 오렌지 ․ 최(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정(鄭)
매그놀리아 ․ 김(金)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 최(崔)
국가의 탄생 ․ 김(金)
20세기 소년 독본 ․ 최(崔)
겨울의 심장 ․ 정(鄭)
바디 스내처 ․ 김(金)
노킹 온 헤븐스 도어 ․ 최(崔)
지상에서 영원으로 ․ 정(鄭)
커피와 담배 ․ 염(廉)

작가의 말
작품 해설_ 백지은(문학평론가)
다른 계절의 원근법


편집자 리뷰

■ 웹진문지문학상,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한 언어의 연금술사 이장욱이 선보이는 전혀 낯설고 새로운 감각적 세계

“진부한 장르적 관습을 의심하”며 “낯선 감각과 첨예한 자의식”(문학평론가 진정석)으로 “우리 시대의 삶과 죽음 전체를 놓고 전면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작가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이 ‘오늘의 젊은 작가’ 04로 출간되었다.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 이후 3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낯설고 “치밀한 구성과 모호한 어조로 그려 내는 남다른 재주”(문학평론가 김형중)는 이번에도 “작가의 소설적 역량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가고 있”(문학평론가 이광호)음을 어김없이 증명한다.
문학평론가 백지은은 “우리 시의 미래에 이장욱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 소설의 미래도 이장욱을 가졌다.”고 평하며 『천국보다 낯선』을 “신(新)서사”의 탄생이라 지적했고, 문학평론가 강지희 역시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당신은 천국보다 낯선 희열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상찬했다.
여기, 한 대의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세 명의 남녀가 있다. 그들의 예측할 길 없는 하룻밤 기묘한 여행에 동승하는 순간, 당신은 소설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플롯과 이야기의 마법사 이장욱이 펼치는 감각적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철학적 성찰과 영화적 현실이 빚어낸 입체화된 시간과 공간, “신(新)서사”의 탄생

대학 동창인 A의 부음을 듣고 K시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정’, ‘김’, ‘최’. 그들이 기억하는 A의 모습은 왜 모두 다른 것일까? 『천국보다 낯선』은 로드 무비의 모티프를 차용해 사건과 상황을 각각의 인물들의 시선으로 변주하고 반복하는 이장욱 특유의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비스듬히 어긋나 있는 지점의 메타 소설인 동시에, 사랑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사유와 빼어난 문체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열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천국보다 낯선』은 정, 김, 최의 시선이 1장부터 12장까지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장이 바뀔 때마다 매번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사건과 장면이 변주됨으로써 영화 「라쇼몽」처럼 서사에 이물감을 덧씌우며, 사람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다르게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며칠 전 A의 반지하 방을 나와서 그들이 모두 제각각 다시 A를 찾아간 밤의 일이나, 논산 분기점 3킬로미터 지점에서 목격한 교통사고에 관한 각각의 진술 등과 같이 김의 이야기는 앞서 정이 한 말이 빚어낸 상황 속에서 이해되고, 동시에 아직 말해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최가 할 이야기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내용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면서 이야기는 수축과 증식을 반복한다.
정에게 A는 아랍어나 희랍어처럼 “해독 불가능한 문자 같은 것”이라면, 김에게 A는 모든 면에서 아내인 정과 대비되는 여자로서 “여름의 팽창하는 대기” 같았고, 최에게 A는 “비어 있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자 “언제나 와전되는 중”인 소문 같은 것이다. A가 만든 영화 「천국보다 낯선」 역시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연쇄”인 동시에, “공포 영화의 관습을 따르지 않은 탓에 공포 영화인지조차 모호할 지경”인 호러로 읽히기까지 한다. 작품 속에서 마치 실체 없이 계속 미끄러지는 기표로 남아 있는 A는 과연 누구인가? A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 맞는가?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A를 모두 사랑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김, 최, 정,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등장하는 또 하나의 시선 ‘염’까지, 소설은 예측하기 어려운 시공의 반전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즈음, 독자들은 현실을 살짝 비튼 충격적인 결말에 매혹된 나머지, 이야기 전체를 다른 시선과 다른 원근법으로 읽으며, 이야기의 결말에서 또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기원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추천의 말

『천국보다 낯선』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린 공포 소설이며, 환멸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 주는 소설인 동시에, 소설 속에 동명의 영화를 품고 있는 메타 소설이다. 조금 낯선 무엇, 약간 비스듬히 어긋나 있는 무엇은 이장욱 소설 매력의 중핵을 이루어 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기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그의 소설을 ‘소설보다 낯선’ 무엇으로 만든다. 생을 순응하게 하고 굴복시키는 세상의 힘과, 소설의 프레임 바깥을 넘보는 익살스러운 등장인물들과, 그리고 근본적으로 불가지론의 위치를 차지하는 죽음과 그는 쉬지 않고 국지전을 벌여 왔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당신은 “천국보다 낯선” 희열을 맛보게 될 것이다.
―강지희(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 중에서

이 낯선 계절의 소설을 만약 비사실적이라거나 초현실적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은 다면적 세계의 모순과 혼돈을 창작의 동인과 작품의 구조로 전면화한 사실적 소설이다. 주체를 타자화하고 시간을 입체화하고 공간을 다층화함으로써 불현듯 열려진 다른 그라운드에서 다른 속도로 흘러 다니는 ‘사실들’의 타오르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제 “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어, 아직 길들지 않은 그 궤적들을 “생시”처럼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 소설의 신(新)서사가 이렇게 이미 발생했기 때문이다.
―백지은(문학평론가)

■ 본문 중에서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 각각의 인생은 각각의 방식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생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생의 끝 역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슬픔을 표하는 것, 그것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문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10~11쪽

불행한 일이지만,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사랑의 길이 아니다.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지만, 아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대개 이미 늦은 다음이지만.
나는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손끝이 떨렸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이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언젠가 내 사랑이었던 존재가 사멸하여 이제 이 세계의 다른 사물들…… 가령 나무나 구름 또는 돌멩이들과 구별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짙게 코팅된 차창 밖으로 눈송이 하나가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단 한 송이뿐으로, 몹시 외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외로 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가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이 검고 깊었다. 저 높은 곳에서 눈송이 하나를 떨어뜨린 밤하늘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죽음이란, 말하자면 저 높고 거대한 밤하늘과 같지 않은가. 우리의 인생이란 저 밤하늘에서 희미하게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에 불과한 건 아닌가…….
—29~30쪽

A는 내게 해독 불가능한 문자 같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랍어나 희랍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고, 배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문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아랍어의 곡선은 아름다웠다. 희랍어는 예술적으로 보였다. 그 언어들은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이상한 문자들은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자신의 세계, 자신의 의미들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었다.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계, 그게 그녀였다.
그렇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쉽게 끌리는 사람이다.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발음할 수 없는 외국의 문자들이 꽃처럼 피어올라 숲을 이루는 느낌을 나는 좋아했다. 나는 그 숲을 산책하고 그 숲에 누워 안식을 취하고 그 숲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숲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건 나의 숲일 수 없는 세계였다.
—83쪽

무언가를 사랑할 때 내가 어쩔 수 없이 택하는 방법은 그것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단지 가까이 있는 것…… 그것의 부침과는 관계없이…… 그것의 흥성이나 몰락과 무관하게…… 단지 가까이 있는 것…… 대상이 멀리 있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강렬해진다고? 그건 환각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향한 열정과 환멸을 견뎌 내는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대상 자체가 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나와 그것의 구분을 지우는 것. 경계를 없애는 것. 그러면 그것의 장점이나 단점 같은 걸 따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완성을 선언하거나 파산을 선고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환멸의 차가움도 염원의 뜨거움도 희미해져 버린다. 마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러한 것처럼.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그녀의 영화를 본 뒤에야 깨달았다. 차갑고 잔인한 호러의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88~89쪽

세계는 명료하다. 세계에는 모호함 따위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모호하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명료함이 부족하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비밀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명료한 세계와 모호한 인간 사이에 중간 지대 같은 것은 없다. 명료한 세계 속에서 모호한 인간들의 권력투쟁이 끝나지 않을 뿐이다. 모호한 의미를 규정하고 장악하려는 인간들 간의 싸움이다. 인간이 명료함의 일부가 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모호함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다. 모호함이 제로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순간이다. 인간이 세계 자체가 되었으니까. 나는 가끔 내가 그런 세계를 꿈꾸고 있다고 느낀다. 모든 것이 명료한 유토피아를.
터널이었다. 형광등들이 양쪽 벽에 붙어 있었다. 불빛은 먼 곳에서부터 좁아졌다. 터널이 휘는 곳에서 불빛은 점 하나로 모였다가, 곡선 주로를 벗어나면 다시 직선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터널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은 몇 미터일까. 그런 의문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검색하지 않았다. 터널에서는 기지국의 신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질문들은 인터넷이나 백과사전 같은 것으로는 검색할 수 없다. 답을 알아도 사라지지 않는 질문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소 기묘한 생각이 이어졌다. 방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의문은, 어쩌면 죽은 A의 의문이 아닐까? A가 하는 생각이 내게 떠오른 건 아닐까? 멍청한 생각이었다.
—115~116쪽

나는 서랍 속에 편지를 넣어 두고 열어 보지 않았다. 편지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거의 1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먼지가 없었다. 편지는 변색되지 않았다. 갓 배달된 봉투처럼 깨끗했다. 수신인란의 내 이름 역시 더 선명해져 있었다. 서랍 속은 시간이 정지해 있구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스스로 열어야 하는 세계. 그게 내 손에 쥐여 있었다. 나는 봉투를 열었다. 편지는 간단하고 소박했다. 그저 인사말이라고 해도 좋았다. 안녕, 이라고. 넌 좋은 아이라고. 이젠 책상 위의 금을 넘어와도 좋다고. 거기 내가 있었다는 건 잊어도 좋다고. 잘 지내라고. 그게 전부였다. 어째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어째서 그렇게 물이 쏟아지듯 사라져 버렸는
지는 적지 않았다.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164~165쪽

너, 변태냐?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가 덧붙였다.
그때도 살짝 맛이 갔던데. 너 말이야.
여자는 코웃음을 치다가…… 장난처럼 가벼운 욕을 던지다가…… 결국 병사의 청을 수락했다.
대낮의 작은 방에서, 환한 방에 형광등까지 켜 놓은 채, 병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여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이미지가 아닌 그것을 노려보았다. 열심히 노려보았다. 열심히 노려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세기의 마지막 시간이 저물고 있었다.
—169쪽

그 축제의 밤에 그녀가 나를 거절한 후, 나는 자주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도 전화를 걸었고 아침에도 전화를 걸었으며 밤에도 전화를 걸었다. 집과 강의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그녀가 학교에 오는 길목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그녀에게 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네가 듣는 모든 음악을 들었다고, 네가 읽은 모든 책을 읽었다고, 네가 걸어 다닌 곳을 걸어 다녔다고, 네가 바라보는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매일 고개를 든다고,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나는 온갖 미문을 떠올려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나는 너라는 물속에 잠겨 자라는 식물이라고, 너라는 계절을 떠가는 텅 빈 구름이라고, 너라는 감정의 끝에서 끝까지 뛰어갔다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강아지라고, 너의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를 섬세하게 핥고 싶은 어린 고양이라고…… 나는 단지 너의 그림자라든가 메아리 같은 것이라고…… 나는 너의 효과에 불과하다고…… 나는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침묵은 깊고 길었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침묵은 감옥 같았다.
그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렌트한 차를 끌고 밤늦게 나를 찾아온 것은 김이었다. 그는 기숙사 철문 앞에 나를 세워 놓고 말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버트 랭카스터와 데버러 커의 사랑을 아느냐고. 동해안에 도착해서 물보라가 부서지는 바닷물에 널 밀어 넣고 싶다고. 젖은 네 몸을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다고.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내게는 할 말이 없었다. 어째서 A의 애인인 김이 나에게 와서 동해안으로 가자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내 등에 차가운 기운을 전해 주던 철문의 감촉을 오래 기억한다. 그 감촉과 함께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김의 아내가 되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
—188~189쪽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뒤. 삶의 뒤. 존재의 뒤. 종말 따위는 오지 않는 이 세계에서 한 연약한 존재가 사라진 뒤. 그 뒤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 나는 짐짓 취한 목소리로, 중요한 클라이언트 하나가 호출을 하고 있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술자리로 좀 오라는데. 젠장, 접대가 업무인 직업이라니까. 나는 다소 거친 목소리로 뇌까렸다. 아내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비 내리는 거리에 서서, 아내를 태운 택시가 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하는 택시를 확인한 뒤, 나는 길을 건너 다른 택시를 잡았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볼 때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A가 정말 결행하려는 모양이구나. 겨우 돈 따위 때문에. 아니, 돈을 핑계로. 더 이상 견뎌 보려 하지 않는구나. 이 세계를.
막아야지. 살아야지. 나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타르콥스키 영화 속의 주인공과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촛불을 들고 온천장의 물을 몇 번이고 가로질러 가듯이, 삶과 죽음을 건너가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과대망상이다. 자신을 말소한다고 해서 세계가 구원되지는 않는다. 그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프로작을 쓰게 해야 한다. 우울증 치료제를 써야 한다. 대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A에게 몇 개의 상품을 추천한 것은 나였다. 주로 생명 쪽이었다. 그녀가 든 보험은 세 개였지만 서류상으로는 다섯 개였다. 그녀를 피보험인으로 하고 수익자를 나로 해서 가입한 보험이 두 개였기 때문이다. A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그녀가 정말 결행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 개의 서류를 다섯 개로 늘리기는 쉬웠다. 나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그 서류들을 처리했다.
—196~197쪽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염은 생각했다. 자신이 홈리스 노릇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염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 구름들이 이국의 하늘인 것처럼 낯설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들 사이로 맑은 별들이 반짝였다.
그때 다시 엉뚱한 생각이 염의 뇌리에 떠올랐다. A가…… 죽은 게 아닐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삶을 시작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뒤따라왔다. 그는 방금 떠오른 두 개의 문장을 순서대로 천천히 발음해 보았다.
A가…… 죽은 게 아닐지도 몰라. 그 애는 이제 겨우 삶을 시작한 게 아닐까.
생각은 입 밖으로 나와 목소리가 되었다. 목소리는 뜻을 만들고 뜻은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확신으로 변했다. 죽음 쪽에 남아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아닐까. A는 단지 영화의 프레임 밖으로 나간 게 아닐까.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닐까.
—247쪽

■ 줄거리

한 대의 자동차를 타고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세 명의 남녀 ‘정’, ‘김’, ‘최’. 그들은 같은 대학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한 시절을 함께했던 ‘A’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슬픔과 회한으로 가득해야 할 문상길은 어딘가 불길한 기류로 가득하다.
A를 모두 사랑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김, 최, 정은 서른세 살 무렵을 통과하고 있다. 인생의 변화는 곧잘 변절되고, 무언가에 영혼이 잠식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것을 뭐라 명명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어쩐지 패잔병이 된 것과 같은 씁쓸함을 느낀다.
약삭빠르게 일찌감치 세상과 타협한 듯 보이던 김은 이제 불법 주가조작에, 사설 도박장과 경마장에, 보험 사기까지 연루되어 있는 상태고, 정은 아무런 독창성도 없이 A가 쓴 문장들을 그대로 따라 쓰는 보잘것없는 소설가이며, 그나마 사회학을 공부한다는 순수한 명목으로 대학에 남아 있던 최 역시 시스템 바깥에서 이상을 좇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으로 집권당의 현직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되려는 찰나에 놓여 있다.
그들은 며칠 전 A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 시사회 때 모인 적이 있다. 그날 밤, A의 반지하 방을 나와서 제각각 다시 A를 찾아간 일을 회상하지만, 기억을 더듬는 방식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느 순간부터 내비게이션은 신호를 잡지 못하고, 아이콘은 도로가 아니라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은 공간일 뿐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라디오에서 보도된 교통사고가 몇 분 후에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고, 죽은 A로부터 그들 모두에게 각각 다른 문자메시지가 오기 시작한다.
정, 김, 최와 함께 A를 조문하러 가기로 한 ‘염’은 K시 공용 터미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친구들은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그가 식당에서 허기를 채우는 동안, 식당의 소형 텔레비전에서는 고속도로의 교통사고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A가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염의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염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데…….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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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2005년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작가상을 받으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고백의 제왕』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 『캐럴』 등이 있다. 문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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