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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d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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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박상순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4년 9월 10일

ISBN: 978-89-374-0726-0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36쪽

가격: 9,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121

분야 민음의 시 121


책소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5 우수문학도서 선정건조한 하드보일드 비가(悲歌)대상의 지시적 의미를 지우고 주체인 ‘나’의 아이덴티티까지도 함께 지워 가는 21세기적 ‘서정’의 쓸쓸하고도 황량한 내포

물컹물컹한 20세기형 서정시의 독자 말고 드라이하면서도 냉혹한, 쓸쓸하면서도 착한, 순결하면서도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문화 기호의 진지함과 상호텍스트성을 알고 있는 21세기형 새로운 독자가 필요하다는 것! 사랑의 상실과 냉혹성을 알고 있으나 그 냉혹성을 넘어선 따스함을 원하는 마니아들을 위한 사랑의 시다. -김승희(시인)


목차

빨리 걷다가수 김윤아가야금 연주로 키사스 키사스를 듣다가가을이 오면강원도는 싫어요그녀는 서른에서 스물아홉이 되고금빛기린꽃잎 R나에게 길이 있었다남태평양의 붉은 고래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두 번째 다리의 정복자들국화와 단둘이물 위로 굴러 가는 토마토물 위의 암스테르담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밤의 자전거 보관소벽에서 풀이 돋아요봄밤봄비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3년 뒤새로운 인생생의 시간, 사랑의 속도서쪽의 넓은 벽섬식탁 위의 일요일, 벽 속의 소리이주 오래된 숲에 대하여안나, 마가렛, 레나 : 두려움과 웃음의 소멸옛이야기오늘은 발이 시린, 가슴이 작고 어깨가 조금 넓은, 일주일에 한 번쯤은 목소리가 고운, 가을 공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한 굽 낮은 구두 속의 해파리울지 않는 사람의 눈의사 K와 함께이 가을의 한순간일주일에 세 번자유의 여신절망의 그림죽은 동물을 태운 잠수함처럼창밖에철근 한 묶음침묵의 뿌리카타르, 세계의 모든 열기 또는 300볼트용 커넥터칼을 든 미용사를 위한 멜로디택시텅 빈 도시가 내 방 안에 맨발로 서 있다토카타, 나의 토카타푸르른 사람 1푸르른 사람 2하늘에는 비행기 땅에는 섹스할머니의 물고기황혼에, 가야금 연주로 비발디의 곡을 듣다가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6월 28일, 나무 속의 검은 새Love AdagioTan – Tan – Tan피날레 Finale


편집자 리뷰

시집 『Love Adagio』에는 시인이 지난 8년 동안 계간지에 발표했던 시들 가운데 선별한 시, 제목만 같은 시, 한 연 혹은 한 행만 바뀐 시, 발표하지 않고 간직한 시, 새로 쓴 시, 그리고 오직 이 시집만을 위해 쓰인 시까지 다양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긴 시간을 건너온 시들을 시인은 그저 가나다순으로 배열했다. 일반적으로 시집은 시인이 몇 년에 걸쳐 쓴 시들을 모아 이런저런 구성으로 재배치하며, 이때 시의 배열은 시인의 시적 감수성은 물론 시인의 예술적 지향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가나다순이라면 이러한 모든 인위적 혹은 의식적 배열을 거부한다는 뜻이며, 동시에 ‘무의식적 전체’를 하나의 예술 세계로 성립시킨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은 어떠한 장치도 거부하는 시인의 자의식에 대한 의지이자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이다. 시인은 자신이 쓴 시들에 새로운 옷을 입혀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런 옷(장치)도 없이, 그냥 무대 위로 올려 보낸다. 시들은 스스로가 가진 배경을 지우고, 모든 연관성의 고리를 끊고, 그냥 차례대로 무대 위로 올라온다. 그런데 관람하는 우리들은 여기에서 분명 하나의 전체, 하나의 긴 노래 혹은 하나의 이야기를 본다―듣는다. 그리고 시인은 우리가 감지하는 어떤 예술적 형태에 제목을 붙여 준다. Love Adagio. 그러고 보니 시들은 틀림없이 연애시다. 그것도 매우 비극적이고 절망적으로 아름다운 노래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떠한 덧붙임도, 장치도 없이 순연한 무의식의 산물처럼 보이는 시들을 시인이 Love Adagio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또다시 의미론적인 추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적 화자와, 시의 등장인물들과, 시를 읽는 우리들과 유희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박상순 시의 본질, 그의 난해성을 일거에 와해시키고 그 안으로 곧장 들어가 시인의 내부와 만날 수 있는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저 하나의 책, 그 어떤 이름도 필요 없는 책 그 자체, 결국 모든 예술가들이 꿈꾸는 하나의 ‘완전한 책’이다.
복사한 나. 움직이는 나. 내게는 없는 나.
박상순의 시는 변신한다. 시의 내부에서, 시의 외부에서, 시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얼굴을 바꾼다. 그 어떤 존재의 규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한다. ‘박상순의 시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그렇지 않은 다른 것’이 된다. 그래서 박상순은 “리좀적 존재”(오형엽)다.
미니멀한 것으로 한 곡 들려줄까? 하지만 뒤틀 줄도 알아야 해. 내 비극의 컬러를 모르면 마라톤 경주를 관람할 수 없단다. 본능이라고 생각하진 마! 눈을 감으면 잘 들리니? 귀를 막으면 더 크게 들리지? 그 사람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빵공장, 마라나, 그런 시를 쓴 사람 있잖아. 사실은 내 시야. 새우 한 마리. 바다에서 잡혀온 새우 한 마리. ―「가수 김윤아」 부분
변신. 은신. 폭로. 자기 부정과 새로운 탄생을 욕망하기 혹은 말하기. 변형하고 전이하고 대치시키고 자리 바꾸기……. 박상순은 모든 예술적 방법을 동원해 끊임없이 ‘정체성’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어떤 규정이나 특징을 부여 받기를 거부한다.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정신적”이고 “즉물적”이며, “인상적”이고 “사실적”이다. “표현적”이고 “대면적(對面的)”이다. 그리고 이처럼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운동성이 바로 박상순 시의 핵심이다. 「남태평양의 붉은 고래」, 「두 번째 다리의 정복자」, 「봄비」, 「생의 시간, 사랑의 속도」, 「의사 K와 함께」, 「철근 한 묶음」, 「택시」, 「푸르른 사람 1」등 일련의 시들은 이러한 운동성을 매우 잘 구현하고 있다.이 시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끊임없이 되풀이해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구체적인 사건(혹은 경험한 사건 자체)은 사라지고, 말소리는 잦아들고, ‘말하는 자가 존재함’만이 큰 소리로 울린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자 한다. 결국 박상순의 시에서 감지되는 ‘이미지들의 폭발적인 분규’는 그걸 바라보는 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정교하게 연출된 ‘말의 무대’만을 남겨 둔 채, 시인의 존재를 지운다.
트라우마의 깊이
하지만 ‘읽는 자’들은 이 ‘무목적적인(그러므로 예술적인) 언어의 정교한 배열’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한다. 창조란 본질적으로 무목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해석한다. 파헤치고 의미를 발견해 낸다(혹은 발견했다고 믿는다.). 어떤 호기심 혹은 원초적 충동에 따라, 해석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박상순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고통스러운 풍경’이다. 가령 「들국화와 단둘이」라는 시를 보자. 제목을 보고 얼른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정취다. 가을 들판에 피어 있는 작고 귀여운 꽃송이들과 “단둘이”라는 단어가 주는 내밀함과 친근감이 결합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전통적인 서정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시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전혀 다르다. 시는 험하고 외진 산골을 지나가는 군인들의 행렬을 그리고 있다. 그저 싸우다 죽는 것이 그들의 소명인 병사들.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다. 그러니 어느 으슥한 숲 속에서 살해되어도 누구도 찾지 않으리라. 물론 시의 어디에도 구체적인 폭력의 현장은 없다. 기껏해야 누군가 “투덜거리”거나 “손가락으로 등을 찌르”거나 “소리 지르”는 정도다. 하지만 이 시를 되풀이해 읽다 보면 틀림없이 시의 뒤쪽에서 끔찍한 비명의 현장이 존재했을 것만 같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간 “아홉 명 또는 여덟 명의 병사”가 결국은 “일곱 송이 또는 여덟 송이 피어난/ 들국화”로 대치되면서는 공포감마저 일어난다. 박상순은 공포에 대해서 대단히 잘 말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는 그 어떤 잔혹한 ‘엽기’보다 더 공포스럽다. 그 까닭은 박상순의 그로테스크가 서정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동원되는 많은 시들은 기괴하고 살풍경한 느낌을 준다. 거칠고 과격한 언어도 서슴지 않고 사용된다. 그리고 그들은 시를 통해 폭력적 세계 질서를 고발한다. 그런데 박상순의 경우는 좀 다르다. 박상순 시에서 고통의 상황 속에 놓인 인물들은 대부분 “소년”, “아이”, “국민학생”, “일곱 살” 어린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생의 잔혹함을 얘기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가 너무나 천진한 목소리로 말한다. “할아버지. 올가을엔 타지마할에 가요. 앙코르 와트에 가요/ 불국사에 함께 가요. 할아버지”(「하늘에는 비행기 땅에는 섹스」)라고 조르던 작은 소년이 “할아버지. 타지마할에 갈 수 있을까요. 앙코르 와트에./ 불국사에 다시 갈 수 있나요. 할아버지/ 이런 것들을 다 들고도 갈 수 있나요. 그럴 수도 있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렇게 다 끝나버릴 수도 있나요.”라고 말하기까지, 소년이 겪고 살아남아야만 했던 고통의 빛깔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둡다.그리고 이 부드럽고 연약한 존재가 세계의 딱딱함과 차가움에 대해 순진하게 ‘보고(報告)’할 때, 그걸 듣고 있는 자들은 두려워진다. 박상순은 결코 격정적으로 비명 지르지 않는다. 아프다고 호소하거나 울지 않는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포’란 무시무시한 대상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다. 박상순의 시가 대단히 서정적이라는 점은 언뜻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 서정적이기 때문이 그것이 폭로하는 현실의 난폭함이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사랑의 인사
그렇다. 박상순의 시는 서정적이다. 물론 박상순은 모더니즘적인 시인이다. 그는 현대성을 추구하는 서정시를 쓴다. 그리고 이 상반되는 두 지향성은 박상순의 시에서 대단히 세련된 방식으로 결합되어 박상순만의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 사실 기존의 박상순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의 이미지 중심의 모더니즘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 까닭은 물론 시 자체가 가진 낯설음과 독특함이 압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이라는 인상이 강해서 다른 요소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그가 가진 서정성을 강력하게 부각시킴으로써 다채로운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거기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이 되고 싶은” 내가 있고(「가야금 연주로 키사스 키사스를 듣다가」), “연인 곁에서 길을 잃은” 나(「창밖에」)도 있다. 여인들이 나오고, 애인들이 나온다. “온몸이 부서질 듯 진저리를 치”는 소녀(「Tan-Tan-Tan」)가 나오고, “내 알을 낳아주는 물고기”(「할머니의 물고기」)도 나온다. “사로잡힌 별”(「일주일에 세 번」)이 나온다. 시집의 제목이 ‘Love Adagio’인 것은 필연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비극이다. 대단히 사랑스럽지만 분명한 비극이다. 까닭은 사랑의 대상이 늘 ‘나’를 떠나기 때문이다. “네가 떠날 때/ 바다는 그가 품었던 모든 물고기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네가 떠날 때/ 나는 주저앉아 돌을 먹고 모래를 삼키고/ Crisscross/ Crisscross”(「피날레 Finale」) 비탄은 우주적으로 확장되어 하늘과 땅과 태양과 바다를 집어 삼킨다. 그렇지만 남은 나는 스스로를 연민하는 대신 고독을 ‘선택’한다. “나의 인생은 물체, 너는 속도,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 우리들의 시간은 이별/ 내 생의 시간은 디지털한 고독”(「생의 시간, 사랑의 속도」)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혼자이기를 선택한 자의 고독은 ‘관계’로부터 경험되는 파토스적 상실감과는 다르다. 그러기에 시인의 ‘Love Adagio’는 “아직 덜 마른 짐승의 살이 마르는 소리”(「Love Adagio」)가 들리는 비가(悲歌)가 된다.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언어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 언어.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된 언어. 아이덴티티가 없는 언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상한 무대 위에서 말의 우연성을 따라 움직이는 허구의 언어들. …… 박상순의 시는 극적 장치이고, 언어는 진지하면서도 섬세한 배우들이다.” ―최승호(시인)
박상순의 시 세계는 언제나 완전한 예술적 형식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 각각의 단어들이 결합해서 이루어 낸 ‘유기적 전체’를 추구한다. 그는 소리와 의미를 동시에 가진 언어를 질료로 삼아 ‘예술적으로’ 놀이한다. 그리고 놀이하는 언어들 속으로 들어가 말들의 연극에 동참하는 순간, 박상순 시의 모든 난해성은 사라지고, 대신 자족적인 ‘미적 쾌감’을 경험하는 순간들만 존재하게 된다. 시를 가지고 놀고 시를 풀고 시를 큰 소리로 읽으면서,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 내용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오직 시에 흠뻑 빠져 들어 시적 화자와 즐겁게 혹은 비탄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 이번에 출간된 시집 『Love Adagio』는 시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 주면서도 보다 윤택하고 풍부한 질량감을 느낄 수 있는 시들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 책은 박상순의 시를 이미 읽고 나름대로의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든, 그의 시를 한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독자든 그 모두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서평 : Love Adagio—–동아일보 (2004.9.18)- 김승희 /시인, 서강대 국문과 교수
박상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러브 아다지오’라고? 마치 끔찍한 난해성의 기호들의 가장무도를 즐기는 시인 이상이 쇼팽의 ‘야상곡’ 같은 착한 제목으로 시집을 낸 것처럼 좀 낯설었다. 너무나 서정적이며 게다가 연시 풍의 제목인 까닭이다. 그러나 첫 시 ‘빨리 걷다’에서부터 서정적 주체란 그림자도 없다.
‘이제 나는 유리병, 동파이프, 고무 벌레, 붉은 벽돌, 거미줄, 안개, 비상구, 접시, 세탁소, 푸른 항구, 불난 집, 가방, 끈 떨어진 꾸러미, 자동차, 사라진 구름, 발, 발, 발, 밤, 밤, 밤.’
왜 발이 세 번 나오고 밤도 세 번 나올까? 서정적 음악성? 그저 시니피앙들의 유희? 이렇듯 그의 시적 주체는 서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서정적 대상은 어떤가?
‘아직 덜 마른 그의 몸이 마르는 소리/-그의 불행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떨어지는 소리//아직 덜 마른 짐승의 살이 마르는 소리/-아직 눅눅한 그의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떨어지는 소리’(표제 시 ‘Love Adagio’)처럼 그의 서정적 연가는 서정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물컹물컹한 직설의 울음과 무관하며 대상과의 서정적 합일, 충만한 수렴은 아예 욕망하지도 않고 그것을 ‘마르는 소리’로 번역해 낼 만큼 건조한 하드보일드 비가(悲歌)이다.
언젠가 나는 한번 그의 시를 프로이드나 자크 라캉과 더불어 읽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시 세계는 미메시스의 세계도 아니고 표현의 세계도 아니며 기호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시는 서정적 연시를 쓸 때조차도 일인칭 화자가 서정적 주체가 아니며 자아와 대상의 서정적 합일, 수렴을 꿈꾸지도 않으며 오히려 대상의 지시적 의미를 지우고 주체인 ‘나’의 아이덴티티까지도 함께 지워 가는 21세기적 ‘서정’의 쓸쓸하고도 황량한 내포를 연출한다.
그의 시에는 서정적 충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틈을 메울 수 없다는 그 쓸쓸한 불가능성에서 박상순의 시는 출발하기에 ‘러브 아다지오’는 연시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위반이며 역설이다.
21세기형 인간이란 ‘나’에게 초월적 본질 같은 건 없으며 세상은 하나의 기호이며 그 기호는 초월적 기의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와 대립에 의해서만 잠깐의 의미의 정박을 갖는다는 것을 수납한 별 볼일 없는, 쓸쓸한 황량한 주체인 까닭이다(시 ‘봄 비’ 중). 그 주체들이 벌이는 기호의 유희가 시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시편들을 연시로 읽기 위해서는 물컹물컹한 20세기형 서정시의 독자 말고 드라이하면서도 냉혹한, 쓸쓸하면서도 착한, 순결하면서도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문화 기호의 진지함과 상호텍스트성을 알고 있는 21세기형 새로운 독자가 필요하다는 것! 사랑의 상실과 냉혹성을 알고 있으나 그 냉혹성을 넘어선 따스함을 원하는 마니아들을 위한 사랑의 시다.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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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1996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자네트가 아픈 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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