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번역의 상호작용 속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성찰의 목소리
번역가로서의 시인과 시인으로서의 번역가 김재혁이
노래하는 언어와 세계에 대한 필패(必敗)의 사랑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며 두 권의 시집과 수십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김재혁의 세 번째 시집 『딴생각』이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총 4부, 67편의 시가 수록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아름답고 지적인 이미지로 따뜻한 서정의 세계를 구축해 왔던 기존의 방식과 달리 번역과 시 쓰기 자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몰두한다. 그중에서도 「책」, 「가을날의 생각」, 「그대 눈에 해가」, 「번역의 유토피아」 등은 번역과 시에 대한 시인의 통찰이 가장 잘 표현된 시편이다. 특히 「책」이 번역과 시 쓰기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동일한 성격의 정신노동임을 드러낸다면 「가을날의 생각」은 두 작업을 병행하며 시인이 마주하는 삶의 진실들을 자연에 빗대어 노래한다. 번역과 시의 상관성이 자연을 무대로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시정(詩情)은 50여 권의 독일어 서적을 번역한 김재혁 시인만의 독특한 시 세계. 매일같이 실패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아직 옮겨지지 않은 책과 미처 가시화되지 않은 생의 면면을 번역하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포기를 모르는 언어 탐구자의 진지하고도 살뜰한 내면의 풍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번역과 시, ‘책’을 둘러싼 동일한 작업
번역가의 임무와 시인의 임무는 나란히 포개어진다. 포개어질 뿐만 아니라 김재혁 시인에게 시와 번역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작업이기도 하다. 책이 감추고 있는 미지의 삶과 아직 옮겨 놓지 않은 글이 내지르는 아우성에 귀 기울이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시인들의 존재를 떠올려 보면 이 같은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구름보다 더 늙은
책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내 얼굴을 들이마시고 어루만진다,
내 마음을 제본하여 읽어 보라고 내민다.
책의 손가락이 내 속을 더듬으며
뒤틀린 내 영혼의 손목에 봉침을 놓으며 웃는다.
병원 복도에서 소리 지르는
반 귀머거리 노파,
귀먹은 책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생의 계절은 늘 그늘이었다고,
앞을 못 보는 책은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면
낡은 귀를 쫑긋 세운다,
책의 행간을 바람이 지난다,
책의 밭고랑에 시간이 흐르며
물결친다, 책에 해일이 일어
사랑이 묻히고 죽음도 묻히고
책에 눈이 내려 어둠이 진다.
-「책」
“귀먹은 책”이나 “앞을 못 보는 책”은 아직 번역하지 않은 텍스트, 번역 중 난항에 빠진 구절을 빗댄 것이며 결국 우리 삶에서 미지로 남겨진 그 모든 번역되지 않은 것에 대한 적절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번역이 “책의 행간”을 읽고 사전을 뒤적이는 작업에서 기본을 다진 후 “책의 밭고랑”을 땀내 나는 노동으로 구석구석 일궈 내 “책의 해일”을 온몸으로 대면하여 원작품을 번역 작품으로 되받아 내는 일이라면, 시는 바로 이 번역과 번역 과정, 번역이라는 소재 전반에서 탄력을 얻어 말과 시간의 깊이를 궁리하고 삶과 일상을 자연의 사건으로 형상화하는 독창적인 일에서 제 가치를 획득해 낸다.
■번역과 시의 상관성이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시정(詩情)
『딴생각』은 자연과 세계, 사물과 일상을 시적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는 기존의 방식처럼 서정시라는 탄탄하고 안전한 길을 걷는 대신 번역과 시의 상관성이 자연을 무대로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시정(詩情)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연은 예찬이나 경탄의 대상이 아니라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짜임을 바탕으로 번역가이자 시인인 시의 주체가 적극적으로 활보할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비유의 대상이다. 즉 김재혁 시인은 서정시의 문법에 시를 위임하는 대신 자연의 변화와 일상의 남루한 풍경, 개인적인 경험 전반을 번역과 시에서 착안한 언어의 모험을 통해 특이한 재현의 대상으로 전환하며 새로운 서정의 힘을 견인해 낸다. 따라서 책과 독서, 번역과 시 쓰기 전반은 자연과 일상의 변화와 그 변화가 만들어 낸 작은 사건으로 나타난다. 이때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찬사 등의 감상적 태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공물을 조직해 낼 지적인 언어의 운용이다.
내 언어는 구름처럼
녹지 못하고
아직 지상에 매여 있어
그대의 가슴을 떠나지 못한다
-「가을날의 생각」에서
이렇듯 김재혁의 시 세계에서 우주와 세계의 조물주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며, 자연은 오로지 언어가 부리는 부속물로 존재할 때 시에서 제 가치를 빛낼 뿐이다. 그는 광화문에서 “행이 흘러가다 풀을 스치는 것”을 본다고 말하는 시인, 과거의 왕을 떠올린 순간에서조차 “밀가루처럼 풀리는 시행들을 생각”(「광화문에서」)할 뿐이라고 말하는 언어 탐구자인 것이다. 「꽃, 비가」에서 우리는 언어의 모험과 번역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인이 그려 낸 생의 진경을 들을 수 있다.
비 오는 거리에 서 있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꽃은, 어느 봄날의 꽃이든
어두컴컴한 빈 방에 덩그마니 매달린 의자다,
의자엔 죽음이 걸터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비가를 부른다, 앞뒤로 일렁이며 삶의 비가를,
노래를 입안으로 흘려 넣으며, 그래 그렇게
흔들리며 달이 고개를 돌릴 때까지
잠시 이런저런 빛깔로 아픔을 노래해 보는 거다
노란 눈물 빨간 눈물 하얀 눈물
-「꽃, 비가」에서
■ 시와 번역, 완성될 수 없는 유토피아
김재혁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번역의 경험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의 시에서 목도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번역과 시의 실패다. 시나 번역의 실패를 매일같이 경험하는 자에게 실패하는 언어와 실패하는 시가 흘린 고통의 눈물은 패배를 모른다. 김재혁에게 시와 번역은 결국 언젠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한 길을 바라보며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운명이지만, 완성될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공동의 소실점을 향하기에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번역과 시는 그에게 끊임없는 실패의 경험을 제공할 뿐이지만 실패를 거듭하며 생의 다채로운 결들을 삶 속에 재현해 내는 것이 또한 번역과 시이기도 하다. 이 실패의 저 앞줄에 어쩌면 시가, 또 번역이, 아니 이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성찰의 목소리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목소리는 타자와 말, 언어와 번역이라는 연옥에 빠져 그곳을 한 바퀴 돌고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현실로 육박해 오는 목소리다.
누구의 유고인가.
패배의 들판으로 옛날들이 결어간다.
둥지에서 떨어진 해를 바라보는
저녁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또 다른 생이 궁금하기에.
-「가을」에서
自序
1부 시란,
저녁, 나무들
생의 벤치에서 -연극 「보이체크」를 보고
책
마이크 시험 중
소리
한낮의 서재
꽃, 비가
시란,
눈
낙엽에 떨어지는 저 햇살은
어느 날도 매일처럼
관심
삶은 모든 사물들의 무게보다 무겁다고
시의 입
벗에게
베르테르의 슬픔
봄
봄비, 낙서
2 단체사진
단체사진
관행
가로등 마음 읽기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사랑은
기억의 나방
양귀비
너머
오후
카프카의 「성」을 읽다가 문득,
어머니의 이마
가을날의 생각
초가
재채기
그대 눈에 해가
우물
추억
아버지의 풍경
인연
낙엽
3 딴생각
딴생각
숲
시
은행나무
산
번역의 유토피아
위안
손길
복도에 서면
시에게
길
비 오는 창가에서
새
굴곡
바람의 씨
4 동시대인
벚꽃과 프랑스 여인과 핸드폰과
연
함박눈
밥
비안개
사람은 누구나
바람꽃
민들레
동지
동시대인
숲의 노래
순수를 위하여
사랑의 노래
국수 먹는 꼴뚜기 집에서
광화문에서
가을
작품 해설 / 조재룡
번역과 시의 연옥으로 향하는 언어의 모험
번역가로서의 시인과 시인으로서의 번역가
언어와 세계에 대한 필패(必敗)의 사랑을 노래한 김재혁 세 번째 시집
김재혁의 시는 시끄럽거나 번거롭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다. 시인의 시각도 매우 안정적이고 균형 잡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적이거나 관조적인 시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생각하는 모습이 편편에 양각되고 음각된 이미지며 깊은 비유에 의해 생동감 있게 포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시에서 많이 빠져 있는 사색하는 모습을 보게 해 준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의 시는 색다르다. 우리가 사는 의미가 무엇인가, 사는 재미가 어데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덕목도 그의 시는 갖고 있다. -신경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