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절]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사진엽서를 통해 본 시선의 권력과 조선의 이미지

권혁희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5년 5월 25일 | ISBN 89-374-2546-7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75x230 · 288쪽 | 가격 20,000원

분야 논픽션

책소개

2005 <올해의 논픽션상> 大賞 수상작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자 했을까. 2005 <올해의 논픽션상> 대상 수상작인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 국가들과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생산해 대중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사진엽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해 온 과정의 결실로, 엽서들 안에 실린 사진들이 어떠한 권력을 재생산하고 유포했는가를 밝힌 글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무려 1500여 장에 달하는 사진엽서들을 모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다루는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는 자료들 300여 장을 추려 실었다. 텍스트의 깊이도 깊이이거니와 사진 자료들의 풍부함에서 저자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고, 게다가 그 사진들이 ‘시선의 권력’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은 또 하나의 충격이다.

편집자 리뷰

● 이 책은 문화 제국주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사진엽서에 대해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사진엽서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각 유물이라는 전제 아래 사진 자체가 아닌 촬영자의 시선에 담긴 권력을 탐구한 것이다. 서양 백인들의 시선은 야만적인 동양 유색인들이라는 ‘타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고, 이것이 문명과 야만, 서양과 동양, 백인과 유색인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재현되었다는 사실이 구체적이고도 흥미롭게 설명되고 있다. 오랜 시간 사진엽서를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의 체화나 깊이가 제대로 살아 있는 글이다. ‘총’보다 더 무서운 ‘카메라’의 문화적 폭력성을 풍부하고도 흥미로운 자료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김미현(이화여대 교수, 문학평론가)│심사평에서
■ 이 책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그 사진은 관아의 뜰에 끌려 나온 죄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들이 어떻게 감옥에서 나와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진이 어떤 경로로 사진엽서가 되어 상품으로 팔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누군가가 이들을 밖으로 끌어내 강제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이것이 수천 장의 엽서로 제작되어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러한 사진이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러한 결론 뒤에는 사진엽서가 그것이 생산된 당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생생히 반영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책은 사진엽서가 하나의 ‘문화적 유물(cultural artifacts)’라는 전제 아래 그 유물에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추적하고 있다. 엽서가 유물이라면 우리가 이 책에 실린 엽서들을 볼 때 그 사진 자체의 내용만을 보아서는 이 ‘유물’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이때 저자의 이러한 시도가 더욱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그러한 ‘재현(re-presentation)’의 구조가 제국주의 시대에 생산된 사진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식민지를 바라보던 제국의 시선은 우리 자신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하고 있는 이미지들에도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제국의 미장센, 문화 제국주의의 축소판 사진엽서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함포를 앞세우고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그러나 효율적인 무기는 총과 포만이 아니었다. 제국주의는 이들 국가의 지배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던, 시대가 공유한 이데올로기였다. 제국주의가 이렇게 문화로서 정착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인쇄 자본주의의 공헌이 컸다.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신문, 잡지, 서적 등 다양한 인쇄물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이러한 인쇄물들에는 식민지의 풍경과 풍속이 묘사되었고,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은 근대 문물의 그림이 실리기도 했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에게 식민지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을 불어넣었고, 동시에 근대 문명의 성취자로서의 자긍심과 우월감을 고취시켰다. 인쇄술의 발달이 국민과 국가, 제국과 식민지를 재현하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에 더해 사진이 발명되면서 문자보다 강력한 파급력을 지닌 시각 이미지들이 각종 인쇄물이 실려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사진은 근대 문명의 산물인 동시에 전파자이기도 했다. 근대적 재현 체계로서 사진은 과학이라는 시대정신과 합류해 계몽의 현신이 되었다. 카메라가 담은 풍경 중 제국 국민들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 것은 단연 식민지인들의 인종을 부각시킨 이미지들이었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서구 중심적 시선이 만들어낸 욕망의 구조에 따라 반복적으로 상품화되었다. 결국 카메라는 제국주의가 그 (문화적) 영토를 확장하는 데 총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진정 공포스러운 것’은 총이 아니라, ‘인종주의, 차별, 모멸감과 같은 비가시적인 폭력의 구조를 만들어’내 식민지의 모든 것을(심지어 학살 장면까지도) ‘저들만의 고상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폭력’, 즉 ‘카메라’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총으로 상징되는 군사력만큼이나 강력하게 제국주의의 정신을 지탱하는 과학적 도구였다. 카메라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에 형성되는 시선의 권력을 증명하는 서구 문명의 총아라 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 사진을 촬영하는 자는 총을 가진 자였으며 동시에 지배자이자 통치자였다.… 총이 서구 근대 문명을 표상하는 물리적인 폭력 기계였다면, 사진엽서와 같은 시각 이미지는 상품과 오락의 형태로 대중에 은밀히 스며들어 지배자적 시선을 내재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이미지들은 무엇보다 엽서의 형태로 만들어지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대중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값이 저렴하고 사용하기 간편한 엽서 자체의 효율성에 힘입어, ‘서구인들이 발견한’ 식민지인들의 이미지들이 사진엽서로 만들어져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 엽서들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위한 수단으로가 아니라 수집용으로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었으며, 심지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교환, 판매되는 문화까지 형성되었다. 제국주의가 서구의 시대정신으로서 절정에 다다른 19세기 말에 탄생한 시진엽서는 한 해에만 수십억 장이 발매되어 서구 문명의 장밋빛 미래를 재현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고 전파한 비서구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강화했다. 즉 사진엽서는 문화 제국주의의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선의 권력은 서구인들이 생산한 아프리카 등지의 사진엽서뿐 아니라, 대만, 조선, 남양(南洋) 군도 등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사진엽서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조선인의 이미지들이다.
■ 인류학적 시선과 대중적 시선
19세기 제국주의가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인류학을 꼽을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사전 조사를 도맡아 했고, 이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한 브레인이었다. 인류학자들은 타 인종의 신체와 풍속을 관찰하고 비교했으며, 그 자료를 토대로 그들의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와 비교했다. 초기 이들의 연구는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진화론과 우생학에 근거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이때 사진은 훌륭한 기록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마치 물건의 치수를 재듯 식민지인들의 두상이나 그 밖의 신체 치수를 측정하고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인체 측정을 통해 밝혀진 인종 간의 차이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할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그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타 문화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대중에게까지 스며들었다. 그들이 연구용으로 촬영한 사진들이 사진엽서와 같은 인쇄물들에 찍혀 팔려나갔고, 또한 역으로 이미 생산된 사진엽서가 인류학적 연구의 자료가 되기도 했으니, 당시의 인류학적 관점은 대중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 역시 식민지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인류학적 조사를 실시했고, 대표적인 예로 1911~1918년 조선 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조선인들을 촬영했던 도리이 류조가 있고, 또 1919년부터 20년간 조선의 민속을 연구했던 무라야마 지준이 있다. 류조는 전국 120개 지역에서 총 2,980면에 이르는 성인 남녀와 아이들의 정면, 측면, 뒷면, 반신을 촬영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인간을 사물화, 객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인물이 지닌 골상학적, 관상학적, 인종학적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무라야마의 경우에는 조선 총독부가 발행한 관광 팸플릿과 사진엽서의 이미지들을 조선의 민속 연구에 활용했다. ■ 일본인의 카메라에 갇힌 조선
조선 관련 사진엽서들은 190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었고, 또 그만큼 선풍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후반 사진엽서 시장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조선 관련 이미지도 사진엽서로 생산된 것이다. 이러한 엽서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조선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연출하고 조작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1900년 무렵 일본인이 발행한 사진엽서 중에는 조선인의 후면을 찍은 사진들이 있다. 인물 사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러한 사진이 어떻게 해서 찍히게 되었을까? 뒷모습만 재현된 이 아이들의 이미지는 두발과 복장 등 조선인의 특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재현되었을 것이다. 여자의 뒷모습에서는 땋은 머리와 댕기가, 남자의 이미지에서는 길게 늘어진 복건이나 복장이 눈에 띈다. 그 밖에 조선인 여성들이 외출할 때 썼던 쓰개치마의 사진이 많은 것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형태의 이미지들이 ‘조선 풍속’이라는 제목을 달고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 기념품으로 대량 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진을 이용한 엽서들은 서구인(또는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풍속을 알려주는 인류학적 정보로서 기능했다. 사진으로 재현된 이미지들이 사실의 증거로서 기능한 것이다. 여기서 각 엽서의 제목들은 ‘조선 풍속’이라는 이름 하에 생산자(일본인)들만의 자의적인 분류법에 따라 분류되면서 일련번호를 달게 되었다. 사진이 가진 기계적 기록성이 제목을 얻게 되면서 객관적 정보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진 속에 실린 인물들은 개인성을 완전히 잃고 한 인종 또는 한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다시 만들어졌다. 더욱이 이와 유사한 이미지들이 여행 산업의 부흥과 함께 관광 팸플릿이나 조선 안내 책자들에도 반복되어 실리면서 조선인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일본은 인물이나 풍속 사진 외에도 다양한 이미지들의 사진엽서를 만들어냄으로써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계몽의 사명을 자임했다. 이는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고 동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예들은 조선 통독부가 발행했던 시정(始政) 기념엽서나 박람회 사진엽서, 근대 도시로 변모한 경성의 사진엽서들에서 볼 수 있다. 시정 기념엽서는 주로 식민 지배 이전의 낙후한 조선과 지배 이후의 근대화된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들을 나란히 배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박람회 사진엽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박람회 엽서에서는 전시장에 조선인들을 세워놓고 실제로 생활하는 모습을 관람자들에게 보여주던 장면까지 볼 수 있다. 경성 사진엽서 역시 자동차와 전차가 놓인 시가지의 모습을 통해 근대화의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특이한 것은 그러한 사진들 옆에 망국의 한을 읊는 시가들이 실렸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생산한 사진엽서들은 단지 기록적인 다큐멘트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시선의 권력과 ‘재현의 정치’가 구현된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시선의 권력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위의 엽서와 같이 조선인들을 모델로 세우고 세트에서 촬영한 사진의 엽서들은 이 엽서들이 촬영자와 생산자의 의도에 따라 ‘연출’된 사진들임을 증명한다. 거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어느 정도 우연에 의해 피사체의 구도가 결정되었다면,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은 다름 아닌 소비하는 주체의 욕망에 의해 선택된 구도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 지게를 진 남자, 물동이를 인 여자, 아름답지만 가련한 기생
사진엽서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근대의 시선으로 본 전근대의 모습이자 지배자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적 이미지였다. 조선의 어는 곳을 가든, 카메라를 든 촬영자의 시선 안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넘쳐났으며, 이는 모두 다 촬영자와 제국의 국민들이 욕망하는 이미지들이었다. 그것은 쓰개치마를 쓴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은자의 나라’이기도 했고, 지게를 든 남자의 모습으로 재현된 ‘낙후된 비문명 국가’이기도 했다. 한 프랑스인 여행자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조선에 ‘얼마나 풍부한 민속학적 자산’이 널려 있는지를 두고 감탄했다. 그에게는 조선의 모든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관찰 대상이었으며, 그가 관찰한 대상들은 카메라에 담겨 여행기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스인들에게 조선을 소개하는 안내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정보는 조선의 실체가 아닌 왜곡되고 신비화된 형태의 것이었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는 그 어떤 이미지보다도 더 스테레오 타입화되어 대량으로 생산됐던 사진, 즉 지게를 진 남자와 물동이를 인 여자, 그리고 기생의 이미지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지게를 진 남성의 이미지는 다른 두 이미지와 함께 조선의 풍속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표상된다. 지게에 관한 묘사는 사진엽서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여행기나 관광 팸플릿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이다. 거리를 지나던 사진가는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얹고 있는 조선인을 멈추게 하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의 열악한 사회 경제적 상황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물동이를 인 여성의 모습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의 경우가 남성의 이미지와 다른 것은, 물동이를 머리에 얹고 있거나 빨래 등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에서 젖가슴이 드러난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여성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던 욕망의 소산이다. 이렇게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특히 기생을 찍은 사진엽서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나아가 청순하고 가련한 기생의 수동적이고 애처로운 이미지는 일본에 보호받아야 하는 식민지 조선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 사진엽서에 재현된 시선의 권력, 여전히 살아 있는
사진엽서는 사진의 복제를 통해 탄생한 소비 상품이자 당대가 ‘보고자’ 욕망했던 바가 개입된 문화적 산물이다. 이 책은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와 일본이 생산한 사진엽서를 통해, 당시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고자’욕망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수백 장의 자료와 함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당시 조선 풍속 엽서가 생산했던 이미지들이 여전히 한국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지 과거의 역사를 보여 주는 책으로 머물지 않고 현대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 권혁희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을 거쳐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다.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이라는 전시를 기획한 바 있고, 「식민지의 메트로폴리스」로 스포츠조선과 타임스페이스가 공동주최한 제5회 사진비평상(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앞으로 시각 이미지들을 통해 문화를 읽어 내는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목차

서문
제1부 사진엽서 탄생의 사회 문화적 배경1장  제국의 미장센2장  문화 제국주의의 축소판, 사진엽서3장  인류학적 시선과 사진적 재현의 결합4장  여행 산업의 상장과 시각적 재현5장  서구에서의 사진엽서의 기원과 성장6장  한국에서의 사진엽서의 기원과 성장
제2부 재현의 정치학으로 보는 사진엽서1장  앞모습과 뒷모습의 진실2장  국가주의와 기억의 정치학3장  박람회와 인종 전시관4장  근대의 총아, 경성5장  조선인은 어떻게 재현되는가?6장  \’조선 풍속\’ 엽서에 재현된 조선인의 이미지7장  가련한 식민지의 꽃, 기생8장  조선인 이미지의 생산과 복제
후기

작가 소개

권혁희

독자 리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