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완서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4년 8월 9일
ISBN: 978-89-374-5742-5
패키지: 양장 · 46판 128x188mm · 468쪽
가격: 21,000원
분야 한국 문학
1권
초판 작가의 말 5
1 전씨가의 사람들 11
2 동해랑의 낙조 104
3 묵은 것과 새로운 것 258
2권
4 풍운의 화촉 7
5 어머니의 아들 255
6 풍진세상 371
3권
7 적선정 나으리 댁 사람들 7
8 아들딸의 시대 162
9 인삼장의 연회 297
종장 429
“내가 만들어 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박완서
1990년 초판을 출간한 박완서 작가의 장편소설 『미망』(전 3권)이 2024년 민음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미망』은 총 3권으로 이루어진 흔치 않은 대작으로,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 이후 분단에 이르기까지 개성의 한 중인 출신 상인 전처만 집안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미망』은 박완서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1988년 5월에 남편을 잃은 박완서는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88년 8월에 아들마저 잃었다.”(장영은)), 작가로서 자신에게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던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에 대하여 쓴 이야기로, 삶의 고통과 창작의 고통이 범람하는 시간을 통과해 끝내 써낸 극복의 작품이다. 이 소설을 두고 박완서 작가는 생전 “내 작품 중 혹시 오십 년이나 백 년 후에도 읽힐 게 있다면 『미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산문집 『나를 닮은 목소리로』, 문학동네)라고 썼다. 그리고 오늘날 『미망』을 다시 읽은 독자들은 박완서 작가의 저 기대 어린 문장에 긍정할 것이다.
소설을 재해석한 표지, 『미망』의 새로운 얼굴과
『미망』을 위한 가이드북(『미망』 집필 당시 박완서 작가 육필 구상 노트 수록)
민음사 판 『미망』의 새로운 점이 많지만, 첫 번째로 이 소설의 인상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잊히지 않도록’ 해 줄 표지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2, 3권에 각각 쓰인 이진주 작가의 그림에서 흰 손이 저마다 붙들고 있는 아스라한 것들은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이 시대로부터 박해받고 방해받아도 끝끝내 붙들고자 했던 어떤 것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두 번째로 새로운 점은 본문 편집과 이 과정에서 추가한 주석이다. 1990년 출간된 초판을 토대로 세계사 판에서 개정된 방언과 입말 등을 통일하였고, 소설에 쓰인 한자어와 일본어, 숙어 표현 등에서 현대의 독자들이 잘 알 수 없거나 쓰지 않는 고어(古語)에 대하여 박완서 작가의 맏딸이자 저작권자인 호원숙 작가와 편집부가 상의하여 그 의미를 풀어 두었다.
마지막으로 『미망』 가이드북이 있다. 『『미망』 깊이 읽기를 위해 놓인 다섯 편의 통로』라고 이름 붙인 이 가이드북에는 소설 읽기를 다각도에서 돕는 장영은, 한경희, 김영미 연구자의 글과 『미망』의 주요 공간인 개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 박완서 작가의 산문, 『미망』을 다시 펴내며 부치는 호원숙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또한, 호원숙 작가가 오래도록 소중히 보관한 『미망』 집필 당시 박완서 작가의 육필 구상 노트가 사진으로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에 이르기까지
박완서가 채집하고 체화한 한반도의 이야기
『미망』은 박완서 작가의 소망이기도 했다. 초판 작가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 개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이렇게 쓴다. “내가 만들어 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소설에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커다란 애정을 보여 주는 개성 사람의 특질과 그 고장만의 상업과 사업가들의 방식, 특히 개성 지방의 물과 흙으로 키워 낸 인삼 농사에 대한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렇듯 『미망』은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되살리는 동시에 한 집안의 일대기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 소설에는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 그 이전의 고려 시절부터 맥을 이어 온 역사와 경제, 그리고 구시대의 가족과 그로부터 뻗어 나가 변해 가는 아들딸들의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큰 줄기를 관통해 가는 와중에 박완서 작가 특유의 여성주의적 관점에 더해 인물에 대한 냉철하고 가식 없는 평가, 욕망에 대한 가차 없는 판단이 빛을 발하는 부분들이 넘쳐난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집필했음에도, 『미망』 속 박완서의 문장에는 결연하고 전진하는 듯한 힘이 서려 있다.
시대의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꼈던
잎새 같은 사람들이 남긴 잊을 수 없는 눈빛
『미망』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분제가 들썩이던 시절 비범한 상업 감각으로 인삼 농사와 장사를 통해 집안의 부를 축적한 전처만 영감과, 그가 유난히 애틋하게 아끼는 손녀 태임, 그리고 태임의 남편이 되는 쇠락한 양반 가문 출신 종상, 태임의 어머니가 친정의 하인과 간음하여 낳은 태임의 이부 동생 태남, 이후 시간이 흘러 태임과 종상이 결혼하여 낳은 딸 여란으로, 이외에도 이 가문을 중심으로 4대에 걸친 인물들이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욕망을 찾아 헤매며, 그 와중에 서로 반목하고 연민하거나 경쟁하고 동지가 된다.
소설의 제목 ‘미망(未忘)’의 뜻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종종 제목의 동음이의어인 ‘미망(迷妄)’, 즉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가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물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시기에 닥쳐오는 혼란과 변화를 구시대(조선)보다 자유롭게 느끼며 폭발하는 개인적 욕망을 마주하면서도, 나라의 흥망 앞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같은 ‘떳떳한 것’에 대해 거듭 고민한다는 점에서 그 단어는 운명 앞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나타낸다. 작가가 끝까지 밀고 나간 이 세밀하면서도 우직한 소설을 그때보다 먼 훗날의, 지금의 독자들이 함께 체험하기를 권한다.
■본문에서
좋은 날씨를 풍파 없이 화락한 금슬로 비유하고 바라는 것처럼 흔하고 듣기 좋은 덕담도 없었다. 이제부터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술과 입심 좋은 덕담이 넘칠 차례였다.
홀로 승재만이 고약한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신양명에 대한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보다 훨씬 못할지 모른다는, 여지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의구심이 그것이었다. 그건 도저히 위로받을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같은 처지로 알고 동고동락하던 종상이가 하룻밤 새의 개성 부자 노릇을 하는 걸 보고 느낀 배반감과 열등감에는 그렇게도 신효한 치료제가 돼 주던 출세에의 집념이 이렇게 보잘것없어질 줄이야.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비하면 그건 구질구질하고 징그러운 욕심에 불과했다.
-2권, 137쪽
떡을 따라 우루루 안으로 들어온 여자들은 어른, 아이, 상전, 드난꾼 가릴 것 없이 목판을 하나씩 차지하고 둘러앉아 조랑이떡을 만들었다. 대개는 어른들이 손에 기름을 발라 가며 손가락 굵기로 가늘고 길게 밀어 놓으면 계집애들은 그걸 가져다가 날이 무딘 나무칼로 허리를 잘룩하게 눌러 주면서 잘라 내면 꼭 누에고치 모양의 조랑이떡이 되었다.
가래떡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대신 나중에 썰 필요가 없이 그대로 떡국을 끓일 수 있는 송도 지방 고유의 떡 만들기였다. 손은 많이 가지만 특별한 솜씨를 요하지 않아 어른 아이가 함께 어우러져 하면서 구수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조랑떡 만드는 재미였다.
-2권, 4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