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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첨부파일


서지 정보

이승우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2년 8월 29일

ISBN: 978-89-374-8576-3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5x205 · 368쪽

가격: 13,000원

분야 한국 문학, 한국문학 단행본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10월 12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10월 12일 | ISBN 978-89-374-8586-2 | 가격 9,100원


책소개

★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작가

한국 소설에 역사적 넓이와 형이상학적 깊이를 더해 온 이승우 문학의 새로운 도전

“탈역사적 추상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 속의 형이상학을 탐구”하며 “우리 문학으로서는 드물게 형이상학적 탐구의 길을 걸어온 작가”(문학평론가 박철화)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가 출간되었다.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 이승우가 2011년 봄부터 2012년 봄까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미적 추구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랑과 죄가 얽히며 작용하는 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전개되며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겹쳐진 다층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지상의 노래』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승우가 십수 년 전부터 구상해 온 모티프를 가지고, 인간 존재와 내면세계에 대한 다층적 사유와 철학으로 욕망과 죄의식의 근원을 파헤친 또 하나의 문제작이다. 천산 수도원 72개의 지하 방에서 발견된 엄청난 분량의 벽서. 사치스러울 만큼 장식적 서체로 필사된 『켈스의 책』에 비견될 만한 화려한 장식과 신비로운 그림들. 천산 벽서에 숨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깊이 파헤칠수록 역사와 사건은 미궁으로만 빠져드는데…….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개인들의 굴절된 욕망과 왜곡된 역사의 정치권력, 그리고 비극의 희생양이 마침내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 투병 끝에 죽은 형이 남긴 미완성 유고, 천산 수도원의 비밀은 무엇인가?―개인의 삶에 끼어들어 작동하는 욕망과 정치, 초월이라는 기제들

『지상의 노래』에는 다섯 가지의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있다. 형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수도원을 답사하고 벽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이야기. 그 책을 읽고 천산 수도원의 벽서에 관한 글을 쓴 차동연의 이야기. 차동연이 쓴 글을 읽고 차동연에게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 ‘장’의 이야기. 장의 이야기에 나오는 군사정권의 핵심 한정효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사촌 누나 연희를 사랑한 ‘후’의 이야기. 그리고 그 중심에 천산 수도원이 있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여행 작가인 강영호와 동생 강상호다. 강상호는 형의 투병을 외면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형의 원고를 정리하여 유고집을 만든다. 교회사 전공자인 차동연의 관심을 끈 것은 천산 수도원의 3평 남짓한 수십 개의 지하 방 벽에 쓰인 성경 구절들. 그는 수도원의 폐허를 발굴하고 그곳 공동체의 성격을 조사하는 데 착수한다. 장은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 절반을 내쫓은 다음, 군사정권의 독재자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한정효를 그곳에 유폐하고 수도원 길목에 초소를 세워 감시한 인물이다. 후는 연희를 겁탈하고 버린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천산 수도원으로 도피하였다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천산 수도원을 찾는다. 그러나 뜻밖에도, 왜곡된 정치권력이 불러일으킨 비극의 현장이 후를 기다리고 있다. 구원과 초월, 욕망과 죄의식 등 신성과 세속이 뒤엉키며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졌던 천산 수도원의 거대한 실체를 목도하게 된 차동연. 그는 이제 엄청난 고민에 휩싸인다.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가. 역사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 죄의식에 사로잡혀 유업을 이어 가는 자

『지상의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죽은 자가 유업을 남기고 살아 있는 자가 이를 마무리하는 장면을 소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산 수도원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강영호와 이를 마무리하여 유고집에 실은 강상호. 역사의 추문을 마음속에 묻어 둔 채 길고 긴 세월을 보내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생을 마감한 장과 그의 고백을 듣고 내용을 옮겨 적은 차동연. 그리고 죽어 가던 한정효가 최후까지 하던 일을 대신 마무리하고 숨을 거둔 후. 주요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관계 속에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 구조는 소설 전체를 떠받드는 핵심 원리라고도 볼 수 있다.

■ 새로운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다

『지상의 노래』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후의 이야기다. 소설은 후의 이야기와 함께 강상호, 차동연, 장, 한정효의 이야기들을 차례로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 덩어리들은 대위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8장에서는 차동연과 후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각각의 절을 끝맺는 몇 개의 문장들과 차동연과 후가 천산 수도원을 찾아가는 장면, 그리고 두 사람이 수도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 목격하게 되는 장면도 매우 유사하다.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30년 전 후가 했던 것을 지금 차동연이 하고, 30년 전 후가 보았던 것을 지금 차동연이 보는 형식이다. 문학평론가 정영훈은 후의 이야기를 차동연이 쓴 소설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신학자 차동연은 천산 수도원의 실체와 정황을 밝힐 수 없었으나, 딜레마에 빠진 역사학자 차동연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소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후의 이야기는 차동연이 신문 기사를 통해 미처 할 수 없었던 이야기, 그의 욕망을 충족할 수 없었던 것들을 대리 보충해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 역사의 굴곡 속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과 개인적 관계 속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이 만나고, 둘이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깊은 죄의식, 역사의 추문, 자신들의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수도원 공동체의 정결한 신앙과 함께 이 이야기는 역사보다 보편적이고 신문 기사보다 풍성해진다. 그것은 차동연과 작가 이승우가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체제의 비극이 야기한 72개의 지하 방은 카타콤인가, 아니면 ‘쉬는 곳’을 뜻하는 체메테리움(Coemeterium)인가. 결국 그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소설의 중심은 비어 있고, 이 빈 곳을 ‘후’의 이야기가 채운다. 드러난 것의 빈틈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빈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후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시이다. 그 이야기는 누군가(who)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누구나(whoever) 쓸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러난 것에서 빈틈을 발견한 자, 이 빈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으로 충만한 자,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펜을 들어 쓰는 자, 그가 작가다. 우리가 경험한 삶으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욕망을 가진 자,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어떤 보편적인 차원에 놓고 이리저리 굴려 보는 자, 그가 작가다. ‘차동연’의 내면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애초에 그가 품었던 것은 신학자로서의 욕망이었고, 여기에 역사학자로서의 욕망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둘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어쩐지 이는 작가 이승우가 걸어온 길과도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가장 나중에 온 것이라는 사실은, 작가로서의 이승우의 자부심을 보여 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정영훈(문학평론가·경상대 국문과 교수)

■ 본문 중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믿음만큼 중요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대개는 믿음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모든 경우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거꾸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움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러내려고 한 것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 작업이 믿음만 아니라 미적 감각 또한 고양시키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한 작업이 아름다움만 아니라 믿음 또한 고양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도드라지는 일도 일어난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둘 모두 근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라는 것.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숭배를 위해 즐기고 즐기기 위해 숭배할 수 있다는 것. 『켈스의 책』과 천산의 벽서를 탄생시킨 것은 믿음만도 아니고 아름다움만도 아니라는 것.—26~27쪽

성인이 된 후 후는 오랫동안 라면을 먹지 못했다. 라면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자리를 피해야 했다. 라면은 그의 내부에서 털어 낼 수 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료로 작용했다. 자기가 라면에 환장하지 않았다면, 박 중위가 주는 라면을 받아먹지 않았다면, 아예 라면 맛을 몰랐다면 연희 누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관련은 서울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과 뉴욕을 덮친 태풍 사이의 관련만큼 비정형적이고 무의식적이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태풍은 일어날 것이다. 혹은 나비가 수만 번 날갯짓을 해도 태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태풍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현상들이 태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풍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결과가 무작위로 원인들을 소환하는 이 시스템은 심리학적 요인에 의해 지원받고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인간 심리의 무규칙성과 돌발성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과 인과적으로 관련지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어떤 일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죄의식을 덧씌우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40~41쪽

비가 갠 아침에 대문 역할을 하는 통나무 기둥에 기대 잠든 후를 발견한 사람은 헤브론 성의 한 형제였다. 헤브론 성에서는 모두 형제로 불리었다. 예외는 없었다. 나중에 후가 그 사실을 궁금해했을 때 한 형제는, 모든 개미들은 개미로 불리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개미들에게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모든 개미들을 그냥 개미라고만 부른다. 사람들의 차별 없는 호명 속에서 개미들은 평등하다고 형제는 설명했다. 신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차별 없이 평등하고 차별 없이 하찮은 존재다. 개인마다 개인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특성은 신의 시선으로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닌 것을 내세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이 모든 형제들을 형제로 호칭하는 이유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하찮은 존재이고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 서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생기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이 세상의 욕망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라고 형제는 설명했다.—93쪽

군복을 입고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군복을 벗은 후에도 한정효는 장군의 충실한 그림자였다. 그는 그림자였으므로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장군을 환한 빛 가운데 드러나게 했다. 그것이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그의 일이었다. 실체가 빛날수록 그림자는 더 어두워졌고, 그림자가 어두워질수록 실체는 더 빛났다. 그림자를 어두워지게 하기 위해 실체가 더 빛을 내지는 않았지만, 실체를 빛나게 하기 위해 그림자는 더 어두워져야 했다. 오래전에 한 신비주의자는 절대자를 한없이 높이고 자기를 한없이 낮추기 위해 그림자를 비유로 사용했다. “당신의 존재 앞에서 나는 감히 존재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환상이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시는 경우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지우고 보이지 않게 하면서 오직 장군만 높아지고 빛나고 위대해지도록 힘썼다는 점에서 그 역시 신비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치권의 신비주의자들은, 높고 빛나고 위대한 절대 권력자의 그림자로 자처함으로써 그 영광의 휘장을 같이 두르기도 한다.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에게 이런 욕망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정치적 신비주의자들은 훨씬 현실적이고 노골적이다. 권력자가 높고 빛나고 위대해질수록 그들이 두르게 될 휘장 또한 더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권력자를 더 높고 더 빛나고 더 위대해지게 떠받든다. 그들을 위해서도 권력자는 더 높고 더 빛나고 더 위대해져야 한다. 그 사실을 의식했든 안 했든, 장군이 높아짐에 따라, 그만큼은 아니라도, 이 신비주의자 역시 덩달아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164~165쪽

박 중위는 그녀를 욕보이고 나서 화대를 주고 샀다고 말함으로써 그녀를 창녀 취급했다. 박 중위가 주는 화대를 받은 사람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녀의 삼촌이었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녀의 삼촌은 박 중위가 주는 화대를 받음으로써 그녀를 창녀 취급했다. 그녀를 오래 괴롭힌 악몽 속에서 두 사람은 구별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취했지만 취했기 때문에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녀는 취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까지 하고 말았다. “어젯밤에는, 심지어, 네가, 네 가면을 쓴 남자가 내 몸 위로 올라와서 내 몸을 누르고, 가만 있으라고 위협하며 내 몸을 열었는데, 그런데 그 목소리가 삼촌 같기도 하고, 그 군인 같기도 하고……. 나는 도저히 내 동생 후로 너를 볼 수가 없다. 너는 희미해져 가던 악몽 속의 그 남자들을 다시 불러냈다. 그러니까 너는 너무 일찍 왔다. 모르지, 언제가 적당한 시간인지, 언제가 괜찮은 시간인지. 모르지, 아무리 늦게 와도 너무 일찍 왔다고 느낄지. 내 아버지 같은 삼촌의 아들인 너는…… 왜 온 거니?”  연희는 술이 깬 다음 날 아침, 자기가 취한 상태에서 뱉어 낸 말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굳이 후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말을, 단지 자기가 괴롭다는 이유로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누나답지 못하게 경솔했다고 자책하며 자기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그 차진 마찰음이 지난밤 후가 했던 말을 생생하게 불러냈다. “땅이 마을을 삼켰어요. 집이 없어졌어요. 아버지는 죽었어요. 어머니도.” 언제 그 말을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후가 언제 그 말을 했을까. 아마 그녀가 두서없이 감정을 토로하다가 그만 걷잡을 길 없이 헝클어져 탁자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후는 왜 그 말을 했을까. 이미 죽었으므로, 죽은 사람에게 시달리지 말라는 뜻으로 했을 수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지난밤에는 그 말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젯밤에는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가. 들은 기억도 없는 말이 뒤늦게 갑자기 엄청난 무게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녀는 둔기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술기운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저주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고통이 어떤 마력으로 그런 재앙을 불러왔을 수 있다는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죄책감과 유사한 감정을 불러왔다.—273~275쪽

젊은 교회사 강사 차동연이 이끄는 천산 공동체 발굴 팀은 여러 날에 걸쳐 수도원 건물 지하 방을 조사했다. 복도를 따라 양쪽에 만들어진 방은 모두 일흔두 개였다. 모양과 크기는 일정했다. 한쪽 면이 2.5미터, 다른 쪽 면이 3.9미터 내외로 세 평 정도였다. 방에는 벽면의 글씨 외에 어떤 장식도 없었다. 이미 소개된 대로 성경을 옮겨 적은 글씨들은 반듯하고 꼼꼼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쓴 표시가 또렷했다. 대개 먹을 썼지만 군데군데 채색이 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야생 식물에서 채취한 천연 염료를 이용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크기와 색깔이 적절히 섞여 조화를 이룬 글씨들은 거리를 두고 보면 미술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흔두 개의 방에 적힌 글들의 필적을 분석한 발굴 팀은 잠정적으로 한 사람의 필적만은 아니라고,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필사에 참여했을 거라고 추정했다.—332쪽

이번에 『켈스의 책』 대신 그가 인용한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신자들의 지하 무덤인 카타콤이었다. 미로와 같은 지하 통로, 통로 양옆의 묘혈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상징들을 형상화한 벽화들(물고기 배 속의 요나, 세례 받는 예수, 오병이어, 비둘기, 어깨에 양을 얹은 목자 같은)과 천국에서의 안식을 염원하는 기원문들로 채워진 카타콤 내부를 천산 공동체의 지하 공간과 비교하고 그 유사점을 언급했다. 그는 천산 공동체 벽서의 제작 동기가 카타콤 벽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이 세상에 대한 강한 부정과 곧 맞이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놀라울 만큼 강렬한 소망. 그들은 순수하고 철저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들이 무덤을 잠시 쉬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불렀던, ‘죽은 자들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네크로폴리(Necropoli)’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있었다. 차동연은 체메테리움이라는 단어를 소개하면서, 그들은 육체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니며, 카타콤에 들어와 누움으로써 비로소 참된 쉼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점은 천산 공동체의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증언했다.—345쪽


목차

■ 이 책의 차례
1장 천산 벽서   2장 사랑, 또는 죄   3장 압살롬   4장 도피성, 혹은 감옥5장 역사, 어쩌면 사소한6장 카타콤7장 순례8장 체메테리움
작가의 말    작품 해설    욕망의 변증법, 소설을 읽는 세 가지 방법_ 정영훈(문학평론가·경상대 국문과 교수)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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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195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심인광고』, 『오래된 일기』와 장편소설 『생의 이면』, 『에리직톤의 초상』,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가시나무 그늘』, 『그곳이 어디든』, 『식물들의 사생활』, 『한낮의 시선』 등과 소설선집 『검은 나무』 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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