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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5


첨부파일


서지 정보

권지예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2년 5월 18일

ISBN: 978-89-374-8381-3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5x205 · 212쪽

가격: 10,000원

분야 한국문학 단행본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6월 30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6월 30일 | ISBN 978-89-374-8482-7 | 가격 7,000원


책소개

한국문학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캐릭터, 아마조네스의 탄생!        최첨단 자본주의사회, 그 욕망의 정글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게임             이제 7인 7색 다채로운 유혹의 기술이 숨 막히게 전개된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 권지예의 네 번째 장편소설 『유혹』(전5권)이 완간되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 권지예는, 한국문학에서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확고한 사회적 지위와 기반 아래,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돼 있지 않은 주인공 ‘오유미’는 과감하고 도발적인 37세의 이혼녀다. 남성들을 선택하고 또한 정신적․육체적으로 우위에 있는 오유미는 성을 그 자체로 즐기며,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한 매우 독립적인 여성이다.
  『유혹』은 오유미의 사랑과 야망, 복수가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그려지며 그녀의 남성 편력기가 소설 전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최고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 권지예를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 이 작품은 박진감과 흡인력 넘치는 서사, 속도감 있는 전개, 풍부한 상징과 은유, 매혹과 정염의 폭발적 이미지 등으로 독자들을 거침없이 끌어들인다. 또한 『유혹』 1부가 「섹스 앤 더 시티」를 연상시킨다면, 2부는 주인공 오유미의 존재와 정체성 탐색,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 등이 일견 「맘마 미아」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소설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그 순간부터, 독자들은 소설 『유혹』의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유혹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목차

5권
가면무도회 
도약  
마지막 눈물    
뻐꾸기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  
비밀의 기원  
 
에필로그 

책을 마치며


편집자 리뷰

■ 파격적이고도 경쾌한 우리 시대의 성과 사랑, 그 욕망의 지형도
—새로운 칙릿 시대의 포문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

  『유혹』은 유혹하지 않으면 유혹당하는 21세기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성과 사랑을 통해 우리 사회 욕망의 지형도를 탐구하는 이야기다.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본능으로, 욕망하는 주체로, 또 권력과 황금을 추구하는 사회적 인간의 전략으로 다양한 유혹의 방법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작가 권지예는 이 소설에서 유혹의 칼날이 난무하는 21세기 동물의 왕국을 보여 준 셈이다.
  오유미․윤동진․황인규․박용준․고수익․유지완․강애리 7인 7색 ‘유혹의 기술자’들은 21세기 욕망의 정글에서 유혹의 기술을 구사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로, 『유혹』은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바이벌 게임의 강력한 무기인 유혹의 기술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그려 낸다. 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예술경영 석사학위를 받은 재원인 오유미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에게 무지개 같은 연애는 이상적이다. 요일별로 색다른 7인 7색의 섹스. 남자들은 힘들어도 여자들의 몸은 그게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현대 여성이라면, 일과 사랑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책상다리처럼 안정감 있는 넷도 괜찮다. 아니, 옛날 무쇠솥의 다리처럼 셋까지도 나쁘지 않다. 유미는 늘 최소한 다리 셋은 고수하고 있다.”(1권 24~25쪽) 또 이렇게도 말한다. “집착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강력한 접착제다. 유미가 그렇게 쿨할 수 있는 것은 자동차의 네 바퀴처럼 사륜 체제의 연애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다. 전륜구동이냐, 후륜구동이냐. 당연히 눈길에서도 안전한 사륜구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바퀴 중에서 하나라도 펑크가 나면 언제든 갈아 버릴 수 있는 스페어타이어도 제대로 장착했다.”(1권 190~191쪽)
  그리고 YB그룹의 후계자이며 독특한 성적 취향의 소유자인 윤동진을 사이에 두고 오유미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윤동진의 약혼녀 강애리. 오유미와 오랜 연인 사이인 소믈리에 황인규와 그의 아내이자 오유미의 20년 지기인 유지완. 유지완의 애인인 동시에 오유미를 흠모하는 박용준. 오유미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정체불명의 매력남 고수익. 일곱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끝없이 질주해 나간다.  
  또한 작가 권지예는 소설 『유혹』에서 20~30대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룬 기존 칙릿 소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칙릿을 선보이고 있다. 때로는 팜 파탈로, 때로는 아마조네스로 묘사되는, 숨기고 싶은 치명적 비밀의 소유자이기도 한 오유미는 성공과 몰락을 반복한다. 특히 2부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욕망과 존재의 근원을 풀어 나가며, 이유진 살인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등 반전에 반전이 끊임없이 거듭되고 있다. 다분히 낭만 지향적인 사랑놀이에 여념 없는 칙릿의 주인공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여성의 성적 판타지와 남성의 로망을 동시에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소설 『유혹』은 뛰어난 가독성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맹렬히 사로잡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짐승은 발정하지만, 인간은 유혹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은 오유미. 태생부터 불행을 타고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 단지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욕망과 성공과 복수를 위해 유혹의 전략적 기술을 쿨하면서도 뜨겁고 자유롭게 구사한다.
  솔직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유미의 행보가 나도 궁금하다. 다만 오유미가 욕망의 종결자, 유혹의 종결자가 되었으면 싶다는 바람뿐.
  성능 좋은 진공청소기처럼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내 소설로 한바탕 빨아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작가는 독자를 글로 유혹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작가다. 그런데 여기에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면 나는 ‘영원한 처녀 작가’이고 싶다. 나는 무엇이든 쓰겠지만, 내가 내는 책은 늘 ‘처녀작’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험으로 내게도, 독자들에게도 낯선 작품을 쓰고 싶다. 내 안의 ‘처녀’가 나를 끊임없이 유혹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 본문 중에서

  맛있는 섹스는 있어도, 맛있는 사랑은 없다. 사랑이 허기라면, 섹스는 일종의 음식이다. 이 도시에 음식점이 넘쳐 나듯 사람들은 여러 메뉴를 놓고 고민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맛있는 음식이 꼭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맛있기도 한 음식에 사람들은 안도와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미식가라면 먹음직스럽진 않으나 맛있는 음식을 탐색하는 데도 모험심을 발휘할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는 탐식가다. 게다가 맛있는 걸 절대로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만족한 섹스 후에 남자들이 하는 말은 딱 두 마디로 집약된다. “으음…… 맛있어.” 그리고 곧바로, “딴 놈이랑 하면 죽여.” 그런데 ‘맛있는’ 여자들은 딴 놈이랑 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대체로 맛있는 여자들은 딴 놈이랑 하다 걸리지 않을 만큼 영악하기도 하다. 그건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그녀들의 노하우일까?
  유미(由美)는 자신이 ‘맛있는’ 여자라는 걸 안다. 오랜 학습의 결과다. 딱 100명의 남자와 섹스한 건 아니지만, 백분위 점수로 환산한다면 90점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섹스는 일종의 피드백이다. 또한 과격한 섹스 행위는 레슬링과 닮았다. 그런데 레슬링과 다른 점은, 승률을 결정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는 유혹적인 먹이에 곧바로 제압당하게 된다.
—1권 9~10쪽
 
  자고로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했다. 요즘 한창 뜨는 인기 드라마에서 주인공 미실도 그렇게 말했다. 고대에나 현대에나 색을 잘 쓰는 여자는 남자를 정복하게 되어 있다. 미실에게 수천의 화랑과 군사가 있었다면, 21세기의 유미에겐 자신의 블로그로부터 파생된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가 있다.
  미실처럼 족보가 복잡한 관계는 싫다. 그래도 여자에게 무지개 같은 연애는 이상적이다. 요일별로 색다른 7인 7색의 섹스. 남자들은 힘들어도 여자들의 몸은 그게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현대 여성이라면, 일과 사랑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책상다리처럼 안정감 있는 넷도 괜찮다. 아니, 옛날 무쇠솥의 다리처럼 셋까지도 나쁘지 않다. 유미는 늘 최소한 다리 셋은 고수하고 있다.
—1권 24~25쪽
 
  나는…… 사랑을 믿는다. 아니, 어쩌면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믿고 싶다. 간절하게……. 「사랑밖엔 난 몰라」라는 주제가를 부르며, 배 째라고 누워 있는 ‘청승 가련형’ 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유미의 인생이야말로 역사소설, 즉 소재는 몸이고 주제는 사랑의 투쟁사 아니었던가. 지나간 역사는 나름대로 교훈을 주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1권 232~233쪽
 
  유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메두사처럼 산발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유미는 그 여자를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한없이 깊고 고독한 눈빛의 여자가 슬픈 듯 서 있었다. 
  “넌 누구니?”
  “난 유미(由美)야.”
  “나쁜 년!”
  “난 죄 없어. 모든 건 유미(由美), 아름다움에서 말미암은 거야.”
  “아름다움이라고?”
  “응.”
  “넌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무기를 가졌을 뿐이야.”
  “그건 타고난 재능이지, 내가 선택한 건 아니야.”
  “잘난 척하긴!”
  유미는 거울 속의 여자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속이 좀 후련해졌다.
—2권 49~50쪽
 
  인간은 참 적응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도 일방통행이다. 좋은 방향으로는 적응이 빠르지만 역방향은 끔찍하다. 이제 웬만한 차는 못 탈 거 같다. 인간의 욕망은 호리병이다.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뺄 수는 없는 게 욕망이란 놈이다.
—2권 72쪽
 
  유미는 욕망의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생에 대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디로든 달리고 싶은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해.”
  동진이 속삭였다. 그 말이 마치 당근이라도 되듯이, 아니 휘발유라도 되듯이 유미의 온몸이 다시 충전되었다. 동진이 다시 시동을 켜고 밀고 들어왔다. 그래, 달리는 거야. 온몸의 세포가 생생히 아우성치는 이 살아 있는 삶의 순간을 느끼는 거야. 사랑은, 생은,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의 질주일 뿐이다. 아아, 카르페 디엠(Carpe diem)!
—2권 83~84쪽
 
  여자가 사랑 때문에 섹스를 한다는 건 남자들의 이기적인 오해다. 여자들의 욕망은 여자들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어느 책에서는 여자가 섹스를 하는 데 237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유미는 이유도 없이, 아니 수많은 이유 중 하나겠지만 오늘 밤 동진을 간절하게 맞이하고 싶다.
  그런데 수익과 오늘 밤 잠정적으로 만날 약속을 했던 게 떠올랐다. 윤 회장과의 만남 이후 수익과 만나기로 한 걸 계속 연기했던 터였다. 수익이 너무 쉽게 유미를 장악하고 간섭하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충만한 연애란 두 사람 간의 거리 두기와 묘한 함수관계에 있고 그 균형을 잘 조절하는 건 여자의 현명한 재능이다. 조두식도 말하지 않았는가. 줄 듯 말 듯 꼬리 치라고. 사실 꼬리 춤은 주고 난 후에 더 잘 춰야 하는 법. 남자는 주고 나면 무조건 다 제 건 줄 아는 미련한 짐승이니.
—3권 48쪽
 
  눈을 뜨니 동진이 바닥에 앉아서 잠들어 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5시가 넘었다. 유미는 동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와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와 내연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주제가가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유미는 피식, 웃었다. 욕망이라는 것은 눈 가린 경주마 같다. 너무 맹목적이다. 욕망의 길은 일방통행이다. 한 번 시동을 건 욕망은 브레이크가 없다. 고로 욕망은 위험하다. 하지만 유미는 다시 생각한다. 여기서 멈추는 건 더 위험하다고.
—3권 203쪽
 
  “알코올과 대마초, 이런 거에 의존하면 안 돼요.”
  헉! 이 남자가 내 생활을 어떻게 알았을까?
  “한국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펼치려고 이곳에 온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게 제 뜻도 아니고, 어느 날 보니 저는 그냥 이곳에 툭 떨어져 있네요. 누구죠? 몇 푼의 돈으로 나를, 아니 내 인생을 원격조종하는 사람은?”
  유미는 결국 또 그 질문을 유진에게 하고 말았다.
  “여기 갑자기 오게 된 거, 오유미 씨의 의지가 아니라서 힘들다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로 이 기회를 새로운 변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바로 오유미 씨의 능력이고 또 운명입니다.”
  나의 능력과 운명이라……. 유미는 그 말이 너무도 무거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숨 끝에 갑자기 눈물방울이 곰탕 국물에 툭, 떨어졌다. 유미는 그걸 들키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수저를 놓고 외투를 입었다.
  “약속이 있어서 가 봐야겠어요.”
  그 말을 듣자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가지 말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유미는 곰탕 국물을 삼키면서 꾹 밀어내 버렸다.
  “그래요. 어서 가 보세요. 오늘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유진은 유미를 잠시 바라보다 망설이듯 말했다.
  “명심해요. 이곳은 에이즈의 천국이라는 걸.”
  “……?!”
  “자유로움과 자유분방함은 다르죠. 발레리라는 여자 친구는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이 남자, 발레리를 어떻게 알지? 의아해하는 유미의 표정을 무시하고 유진은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유진이 돌아서며 유미에게 말했다.
  “오유미 씨, 프랑스 나이로 스물여섯 살이죠? 청춘은 이렇게 탕진하기에 너무 아까워요.”
그 말을 하는 유진의 눈빛은 진실해 보였다.
  이유진은 유미가 힘들 때 SOS를 요청하면 다가와 그렇게 애틋하게 도와주었지만, 어딘지 몸을 사리는 구석이 많았다. 당시 그에게는 한두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었다. 유미가 가까이할 빈틈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유미에게 너무나 초연하다고나 할까? 모욕적일 정도로 무관심하다고나 할까? 유미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거리를 둔 채 이유진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무심하다가도 유미의 얌전하지 못한 생활을 알게 되면 선생님이나 고지식한 오빠처럼 굴었다. 그럴수록 유미는 오히려 더 관심을 끌려는 비행 청소년처럼 굴게 되었다. 천성이 호기심 많은 유미는 더욱더 자유분방하게 지냈고, 그것을 일부러 이유진에게 약 올리듯 알리곤 했다. 이유진은 그럴 때마다 큰 관심을 보였고, 유미는 그런 그의 태도가 재미있었다. 유미는, 너 이래도 안 넘어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유미에게는 유혹 종결자로서의 근성과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종국에는 유미가 나체주의자들의 해변 캠프에 참여하는 문제로 유진과 싸운 게 그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 피는 뜨겁고 생각은 미숙한 20대 시절의 이야기다.
—4권 30~32쪽
 
  이상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발가벗고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지금 유미는 발가벗은 사람들 틈에서 이상한 부자유스러움을 느낀다. 불평등을 느낀다. 발레리는 인간의 몸이 표현하는 보디랭귀지는 세계 공용의 언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미는 지금 자신이 벙어리, 그저 마네킹처럼 무력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보디, 즉 자신의 몸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세계 공용어와 소수자의 방언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감이었다.
  (……)
  성적 모험이나 욕망은 오히려 옷을 입은 세계에서 더 강렬하게 솟아나는 거 아닐까. 이런 나체촌에서 인간의 성적인 욕구는 오히려 초연해진다. 유미는 욕구는커녕 낯선 환경이 끔찍해서 당장이라도 파리에 올라가고 싶었다.
  유미는 한참을 망설이다 유진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나 유미.”
  “너, 어디니?”
  “응, 캠프촌이야.”
  “너 결국! 그래서, 재미있니?”
  “나 적응이 안 돼서 텐트 안에 그냥 있어. 동양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쪽팔려.”
  “너만 벗은 것도 아닌데 뭐가 쪽팔려.”
  “그래서 말인데…… 오빠가 여기 오면 어떨까?”
  “동양인 커플이 다니면 두 배로 더 쪽팔릴걸.”
—4권 110~112쪽
 
  “아뇨. 난 훔쳐보는 게 좋아요. 어젯밤에 당신의 모습을 보고 저 그림을 찾아 걸어 놓고는 밤새도록 환상에 젖었어요. 행복했어요.”
  관음증 환자인가? 그런 환자치곤 예술적인 심미안을 가졌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다니엘이 유미의 의표를 찌르듯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엉덩이를 내놓고 창가에 기댄 모습은 의도적이지 않았나요?”
  (……)
  다니엘이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요.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당신을 훔쳐보게 해 줘요.”
  “이미 훔쳐보셨잖아요.”
  “이제부터 허락을 해 줘요.”
  “?!”
  이 이상한 도둑질을 허가받고 하겠다는 건가? 유미는 이 괴팍한 프랑스 중늙은이의 청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상은 충분히 하겠어요. 난 언제부턴가 그림 이외에는 모든 게 시들해졌어요. 심지어 소피와의 관계도 그래요. 그런데 이상해요. 당신을 훔쳐보는 그것이 너무 설레고 흥분되었어요. 가슴이 설레는 이 기분, 이걸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니 행복했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4권 159~161쪽
 
  “용준, 다니엘 화랑을 통해 미술품을 거래할 땐 스페셜 영수증을 써 주겠다고 위에 보고해. 물론 그 차액은 돌려주겠다고.”
  재벌이 비자금 조성을 위해서 신뢰로 다져진 화랑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편법이다. 화랑이 정가보다 부풀린 금액으로 작품을 팔아 돈을 받고 차액을 은밀하게 돌려주는 세탁 방법이다.
  “아, 그게 가능해요? 그거야말로 YB에서 정말 원하는 건데.”
  “가능하도록 해야지. YB에서는 이제 다니엘 화랑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테지?”
  “당근이죠. 그런데 다니엘 화랑에서 먼저 그런 걸 제안하면 윤조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죠.”
  “다만 세탁비로 차액 중 20프로는 뗀다고 해. 세탁소가 세탁비는 받아야 할 거 아냐.”
  “그래도 좋은 조건일걸요.”
  “데미안 허스트도 기대해도 된다고 해.”
  “와우! 오케이 나면 제가 파리로 날아갈게요.”
  유미는 또 런던의 에릭과 통화했다.
  “아, 로즈! 잘 지내요? 아버지와 약혼했다는 기사 봤어요.”
  “놀랐…… 죠?”
  “네, 놀랐어요. 암튼 축하해요. 혹시 저와 재산 싸움 이런 거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난 나중에 젊고 예쁜 새엄마와 싸우긴 싫은데. 하하하…….”
에릭은 웃었지만 유미는 마음이 좀 아팠다.
  “사실 비밀인데요. 그게…… 계약 약혼일 뿐이에요…….”
  “계약 약혼?”
  “일종의 비즈니스죠.”
—4권 209~210쪽
 
  용준이 입맛을 쩝, 다셨다. 용준은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 일사천리로 진척된 다니엘과의 관계나 에릭의 경매 회사와 베르나르까지 낀 비즈니스의 실태를. 어쩌면 다니엘도 에릭도 베르나르도 서로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유미의 청사진에서 그들은 다만 큰 점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을 연결하면 유미가 원하는 별자리가 된다.
  “그런데 쌤은 어떻게 그렇게 능력이 좋으세요? 다니엘 화랑에서 그렇게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 주니 말이죠.”
  “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한 거지, 뭐. 다 윈윈 하는 게 좋지.”
  용준이 목소리를 낮췄다.
  “맞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뭐, 윤조미술관도 비자금 조성하니까 좋고.”
  “내가 부탁한 모든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그 영수증 사본 잘 챙겨 놔.”
  “쌤이 하란 대로 하고 있어요.”
  유미는 윤 회장이 자신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뭐든지 다 카피를 떠 놓는 철저한 인간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했다.
—5권 88~89쪽
 
  “입 다물고 있어! 너도 오늘 제삿날이야.”
  조두식이 피범벅된 침을 내뱉으며 호리호리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저년을 처치하면 너도 이제 가치가 없지. 재활용도 안 되고 말이야.”
  조두식이 이를 갈았다.
  “윤규섭! 이 악마 같은 놈!”
  “야, 저 새끼 좀 조용히 시켜.”
  그러자 덩치 큰 남자가 조두식의 입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피를 뿜던 조두식은 술에 곯아떨어진 사람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두 남자가 이번에는 유미에게 돌아섰다. 유미는 저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호리호리한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유미에게 다가왔다.
  “바로 처리하긴 아까운데?”
  유미가 겨우 비명을 지르자 남자가 유미의 턱을 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며 윽박질렀다.
  “조용히 못 해! 입에다 뭘 물려 줄까?”
  남자가 느물거리며 바지 지퍼를 내리자 유미가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자 그가 유미의 뺨을 때리며 식탁 위에 있던 수건을 유미 입에 물리고 테이프로 봉했다. 그리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누군가 유미의 목에 칼을 댔다. 섬뜩하고 날카로운 촉감이 목에 선연하게 느껴졌다. 유미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5권 172~173쪽
 
 
■ 줄거리
 
  17세 딸을 둔 37세의 이혼녀 오유미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예술경영 석사학위를 받은 유미는 대학 강사,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 작가이며 문화센터에서 사랑과 연애에 대한 강의를 하는 사랑학 전문 강사인 동시에, 하루에 수천만 명이 드나드는 파워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한다.
  유미는 사랑과 일에 언제나 냉정과 열정을 유지한다.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 20년 지기인 유지완의 남편 황인규(알아주는 이태리 레스토랑의 사장이자 소믈리에)와 연애를 하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사랑과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유미는 자신을 흠모하는 대학원 제자인 박용준과 지완이 불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소개를 하는 한편 용준과 섹스를 한다. 60대 김 교수의 고독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라디오 박 PD와는 계약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YB그룹의 후계자인 완벽남 윤동준 이사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사과꽃 향기처럼 살인 미소를 풀풀 날리며 다가오는 매력적인, 그러나 정체불명의 남자 고수익에게도 서서히 빠져든다. 유미는 능력 있는 현대 여성답게, 또한 일과 사랑을 함께하기 위해, 책상다리처럼 안정감 있는 네 명의 남자, 또는 옛날 무쇠솥의 다리처럼 최소한 세 명의 남자를 고수하고 있다.
  한편 유미는 동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YB그룹에서 운영하는 윤조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실장 자리를 맡은 후 미술관의 재개관식을 성공적으로 치러 낸다. 하지만 동진을 사이에 두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강애리의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유미는 동진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중 하나는 YB그룹 윤규섭 회장이 유미의 과거를 들춰냈기 때문이다. 유미의 지난날은 치명적인 불운으로 점철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밑바닥 인생을 뒹굴었던 유미는 옛 애인이었던 이유진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긴 유미는 프랑스 최고의 화랑 재벌 다니엘과 그의 아들이자 런던 크리스티 경매 회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딜러 에릭, 그리고 천재적인 위작 전문 화가 베르나르 등과 두터운 친분을 쌓는다. 다니엘은 유미의 매력에 흠뻑 취해 파격적인 조건과 함께 3개월 단위의 계약 약혼을 제시한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는 실력자 다니엘 화랑을 등에 업고 유미는 이제 YB그룹과 윤조미술관을 상대로 본격적인 복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유진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와 유미의 출생의 비밀, YB그룹 윤 회장과 국회의원이자 지완의 아버지인 유병수 의원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 그리고 갖은 음모와 모략 들이 하나씩 드러나며 소설의 재미는 한층 배가되는데…….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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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

1997년 《라쁠륨》에 단편 「꿈꾸는 마리오네뜨」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 『폭소』, 『꽃게무덤』과 그림소설집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반 고흐, 서른일곱에 별이 된 남자』, 장편소설 『아름다운 지옥』, 『붉은 비단보』, 산문집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 『해피홀릭』 등이 있다. 2002년 「뱀장어 스튜」로 이상문학상을, 2005년 『꽃게 무덤』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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