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읽는다. 그래서 존재한다.” “나는 유민이 이 명제에 부합하는 일생을 살았다고 썼다. 과장이 아니다. 그가 정부 관리로, 언론과 기업 경영인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사형 선고를 받아 인간적으로 한계 상황을 맞아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것을 내면으로 소화하고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중단 없는 독서와 사색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무한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 정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책 읽기의 산물이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 대상화할 줄 아는 교양인이었다. 그런 모습은 풍요가 넘치는 대량 소비 시대에 나를 돌아보는 반성적 삶을 모르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소중한 경고요 귀감이다.” ―김영희

이 사람아, 공부해

유민 홍진기 이야기

김영희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1년 11월 7일 | ISBN 978-89-374-8395-0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476쪽 | 가격 20,000원

분야 논픽션

책소개

유민 홍진기의 삶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읽고
‘학인(學人)’의 자세와 창의력을 배운다

유민 홍진기는 문학청년이면서 타고난 학자다. 그러나 미래 조국의 해방을 염두에 도고 법률가의 길을 간다. 유민은 학자의 길을 원했고 그의 논문은 일본 교수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 청년은 강단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법조인의 길을 가게 된 유민은 해방된 조국에서 “법률가의 건국 사업”인 법전 편찬에 매진한다. 6·25 때는 피란을 가지 못하고 지하에 숨어 굶어 죽다시피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전쟁 후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유민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조차 안심하고 있던 대일청구 문제의 난항을 예상하고 조서를 준비함으로써 1951년 한일회담 대일청구권의 유일한 기초 자료를 마련하게 된다. 유민은 1953년 반공포로를 탈출시키는 급비 계획에 중요한 자문을 했고, 한일회담에서 구보타 망언에 대항하여 해방의 논리에 대한 국제법적인 차원의 철학을 제시하는가 하면 당시 무력통일 외의 아무런 논의가 없던 시절에 처음으로 평화통일론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이 모든 일은 유민이 학자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단 한시도 학인으로서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인규가 물러나자 유민은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최인규가 주도한 3·15 부정선거 사태 수습을 떠안게 된다. 전국으로 대모가 확산되는 가운데 유민은 이기붕을 찾아가 절대 발포 불가를 호소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민은 발포 책임을 떠안고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는다. 무기수로서 유민의 수형 생활은 그야말로 독서삼매였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유민의 독서 범위는 그야말로 방대했다. 감옥에서 유민은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아무리 영락하더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고 잃어서도 아니 되는 최후의 것, 그것은 자기를 존경하는 마음이오. 다른 사람에게 여러 가지 부탁하고 신세 지고 심부름 시키고 하더라도 이때에도 이러한 긍지를 보존하여야 하오.” ‘유민(維民)’이라는 호도 수감 생활에 얻었는데 “늘 백성을 생각하며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중앙일보》 사장이 된 후에는 백지 기사 사건을 비롯해 언론통폐합에 이르는 시련들을 유민은 지혜롭게 헤쳐 나가면서 특유의 공부 본능으로 창의성을 발휘하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아 언론의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의 경제는 반도체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깨닫고 사위 이건희 회장에게 반도체 공부를 독려하며 삼성그룹의 향방에 큰 역할을 한다.
이처럼 가난한 식민지 지식인에서 한국전쟁을 거쳐 초대 정부의 최고 관료와 사형수라는 최악의 상황을 넘고, 언론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면서 군사 정권의 언론 탄압을 이겨 내고, 기업 경영인으로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인생 여정에서 유민이 끝없이 혁신의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철저한 공부와 독서력에서 비롯한다.
“어떻게 남의 눈물 젖은 돈을 받느냐?”며 변호사 일은 무료로 해야 한다고 말했던 유민은 항상 나라와 국민을 걱정했고, 아내가 5년 남짓 동안 병석에 누울 때는 책상 위로 한가득 간염 관련 원서들을 쌓아 놓고 공부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아내의 병간호를 손수 할 만큼 따듯한 성격이었지만, 기자들에게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며 자극을 줄 때는 그 누구보다도 무서워서 악명이 높을 정도라 모든 직원들은 유민 앞에서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학자의 길은 가지 못했으나 학인으로서 끊임없이 창조적이고 책임 있는 인생을 살다 간 유민 홍진기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해 독자는 한국 근대사의 혼란스러운 현장을 맞닥뜨릴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공부와 성찰로 미래를 개척한 한 개인이 전하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접하게 될 것이다.

편집자 리뷰

★ “법률가의 건국 사업은 법전 편찬!”
가난한 식민지 문학청년, 조선 독립의 희망을 품고 법학을 택하다 
존 F. 케네디, 박정희, 윤이상, 윤동주가 태어난 해에 홍진기는 왕십리 천재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 예과 시절에 홍진기의 청량리 하숙집은 일종의 문화 살롱이었다. 톨스토이, 괴테, 앙드레 지드를 읽으면서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논했다. 특히 프랑스 문학에 심취해 있던 홍진기는 보들레르 시집을 들고 다녔고 지드의 『좁은 문』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또한 경성제대 조선인 학생들의 모임은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자리였다. 조선어 교가를 몰래 지어 불렀고, 주로 일본인은 먹지 않는 추어탕 집에서 모였다. 유민이 법학을 택한 것도 언젠가는 조선이 독립하리라는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진기는 법무학부에서 조수 자리를 얻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이 조수가 되는 것은 고등문과 시험 합격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조선인 조교는 사회의 불평분자라는 딱지가 붙어 일경이 꾸준히 내사를 했기 때문에 일본인 교수들도 조선인 조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민은 1940년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경성제일고보, 경성제국대에 이어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다.

홍진기는 고등문과 시험을 합격하고도 오로지 학인의 길을 걷기 위해, 비록 조선인이 아홉 개밖에 없는 제국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지만, 학교에 남는다. 1941년(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단행한 해에) 《법학회논문집》에 개재한 처녀 논문 「주식회사 합병에 있어서의 교부금」은 유민이 준재임을 확인시켰는데, 당시 교수가 아닌 조수가 그런 대학 연구지에 논문이 발표된다는 것은 신인 학자의 등장을 알리거나 조교수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채 두 달이 못 되어 공산당 사건과 연루된 조선인 조수가 나오자 바로 조선인 조수 제도는 폐지되었고, 홍진기도 쫓겨나면서 학인의 길은 그렇게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차선책으로 1942년 경성지방법원 사법관 시보로서 법률가의 첫걸음을 떼었지만, 그의 논문은 학계의 주목을 받아 도쿄 제국대학 교수가 그의 논문을 인용하고 해설하기까지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동료 판사들은 유민에게 전주에 남아 편하게 돈을 벌라고 꼬드겼고, 실제로 그들은 아편 사건이 많은 전주에서 큰돈을 모았다. 하지만 유민은 “법률가의 건국 사업은 법전 편찬”이라고 믿었다. 전문가의 수가 부족한 해방 조국에서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유민은 사법부 법전 편찬부 서기관으로 일한다. 그 사이에 이승만이 귀국하고, 미군정은 북의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하고, 남에서는 신탁통치 찬반 논란에 거세게 일어났다.
 
★ “유민의 대일청구 조서는 1951년 한일회담의 유일한 기초 자료”
항상 국제정치를 공부했던 유민만이 남다른 대안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홍진기는 신생국가 대한민국 법무부에서 ‘배상청구준비위원회’를 건의하여 청구 조서를 만든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귀속 재산은 한국의 재산이라고 공표한 바가 있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 문제를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조서는 1951년 한일회담이 열릴 때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문서가 된다. “만일 이 조서가 없었더라면 청구권 조서를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뻔했다. 조서를 만들 기초 자료나 증빙 서류들이 전쟁 중 사라져 버린 데다 부산에 와 있는 피란 정부로선 막대한 인력과 시간을 들이고도 제대로 된 조서 작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자료는 대일 청구권의 유일한 기초 자료였던 것이다.

국제법인 헤이그 조약 46조 사유 재산 불양권의 원칙에 의하면 재한 일본인들의 사유 재산을 귀속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재산은 미군정에 이양되었다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지만, 그것은 한미간 협정일 뿐이기 때문에 일본이 헤이그 조약을 들고 나오지 못하도록 미일간 조약에도 그 문제를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국제 정세에 늘 촉각을 세우고 있던 홍진기만이 가질 수 있는 혜안이었다.

1951년 대일 강화 조약 초안이 발표됐다. 유민은 이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를 건의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만 믿고 유민의 걱정을 묵살했다. 하지만 유민의 예상대로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미국의 대일 강화 조약의 수정된 초안의 요지는 “한국에 있는 일본의 국, 공, 사유재산 및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청구권 처리에 관해서는 이 강화 조약과 별도로 한일 간에 특별 협정으로 해결을 짓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유민은 미국에 귀속 재산에 대한 한국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는 조문을 강화 조약 자체에 추가할 것을 요구했다. “연합국이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베르사유 강화 조약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패전국에 대한 배상은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원상회복 원칙의 법 이론에 기초해 일본의 헤이그 육전법에 기초한 재산 청구권에 반론을 제기하고 한국의 독점적 재산 청구권을 제시했다.” 그렇게 일본인 재산의 한국 귀속 문제가 미일 강화 조약에 의해 보장됨으로써 한국 초창기 외교사에서 값진 수확으로 기록된다.

1953년 10월 3차 한일회담에서 구보타 망언 1호가 나왔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한국민에게 유익했다.” 일본도 대한 청구권이 있다는 것이다. 유민은 해방의 논리(김용식이 원상 회복의 원칙이라고 해설)를 들어 논박했다. “일본이 말하는 청구권과 한국이 말하는 청구권은 근본적으로 그 성질이 다르다. 우리 측의 청구권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데 따르는 청산의 문제인데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인 것이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양보해서 해결할 수가 없다.” 1977년에 유민이 대만 국립문화학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도 「해방의 국제법적 성격」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해방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어떠한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에 기초를 둔 식민 통치나 적국의 점령 상태가 전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불법에서 벗어나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해방의 참뜻을 일본은 고의적으로 외면하려 한 것이다. 해방이란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과거의 식민지 통치가 합법적이고 당연한 것이란 가정을 묵수(墨守)하려고만 하니 여러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구보타의 망언은 유민의 집요하고 논리 정연한 공격에 당황하여 나온 속마음이었다. 한일 회담 대표단은 구보타에게 망언 취소를 요구했으나 구보타는 취소를 거부했고, 우리 측 대표는 구보타의 망언 취소 거부를 회담 결렬 이유로 들어 결렬 책임을 일본 측에 넘겼다. 그 후 구보타 발언의 정식 취소와 일본의 대한 청구권 주장 포기가 이루어지는 1957년까지 4년간의 휴면 상태가 이어졌다. 그리고 구보타는 일본 정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 최초 “평화통일론”을 정립하고, 독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다
“홍진기 해무청장이 취임한 후 해운항만, 어업 분야에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1954년에 법무차관 홍진기는 제네바 회담에서 남북통일 방안을 만드는 중대한 임무를 맡는다. 여기서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평화 통일론이 등장한다. “그것은 긴 역사를 시야에 둔 인물의 먼 앞날을 내다보는 창조적이고도 과감한 사고의 산물이었다.” 이 나라 평화 통일론의 원조가 바로 홍진기였던 것. 당시는 북진통일이 당연시 되던 시기였고 통일에 대한 연구도 전무하던 때었다. “나는 평화통일 방안을 만들 때 의지해야 할 이념이 무엇이냐를 찾느라 상당 기간 방황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의 법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통일이라는 목표가 파악되었다.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합법성이 공인되어 있었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통일이 기본 이념이자 평화통일의 목표로 파악되었다.”

한편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 어선의 맥아더 라인 침범이 잦아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1952년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공표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여기에 항의하는 외교 문서를 보내왔으니, 이것이 한일간 독도 영유권 분쟁의 시작이다. 1953년에 일본 관리가 독도에 침입해 ‘다케시마’라고 쓴 경계표와 게시판을 설치하고는 「일본 정부의 견해」를 보내왔다. 이에 한국 정부는 그것들을 뽑아내고는 「한국 정부의 견해」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역사적, 국제법적 근거를 통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민이 작성의 실무를 맡았다. 유민은 정부 관료 중에 최고의 국제법 전문가였던 것. 일본이 다시 독도의 인 채굴권을 허락하는 등 행정 조치를 단행하자, 유민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은 독도에 무인 등대 설치와 태극기 게양을 지시했다.

1955년 유민은 족청(조선민족청년단)계라는 모함을 받고 법무부에서 쫓겨나지만 곧 해무청장에 취임한다. 유민은 누구와도 잘 지내는 인격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뛰어난 명민함 때문에 고위 공직자로 갈수록 오히려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시기를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지인들은 그의 해무청장 자리를 일종의 좌천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어정과장을 지낸 이종성은 “홍 청장이 취임한 후 2년여 동안 해운항만, 어업 분야에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유민은 1955년에 설립된 해무청에서 어선 건조나 여행선 개조 같은 사업을 위한 예산을 따내기 위해 ICA(국제협조처), 대충(미국 원조) 정부 예산, 은행 융자 등에서 자금을 얻느라 매일같이 동분서주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경영인으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될 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권력의 구조뿐 아니라 돈의 순환에 대해서도 파악하게 된 것이다.
 
★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억울한 무기수, 간방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독일어를 가르치고 과학책을 읽다

1958년 다시 법무부장관에 오른 유민. “당시 장관은 최고의 출세 자리였지만 그것은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악(邪惡)에 끼어드는 운명적인 정치 일정이었으니, 이승만이 죽음의 키스를 내린 것이었다.” 1960년 최인규가 주도한 3·15 부정선거로 인해 전국적으로 데모가 시작됐다. 궁지에 몰린 최인규가 사퇴하자, 이 대통령은 홍진기를 불러 믿을 사람이 없다며 내무부 장관을 맡긴다. 졸지에 홍진기는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이 된 것. 이기붕은 발포를 포함한 강력 수단으로 사태를 수습하라고 압박했고, 홍진기를 그를 찾아가 그런 방법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며 발포 절대 금지를 지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민은 경찰의 정책적 책임은 자신이 책임 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후배들의 망명 권유를 거부했다. 유충렬이 발포 최고 책임자를 홍진기라고 우기자, 언론은 연이어 홍진기를 발포 명령자라는 잘못된 기사를 내보냈다. 홍진기는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도 적극적인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사실과 다른 대목에서만 아니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진기에게 사형을 구형한 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재가 아니라 4·19로 탄생한 가장 민주적인 정부에 의해서 소급 입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오타카 교수는 쓰지 않았던가. 법의 궁극에는 정치가 있지만 정치의 궁극에는 정치의 규준으로서의 법이 존재한다고. 정치가 법 위에 군림하는 한, 그래서 정치의 필요에 따라 헌법을 고쳐 소급 입법을 하는 한 법정에서 실현된다고 믿어지는 정의는 사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치적 정의다.” 지인들 사이에서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공직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인격과 두뇌와 청렴함이 아까워서라도 꼭 살려야” 했던 것이다.

유민은 이렇게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부가 최후를 맞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사태 수습의 책임을 지고 서대문 형무소에 무기수로 들어온다. 그러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자세로 희망 없는 간방 안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동료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또 다른 동료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유민의 일생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한 안중근의 삶을 따른 것. 유민의 수형 생활은 그야말로 독서삼매였다. 유민이 아내에게 보낸 엽서의 한 예다. “전에 차입한 불, 독의 소설을 다 보았으니 그것을 산 서점에 가서 최신간으로 미, 불, 독 각 어의 정치, 역사, 과학(로켓이나 원자 등) 및 예술(특히 소설)의 각 분야에 걸쳐서 각각 3권씩(영, 불, 독 각 12권 계 36권) 목록을 알아서 편지로 써 보내 주시오.” 유민의 아내는 6남매를 뒷바라지에 수입도 끊긴 상황이었고 또 당시 법문사 책은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읽지 않는 책인 데다 원서가 많아서 책을 구하러 다니는 데 힘이 들었다고 한다. 최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부친이 옥중에서 보던 『산스크리트어 문법』이라는 일본어 책을 입수했다. “독서는 학인 홍진기에게는 가치 그 자체였다. 책에 대한 태도는 홍진기 자신의 본성이었다.” 유민은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아무리 영락하더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고 잃어서도 아니 되는 최후의 것, 그것은 자기를 존경하는 마음이오. 다른 사람에게 여러 가지 부탁하고 신세 지고 심부름 시키고 하더라도 이때에도 이러한 긍지를 보존하여야 하오.” 이것이 학인의 신념이다. 그와 같은 수영 생활을 한 김일환은 “유민은 감방을 도서실로 생각했다. 영어, 불어, 독어 서적을 쉬지 않고 읽었다.”고 회고했으며, 그의 독서 자세는 깡패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수감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간방에서도 유민은 문화, 예술은 물론이고 천문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또 현재는 뉴욕 주립대 석좌교수로 있는 조가경의 『실존철학』을 읽으면서 무기수로서의 한계 상황을 극복했고, 후에 조가경을 찾아 직접 지도를 받는다. ‘유민(維民)’이라는 호도 수감 생활에 얻었는데 “늘 백성을 생각하며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유민이 열악한 수감 생활(지금의 깨끗한 감옥과는 거리가 멀다.)에서도 마음을 편히 다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독서와 불심이었다. 유민은 훗날 “있는 사람은 보시(布施)를 해야 소화불량이 안 된다.”라고 자녀 교육에 힘썼다. 유민은 감옥에서 병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매일 신경안정제를 먹을 때도 병문안 오는 큰딸 홍라희(현재 리움 관장)에게 원서를 읽어야 한다며 『예술의 의미(The Meaning of Art)』를 영어로 읽는 숙제를 주고 어디까지 읽었는지를 챙겼다.

박정희 공화당 정부는 옥중 유민을 찾아와 정치인이 될 것을 권유하지만 유민은 거절한다. 그래서 1963년 5월 16일 혁명 2주년 특별 사면에서 유민은 제외되지만,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여러 지인들의 건의로 사면 받는다. 3년 3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홍진기는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변호사 개업을 거부한 이유는 “변호사를 하면 무료로 해야지. 어떻게 남의 눈물 젖은 돈을 받느냐?”였다.
 
★ “언론에 권력의 압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돈의 압력이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끊임없는 공부 본능으로 기존 언론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유민은 1964년 삼성 이병철 회장의 신임을 받아 라디오서울 사장으로 초대되어 TBC(동양 텔레비전 방송) 이사를 겸임하게 된다. 언론은 새로운 영역이었지만 유민은 모든지 공부해서 마스터하는 자신을 믿었다. 이후 방송 관련 방대한 양의 책을 읽고 실무진들을 자주 불러 현장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참신성과 적극성을 내세우며 ‘양대강, 강대강강’ 전략을 내세웠다. 즉 경쟁사가 약한 곳에는 강하게 대응하고, 경쟁사가 강한 곳은 더욱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뉴스 시각을 시보(時報) 앞으로 당기는 등의 혁신으로 취임 두 달 만에 경쟁사 5.5퍼센트를 제치고 청취율 8.8퍼센트로 1위를 기록하며 흑자를 냈다. 이후 라디오서울은 중앙방송으로 개명하고 1966년에 전년 대비 70퍼센트 성장했다. 동양TV 개국에도 경영에 관여하여 악단, 성우, 탤런트, 가수 등 연예인의 관리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연예인을 ‘딴따라’로 취급하던 시대에 유민은 연기자와 성우 공채 제도 등 전문 인재 양성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이병철 회장은 4·19와 5·16혁명 이후 혼미를 거듭하는 나라를 위해 잠시 정치인이 될까도 생각했지만 숙고 끝에,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잡을 수는 있으나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리지는 못한다.”라는 명언에 따라 마상의 총검보다 더 강한 언론을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물론 언론도 잘못 사용하면 흉기가 된다. “펜이란, 언론이란, 이 양면의 성격과 기능을 지닌 ‘양날의 검’인 것이다. 이것을 충분히 인식한 바탕 위에서 자율의 억제가 통하고 균형 감각이 잡힌 힘 있는 종합 매스컴을 만들어 그것을 육성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중앙일보》가 탄생하는데, 유민은 신문의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갔다. 당시 신문사의 상업성은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풍토였으나 유민은 발상을 전환하여 기업으로서의 신문사를 표방했다. “언론 자유를 지키려면 수입이 있어야 한다. 경영이 충실해야 언론 자유를 지킬 수 있지 않는가? 언론사가 권력으로부터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면 흑자를 내야 한다.”가 유민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유민에게 신문은 단지 ‘언론 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정보’ 사업이었다. 신문의 1면은 정치면이라는 도식적인 틀을 벗어나 그날의 가장 화제가 된 뉴스를 1면에 내세우는 종합 편집을 도입했다. 문화면 또한 문인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문학 이외의 과학, 학술, 종교, 연예 등 문화 전반으로 영역을 넓혀 지면을 할애할 것을 지시했다. 지금은 상식처럼 됐지만 일기예보를 《중앙일보》의 고정물로 정착시킨 것도 유민의 아이디어였다. 유민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절절한 육성과 고백을 담은 「민족의 증언」(4개월 489회 2079명의 증언)을 연재하여 ‘한국 전쟁 실록’을 남김으로써 수많은 논문, 저서, 기사 등의 자료가 되었다.

1969년 MBC TV가 개국하면서 텔레비전도 경쟁 시대가 열렸다. 이미 정산에 오른 TBC를 수성(守成)하기 위해 이병철은 홍진기를 동양방송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시킨다. 1971년 홍진기가 동양방송 회장을 겸직하게 되면서 치열해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카드로 첫째 라디오, TV, 신문, 출판 등 각 부문을 별도 채산으로 독립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소수정예 고임금 고능률을 지향하고, 둘째로 일일 연속극(당시에는 일일드라마는 라디오에만 있었다.)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970년 「아씨」 열풍이 나왔다. 또 화면 처리에서 조명까지 홍진기는 현장을 뛰고 있는 전문가들보다 더 창의적인 생각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이 모든 것이 분야를 막론한 홍진기의 폭넓고 깊은 독서 경험에 기초한다.

유민은 “재정적 기초 없이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문에 있어 권력의 압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돈의 압력이다. 외부에 부채를 지고 경영 상태가 악화되어 돈이 없어 쩔쩔매는 형편이 되면 언론의 자유와 공정성이 흔들린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언론 자유라고 하지만 재정 압박은 어디서 이상스러운 간섭을 받는다는 정도 이상의 부자유를 겪게 한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런 소신은 혁명적인 발언이었지만, 1980년대 폴란드의 《뉴욕 타임스》라 불리는 《가제타 부보르차》를 창간한 동유럽의 미디어 왕 아담 미크니크도 이런 말을 했다. “사명감 없는 언론은 냉소주의에 빠지고, 사업성 없는 언론은 파산한다.” 돈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민은 신문이 지향해야 할 것을 정보와 재미와 교훈을 담은 지면을 꼽았다. 그리하여 1971년 「식품과 영양」이라는 연재물을 시작했는데, 당시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시절, 영양보다는 배불리 먹는 게 더 시급했던 시절에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또 유민이 기획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한국 신문사상 최장기 연재물이다. 「신여성 교육」으로 시작하여 「무성영화 시대」, 「상해 임시정부」, 「진보당 사건」 등 모두 인기 기사가 되었다. 유민은 특히 해외 토픽이야말로 신문에 중요한 ‘델리커시’라며 꼼꼼히 챙기는 바람에 ‘해외 토픽 담당 국제부 차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정신착란을 일으킨 조카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 일에 대해 “사우디의 정정(政情)”이라는 제목을 유민은 “리야드 왕궁의 총성(銃聲)”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바꿨다. 유민의 아이디어는 독서에서 나왔다. 도서실을 회장실 옆에 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또한 전문가 기자를 신문사 최초로 영입한 것도 유민의 아이디어이다.
 
★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내용은 맹목이다.”
기자들을 향한 홍진기의 공부 독촉은 악명 놓을 정도였다

후에 《중앙일보》 기자들 사이에는 “이 사람아, 공부해!”가 유행어가 되었다. 중앙일보사 21층 그의 방 책상 위에는 언제나 일본과 미국과 유럽의 신간 서적들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 또한 읽어 두어야 할 책을 메모하여 외국 특파원에게 책을 보내도록 부탁하는 일이었다. 그의 독서 범위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 홍진기는 반도체에 관한 책을 거의 있는 대로 다 읽었다. “나는 읽는다. 그래서 존재한다.”가 유민에게는 지식인의 전형인 것이다. 문사철 중에서도 역사 문제에서 유민의 관심을 끈 것은 고대 한일 관계이다. 일본 야마토 정권 자체를 세운 것이 백제 사람들이라는 것. 따라서 한국인이 일본인을 상대로 역사 이야기를 할 때는 고대 한일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중앙일보》는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의 길을 답사하여 세 번이나 연재하게 된다. 출장에 가서는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내용은 맹목이다.”라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구절을 내놓으면서 저널리스트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서울 가서 답을 주라는 숙제를 내놓는다. 유민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는 의미로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問)”을 자주 언급했다.

홍진기는 서재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정부 관료 시절에 공직자로서 집을 호화롭게 꾸밀 수는 없지만 서재만은 자신의 취향으로 꾸미고 싶다면서 당시 유명한 건축가였던 강명구를 찾아가 상의하여 통나무 의자도 들여오고 벽난로도 만들고 바닥엔 카펫을 깔았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홍라희 씨의 기억에 의하면, 지금은 서재 꾸미기가 흔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감각이었고 상당히 모던했다고 한다. 홍진기의 공부 독려는 사내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해외 출장이 있을 때면 유민은 특파원들이 사전을 가져왔는지, 사전에 줄이 쳐져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에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웨이터에게 베이컨을 씹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바싹 구워 달라는 주문을 하게 하질 않나 런던에서는 가로수 이름을 묻더니 특파원이 대답을 못하자 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걸어오게 했다. 유민은 특파원들이 현지 문화와 언어와 풍습을 철저히 익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유명 인사가 카퍼레이드 할 때 색종이를 뿌리지 않는가? 그걸 영어로 뭐라고 하나?” “내가 아토피가 있어서 그러니 가려운 데 바르는 약을 사 주게. 그런데 자네, 가렵다는 말을 일본어로 뭐라고 하지?” “요즘 일본에서 인기 있는 추리소설가는 누군가?”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일식집은 어딘가?” 홍진기를 수행한 기자들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기상청외의 대답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길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냐는 유민의 질문에 기자의 입에서 “농번기가 돼서 모두들 들에 나갔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온 것이다. 《중앙일보》는 2011년을 ‘공부하는 해’로 정하고 ‘J-코기토’를 발족했다. 그 외에 공부 모임이 붐을 이루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박석무 교수를 모시고 하는 다산학 강의에는 전현직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의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공부하는 전통은 이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금슬이 좋았던 아내 김윤남이 만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홍진기는 공부 본능이 발동하여 그의 책상 위에는 일본에서 공수해 온 간에 대한 책이 쌓이기 시작했다. 오륙 년을 병석에 있던 아내가 완전히 회복한 것은 유민의 지극정성 간호와 끈질긴 연구도 큰 몫을 했다.

《중앙일보》 사장으로서 유민은 한국 근대사의 한가운데 선 산 증인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박정희가 측근 김재규에 의해 쓰러졌을 때, 유민은 보도국 간부들에게 이 사건을 깊이 있고 폭넓게 보도하되 눈앞의 사건에만 매몰되지 말고 역사의 스펙트럼에서 사건의 의미와 그것이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성격 지을 것인가에도 초점을 맞추라고 당부했다. 그때도 홍진기는 칸트를 인용했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내용은 맹목이다.” 기자들과 간부들이 내용(기사)의 홍수에 휩쓸려 생각(사유)할 여유를 잃지 말라는 학인의 유용한 경고였다. 홍진기는 박정희가 후세에 성공한 개발 독재자로 평가될 것을 전망한 것이다. 개발 독재에 성공한 유일한 지도자가 싱가포르의 리콴유이고, 실패 사례가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아르헨티나의 페론, 필리핀의 마르코스 등이었다며, 비교 연구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이처럼 유민의 사유는 깊고도 폭넓었다. 유민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면서 동시에 경쟁사를 따돌리는 방법으로 제일 먼저 깔아야 한다는 판단에, 과감하게 신문 지면을 당시 8면이던 것을 4면으로 줄여서 경쟁사들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 나오는 바람에 25만 4000부라는 가판 판매 기록을 남겼다.
 
★ 군부의 언론 탄압 vs. 새 시대 정보 산업을 향한 비전
반도체, 뉴미디어, 문화 산업… 미래를 정확히 예견하는 탁월한 통찰력

유민의 1978년 신년사는 “뉴미디어 등 새로운 정보 산업으로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였다. 1980년대를 내다본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 시절 사북 탄광 사건이 터졌을 때 《중앙일보》 기자 탁경명이 광부들의 연행 장면을 카메라로 찍다가 계엄군의 M16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고, 군 부대로 옮겨져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중앙일보》는 이 기사를 사회면에 3단 크기로 실었다가 계엄 사령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자 그 자리를 공백으로 둔 채 신문을 냈다가, 3판부터는 기사를 다시 싣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거의 모든 신문 기자들이 검열 거부와 자유 언론 실천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다. 신군부가 후에 두고두고 시비를 건 ‘백지 신문’ 사건이다. 전국에 시위가 확산되면서 김대중이 체포되자 광주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FIEJ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텔아비브에 있던 유민은 BBC 방송이 전하는 광주 사태를 접하게 된다. 이런 역사의 우여곡절 끝에 신군부는 언론통폐합을 발표, 신군부는 유민을 취조실로 불러 TBC를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고문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이병철 회장까지 불려와 사유 재산인 TBC는 이렇게 야만적인 방법에 의해 하루아침에 KBS로 넘어간다. 동아방송도 사라지고 《신아일보》를 포함한 많은 신문사들이 문을 닫으면서 언론 실직자들이 무더기로 나와 ‘통폐합주(酒)’로 설움을 달래야 했다.

1981년 유민은 신년사에서 언론의 역할을 이렇게 강조했다. “지금 자유 국가건 공산 국가건 정치의 주된 목표는 어떻게 국민을 잘살게 하느냐 하는 경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상부 구조인 정치, 도덕, 언론 등이 하부 구조인 경제를 옳게 진단하고 적절한 처방을 찾아내서 그 처방을 정확하게 집행하는 나라만이 위기를 극복하고 불황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수산의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에서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 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와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처럼 닦으면 사는 수위”라는 표현이 각각 전두환과 군을 모욕하는 것이라 하여 작가 한수산을 비롯하여 《중앙일보》 문화부장, 편집위원 등이 ‘빙고하우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한국 경제의 총아가 된 반도체는 호암, 유민, 이건희의 합작품이다. 호암은 한국 사회에서 반도체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반도체 진출을 시도했다. 당시 유민의 아내는 딸에게 “얘, 지금 너희 아버지가 저 연세에 밤 1시까지 반도체 책을 읽는단다.”라며 불평을 했다. 유민은 산더미처럼 쌓인 반도체 관한 원서들에 페이지마다 밑줄을 그으면서 사위에게 조언했고, 그렇게 해서 이건희 사장이 사비를 들여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게 된다. 1983년 초 유민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만들고, 호암은 결국 전격 투자를 결심한다. 이로 인해 적자가 계속되자 그룹 내에서 원망을 많이 들었지만 “앞으로 정보화 시대가 온다. 자원 빈국인 우리나가 먹고살 거라고는 정보통신(IT)뿐이다.”라며 반도체 사업을 밝게 전망했다. 호암과 유민이 각각 1987년, 1986년에 눈을 감았으므로 모두 반도체의 성공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야말로 반도체 신화의 주역들이다. 유민은 또한 삼성 그룹 전반에 소방수 역할을 했다. 호텔 신라가 경영이 어려우면 호텔 신라를 맡았고, 삼성전자 회의에도 매주 참석했고, 전주제지가 안 될 땐 전주제지를 맡았다. 현재 삼성 그룹의 포트폴리오는 이렇게 유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1982년 중앙일보 신사옥은 유민의 지시로 좀 더 미학적으로 만들고 아트홀과 문화센터를 포함한 문화 공간을 창출했다. 신문사 안팎에서 돈과 공간 낭비하며 특히 아트홀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유민은 긴 안목의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호암 아트홀이다. 이곳은 개관 20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 최고 수준의 공연장으로 손꼽히니 당시 유민의 문화 감각이 남달랐던 것이 분명했다. 또한 1985년 엔고 현상을 예견하고 유민은 “달러화, 금리, 석유가 3저 현상”을 이용할 것을 강조하는 기사를 내보내게 했다. 그리하여 《중앙일보》는 1880년대 후반 한국 경제에 “굴뚝산업이라 불리는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경박단소(輕薄短所)의 첨단 기술”로 나아가야 하는 호기임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작가 소개

김영희

저자 김영희(金永熙)
《중앙일보》가 창간된 1965년부터 1986년 유민 홍진기 회장의 별세 때까지 유민의 관심권 안에서 그의 편달을 받으면서 기자로서의 황금시기를 보냈다. 1980년대에는 해마다 두 번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이사회와 총회에 참석하는 유민을 수행하면서 직접 지도를 받고 그의 맨얼굴과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1936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교 철학과와 미주리 대학교 언론학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최고위국제보도 과정을 수료했다. 1958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중앙일보》 외신부장, 워싱턴 특파원, 편집국장, 수석논설위원, 출판본부장 등을 지냈다. 1995년부터 상무대우, 전무대우, 부사장대우 국제문제 대기자를 거쳐 현재 고문 및 대기자로 칼럼과 뉴스 분석을 쓰고 인터뷰를 자주 하면서 53년째 행복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밖에 관훈클럽의 총무와 신영기금 이사장,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다. 저서로 『워싱턴을 움직인 한국인들』, 『페레스트로이카 소련 기행』, 『마키아벨리의 충고』가 있고,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한국 펜클럽 편집부문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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