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평전

자오커야오, 쉬다오쉰 | 옮김 김정희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1년 10월 10일 | ISBN 978-89-374-8318-9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688쪽 | 가격 35,000원

분야 논픽션

책소개

중국 역사상 가장 정치를 잘한 제왕 당 태종
태평성세 ‘정관의 치’를 이룬 그 제왕학의 비밀을 밝힌다
 
모든 간부들과 지도자들은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또한 뒤집을 수도 있다.”는 (당 태종의) 말을 새겨들어야만 한다. 횡령과 부패를 일삼는 자들은 어떤 영역이나 사람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할 것이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
 
오천 년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부강했던, 태평성세 중의 태평성세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649년)’를 연 당 태종 이세민의 삶과 치세를 총체적으로 다룬 『당 태종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푸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중국 당대사(唐代史)를 전공한 저자들이 ‘제왕 중의 제왕’으로 손꼽히는 당 태종의 언행과 치세를 수많은 전적과 사료들에 기초해 복원해 가면서 후세의 귀감이 되었던 그 통치 비결을 객관적으로 그려 낸, 방대한 분량의 역작이다. 중국 당나라를 번영의 길로 이끈 당 태종의 열린 인재 경영과 여러 민족이 공생 발전하는 국가 경영은 비단 중국의 정치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경제와 기업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한 지도자들이 배울 만한 화합·통합·공생 리더십의 거울이다.

편집자 리뷰

후한(後漢)이 멸망한 이후 약 360년간 여러 이민족들에 의해 할거된 위진남북조 시기의 대혼란을 극복하고 581년에 통일 왕조를 연 수나라는 이 대(37년)를 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아버지 이연과 함께 진양 땅에서 거병한 지 한 해 만에 중원을 제패한 당 태종을 두고 모택동은 일찍이 “예로부터 최고의 군사 전략가는 이세민이고 그다음은 주원장(명 태조)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당 태종은 격렬한 실전 경험이 낳은 걸출한 군사 전문가였던 동시에 ‘태평성대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정관의 치세를 꽃피운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는 명재상 위징과 같은 반대파까지 끌어안는 드넓은 포용력으로 간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하고, 과거제를 정비해 재능과 덕행을 고루 갖춘 재야의 인재들을 공정하게 등용한 용인술의 대가로서 동양사에서 가장 추앙받는 제왕의 전범이 되었다. 임용하면 의심하지 않고 임무를 맡기면 책임을 지웠으며 한족과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등용했으며 엄격한 인사고과로 무능한 자를 내쫓고 능력 있는 자를 승진시켰으며 나이 들어 물러나는 자를 예우하였다. 또한 “법이란 짐 한 사람의 법이 아니라 천하의 법이다.(282쪽)”라면서 황제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임의로 법률을 재단하지 않으며 법치의 기틀을 다졌고, 요역과 부세를 줄이고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게 하는 농본 정책을 펼쳐 ‘세민’이라는 이름 그대로 ‘세상을 구제하고(濟世) 백성을 평안(安民)하게’ 하였다.
 
 
■ 놀라운 포용력과 뛰어난 용인술로 화합 통치의 달인이 되다
 
이세민 대제(大帝)는 중국의 걸출하고 영명한 군주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고도의 지혜로 정성스럽고 신중하게 제국을 다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중국의 ‘제2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반고(盤古)의 천지 창조 이래, 이세민 대제는 중국의 제왕들 중에서 그 자신의 공훈과 업적 그리고 미덕으로 중국인들에게 최초로 진심으로 칭송과 숭배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이후 모든 제왕들의 규범이 되었다. —역사학자 보양(柏楊), 『중국인사강(中國人史綱)』
 
이 책은 1장부터 5장까지에서 수나라 말기의 천하 대란과 무술과 병법에 뛰어난 청년 이세민, 진양 기병과 당나라 창업, 유무주·왕세충·두건덕·유흑달 등 지방의 군웅 세력 제압과 칠년간의 대륙 평정 과정, ‘현무문의 변’과 당 태종 즉위에 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스무 살의 청년 이세민은 수나라 양제를 타도하고자 태원 지방 군사령관인 아버지 이연을 설득해 617년 진양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몇 달 사이 장안을 점령한 후 618년 불과 한 해 만에 당나라를 세우고 아버지 이연을 당 고조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이연은 이세민이 정권 창출에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도 맏아들 이건성을 황태자로 삼아 금문(禁門)을 피로 불들인 골육간의 싸움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건성은 이원길과 함께 이세민을 제거하려 모의하지만 도리어 이세민이 선수를 쳐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 곧바로 627년에 제위를 이어받아 즉위하니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당 태종이 집정한 정관 초기에는 예전의 동궁(이건성)과 제왕부(이원길)의 적대 세력이 여전히 존재했고 각지에도 불안정한 요소가 남아 정국의 안정을 보증할 수 없었다. 당 태종은 적대 세력을 관용하는 정책을 채택해 적대감을 없애고 많은 사람을 얻었으며 민심을 수습했다. 이러한 당 태종의 놀라운 포용력은 황태자 이건성을 섬기던 장수 설만철과 풍립을 용서하며, “섬기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친 것을 가지고 죄를 주지는 않겠다.(136쪽)”고 한 그의 말에 잘 드러난다. 또한 은태자 건성을 융숭하게 예장해 현무문의 변 이후 매우 격렬했던 진왕부와 동궁, 제왕부 사이의 반목을 해소하고 통치 집단 내부의 갈등을 완화한 ‘화합 통치’로 당나라 왕조를 공고히 했다. “창업보다는 수성(守成)이 더 어렵다.(190쪽)”고 한 당 태종다운 통치 리더십이었다. 더불어 “천하를 치세하는 데는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233쪽)”는 화합 통치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당 황실은 관롱(關隴: 관중 지방 출신 지배층) 집단에서 나왔지만 전국을 통치하기 위해 위징의 건의에 따라 산동의 서인 출신 인재들을 발탁한 것이 좋은 예다.
당 태종의 포용력과 용인술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미담으로까지 전해 오는 ‘이전의 원수’ 위징을 임용한 일이다. “위징은 젊은 시절 보잘것없는 선비였는데, 수나라 말기의 풍운과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 속에서 몇 차례 주인을 바꾸었고, 후에는 건성을 섬겨 진왕(이세민)을 제거할 비책을 바쳤다. 현무문의 변으로 위징은 계단 아래의 죄수가 되었다. 당 태종은 그의 출중한 재능을 흠모해 사사로운 원한을 갚지 않고 공정한 마음을 내보였다. 처음에는 치국을 이루기 위해서였지만 날이 갈수록 가까이하고 중하게 대했다. 맨 처음 간의대부에 임명했다가 나중에 시중으로 승진시켜, 7년이 안 되는 사이에 원한이 깊은 원수에서 신하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갔다. 이처럼 담대한 도량은 봉건 제왕이 보이기 힘든 것이다.(204쪽)”
 
 
■ 재능과 덕을 고루 갖춘 현능한 인재로 태평성세를 이루다
 
이세민은 부지런하게 정무를 보았고 간언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인재와 적절한 때를 철저하게 활용해 역사에 빛나는 태평성대 ‘정관의 치’를 열었다. —역사학자 레이 황
 
7장에서는 당 태종이 재능과 덕을 고루 갖춘 현능한 사람을 임용하고 과거 제도를 완비하고 진사과를 확대해, 재능에 따라 관리를 임용해 선비에게 벼슬의 길을 열어 주고, 서족 지주에게 정치 참여와 권력 장악의 기회를 주어 정관의 치세를 이루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우선 당 태종은 “인재를 알아보려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아울러 밝혀야 한다.(194쪽)”고 했다. 예컨대 장손무기를 “혐의를 잘 피하며 대응이 민첩하고 신속하다. 그렇지만 군대를 지휘해 공격하고 전투하는 데는 뛰어난 바가 없다.”라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재를 임용하려면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야 한다.(194쪽)”고 강조했다. 당 태종이 잡무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방현령과 두여회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모략과 결단을 잘하는 그들의 장점을 치켜세운 게 좋은 예이다.
 
“비천한 사람이라 하여 임용하지 않은 일이 없고, 멸시받는 사람이라 하여 존중하지 않은 적이 없다.(201쪽)”라는 당 태종이 남긴 유명한 명언처럼 인재 임용의 길을 크게 확대했다. 먼저 사족지주와 서족 지주를 아울러 발탁했고, 관료와 평민도 함께 발탁했다. 한족과 오랑캐도 아울러 임용했다. 당 태종은 중화를 중시하는 옛사람들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이적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 민족 정책으로, 가령 돌궐족 아사나사이, 철륵족 추장 계필하력 등을 장수로 삼았다.
당 태종은 줄곧 태평 시대의 인재는 재능과 덕행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 인재를 선발했기에 치세를 이룬 것이다. 일찍이 소원했고 원수였던 위징과 마주를 중용했던 것은 바로 재능과 덕행을 두루 갖춘다는 기준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 납간(納諫)의 소통 정치와 공치(共治)로 제왕의 모범이 되다
 
우리는 늘 위징이 직언을 한 용기를 칭찬한다. 하지만 당 태종 이세민이 납간을 원하지 않았다면, 설령 위징의 담이 열 개였을지라도 그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감히 직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진핑 중국 부주석
 
이 책은 8장에서 당 태종이 아랫사람과 소통하는 납간(간언 수용)과 만인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치가 정관의 치세를 보증한 기본 정책이었음을 보여 준다.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반드시 맑은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하오. 군주가 허물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충신에 의지해야 하오. 공들은 매번 정무를 보면서 백성들에게 이롭지 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직언하고 간쟁하도록 하시오.(240~241쪽)” 당 태종의 성심성의가 이처럼 절절하고 아랫사람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해 군신이 함께 국사를 토론하자 간쟁이 크게 번성했다. “위로는 재상과 어사부터 아래로는 현의 관리와 소리까지, 이전 진왕부 출신 관료든 신진 관료든, 심지어 궁정의 비빈까지 어느 누구나 과감하게 직언하고 절실히 간쟁(241~242쪽)”했다.
17년 동안 300번 이상이나 직간을 올린 것으로 유명한 위징은 거리낌 없이 직간하고 이치에 따라 힘껏 쟁론했으며 때로는 정리와 체면도 살피지 않아 황제를 매우 곤란하게 했다. 위징의 간언을 듣다 품 안의 매가 질식사한 적도 있자, 당 태종은 “언젠가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 버릴 테다.”라고 했다. 황후 장손씨가 말했다. “첩은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위징이 곧은 것은 폐하께서 밝기 때문입니다.(242~243쪽)” 당 태종은 이 말을 듣자마자 노여움을 풀고 즐거워했다.
확실히 군주와 신하가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했던 것은 당나라 초기에 ‘천하 대치’를 실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물고기와 물의 만남과 같아야 천하가 안정될 수 있소. 짐이 비록 명철하지 못하나 다행스럽게도 공들이 자주 바로잡아 주고 보완해 주니, 직언과 곧은 충의에 의지해 천하태평을 이루길 바라오.(253쪽)” 이렇게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와 같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당 태종은 군주와 신하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는 ‘공치(共治)의 정치관’을 제시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제도적으로 언로를 보증했다. 그래서 낮은 벼슬아치도 조정에 참여시켜 언로를 넓히고, 무조건 황제의 뜻에 따라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며, 간관의 역할을 중시해 중임을 맡기고, 직간과 비방의 한계를 구별하며 정관의 치세를 완성해 나갔다.
 
 
■ 백성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태평성대의 모델이 되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청명정치(淸明政治)’의 본보기로 일컬어진다. 오늘날의 ‘호온신정(胡温新政: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의 새 정치)’은 옛날의 ‘정관의 치세’다. 오늘날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인민들과 동고동락하고, 옛날에는 이세민이 굶주린 백성들이 팔아 버린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백성을 근본으로 하면 천하의 마음이 돌아온다.(以民爲本, 天下歸心)”라는 하나의 도리를 공통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인민일보》 2006년 3월 15일 자
 
이 책 6장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경제에서는 휴양생식에 힘쓰고 정치에서는 안정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이 ‘정관의 치’의 주요 내용이었음을 다룬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시 「칠덕무(七德舞)」에서 당 태종을 이렇게 노래했다. “스물넷에 천하를 평정하고, 스물아홉에 황제에 오르고 서른다섯에 치국안민을 이루었네.” 그런데 후세 역사가들이 ‘태평성세의 모델’이라고 추켜세우는 정관의 치를 이루기까지는 왜 이렇게 빨랐던 것일까?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정책 덕분이었다.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은 중농 정책을 펼쳐 태평성대의 문을 열었다. “백성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균전제를 실시하고 황지 개간을 장려하며, 조용조법을 실시하고 요역과 부세를 경감하였다. 또 농잠을 장려하고 농시를 빼앗지 않고,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 의창을 설치하였으며 한인 귀환과 혼인을 장려하고 궁녀를 석방해 인력과 재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농업 발전의 근본인 수리 시설을 확충하였다.(162~179쪽)”
 
 
■ 현대의 지도자들이 배우는 화합과 통합, 공생 정치의 리더십으로 되살아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8장은 당 태종과 정관의 치를 역대의 평가와 더불어 총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당 태종과 정관의 치에 대한 역대 평가를 덧붙임으로써, 지난 천 수백 년간 후인들이 당 태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군주상이나 이상적인 군신 관계는 어떠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는 당 태종에 관한 수많은 드라마, 연극, 문학, 논문이 쏟아져 문화대혁명으로 상처를 입은 중국의 자존심을 달래 주었다.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흔히 당 태종 외에 강희제, 마오쩌둥 등인데 모두 다 영토를 넓힌 공통점이 있다. 더구나 당 태종은 한족 역사상(진, 한, 수, 당, 송, 명) 가장 거대한 영역을 지배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정치라는 ‘정관성세’를 열었고 화합과 통합, 공생의 질서가 굳건했던 국가를 세웠기에, 지금도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중국에서는 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다.
G2 시대, 외환 보유고 1위, 소득 2만 달러 이상이 6000만 명 등등. 중국인들이 이렇게 경제적 콤플렉스를 떨쳐내는 순간마다 과거에 성세를 구가했던 ‘정관성세의 영광’과 ‘당 제국의 DNA’가 밖으로 솟구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국의 국력이 커질수록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 등 중국의 지도자들은 본받을 만한 ‘조화와 화해’ 즉 ‘공치 리더십’의 전형으로 당 태종과 그의 통치책인 『정관정요』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이다.

목차

1장 천하 평정의 뜻을 품은 청년 이세민
2장 진양 기병으로 당나라를 열기 시작하다
3장 7년간의 통일 전쟁으로 중원을 평정하다
4장 현무문의 변으로 황위 계승권을 얻다
5장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다
6장 휴양생식과 안정으로 태평성대 ‘정관의 치’가 꽃피다
7장 현능한 인재로 정관의 치세를 이루다
8장 간언을 구하고 받아들여 언로가 확대되다
9장 정관의 법제가 정관의 치를 보증하다
10장 후왕을 분봉하고 사족의 족보를 수정하다
11장 동돌궐, 토욕혼, 고창을 평정해 서북 변경을 통일하다
12장 화친, 단결, 덕화의 진보적 민족 정책을 펼치다
13장 전쟁을 그치고 문치에 힘쓰다
14장 역사를 성쇠의 거울로 삼다
15장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숭상하다
16장 후계자 계승 문제: 이승건을 폐립하고 이태를 축출하고 이치를 책립하다
17장 당 태종의 궁정 생활과 취미
18장 당 태종과 정관의 치에 대한 평가
후기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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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자오커야오

푸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중국고대사를 전공했다. 저서로 『당태종전』(공저), 『당현종전』(공저), 『한당사론집(漢唐史論集)』 등이 있고, 논문으로 「전한의 한전과 사릉 정책의 관계(论西汉的限田与徙陵政策的关系)」, 「한대의 천하 효치(论汉代的以孝治天下)」, 「위진남북조의 오벽(论魏晋南北朝的坞壁)」, 「당 전기의 불교 세력과 정치 투쟁」, 「당 태종의 농본 사상과 중농 정책」, 「『씨족지』와 당 태종의 관롱문벌관」 등이 있다.

 

쉬다오쉰

1939년 저장성(浙江省)에서 태어나 푸단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 당대사를 전공했다. 푸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중국당사학회(中國唐史學會)와 중국역사문헌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당태종전』(공저), 『당현종전』(공저), 『정관정요 금주신역(貞觀政要今注新譯)』 등이 있고, 논문으로 「당태종의 군사 모략과 작전 예술」, 「위징과 당 초기의 정치」, 「경학과 사학의 변화 발전」 등이 있다.

 

김정희 옮김

고려대학교에서 중국 중세사를 전공하여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민족문화추진회(현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을 졸업했다. 성균관대학교, 아주대학교, 수원대학교 등의 강사와 고려대학교 연구조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중국의 변강 인식과 갈등』(공저), 『고대 환동해 교류사: 발해와 일본』(공저)이 있고, 역주서로 『역주 당육전』(공역), 『역주 당률소의』(공역)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민족과 국가: 중국 다민족 통일 국가 사상의 계보』, 『마지막 황제: 수 양제, 송 휘종, 명 숭정제』, 『여인천하: 여후, 여제 무칙천, 양귀비』,『당대사의 조명』(공역), 『세미나 수당오대사』(공역), 『중국 역사의 발전 형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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