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 옮김 전영애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1년 8월 12일 | ISBN 978-89-374-8383-7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50x190 · 284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말은 잘못이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

음지를 얘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 파울 첼란

그가 유대인이고, 그의 언어가 독일어라 할지라도,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 존 펠스티너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참혹한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유대인으로서, 그 고통을 아름답고 밀도 높은 시어로 표현해 낸 20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은 198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첼란의 시에 관한 이론서를 펴낸 전영애 교수가 30여 년 전 독일에서 번역해 놓은 시들을 2001년부터 10년 동안 틈틈이 다듬어 내놓는 것이다.
전후 독일 문단에서는 아우슈비츠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서정시 자체를 쓸 수 없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에게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해 시적으로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와 문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던 첼란은 자신이 겪은 참혹한 시대를 극도로 상징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시어로 그려 내며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를 쓰는 데 성공한다. 첼란은 전후 독일 문단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1958년 브레멘 문학상, 1960년 뷔히너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시선집에는 첼란의 시집 아홉 권 『양귀비와 기억』(1952), 『문턱에서 문턱으로』(1955), 『언어창살』(1959),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1963), 『숨결돌림』(1967), 『실낱태양들』(1968), 『빛의 강박』(1970)과 유고 시집 『눈[雪]파트』(1971), 『시간의 뜨락』(1976)에서 추린 시 118편과 그의 시론을 엿볼 수 있는,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문과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유일하게 남긴 산문인 「산속의 대화」가 실려 있다. 특히 산문 「산속의 대화」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첼란 시집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첼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시선 내에서도 작품을 추려 「죽음의 푸가」를 비롯한 대표 시를 맨 앞에 실었다. 다소 난해한 첼란의 시를 우리말에 최대한 밀착시켜 옮겼으며, 유난히 함축적인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석을 충실히 달았다.

편집자 리뷰

■ 적의 언어로 시를 써야 했던 고통의 시인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무덤 근처」에서

첼란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의 기억을 한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비극적 운명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처했던 가장 근원적 비극은 자신의 인생에 가혹한 상흔을 남긴 가해자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데 있었다. 시인이 태어난 부코비나 지방은 이전에 합스부르크 왕령이었던 곳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시인에게 독일어는 모국어인 동시에 자신과 부모, 친구를 죽인 ‘살인자들의 언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시는 모국어로만 쓸 수 있다고 믿었던 첼란은 결국 혈족을 죽인 자들의 언어이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언어, 끔찍한 어둠을 지닌 이 잿빛 언어를 자신의 시어로 택한다. 시인은 자신에게 가해를 입힌 이들의 언어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물론 구원을 염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에 봉착했음에도, 끝까지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죽음의 푸가」에서
   
첼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던 ‘아우슈비츠’를 가장 구체적으로 그려 낸 시가 바로 그의 대표작 「죽음의 푸가」이다. 그는 이 시에서 죽음을 ‘푸가’라는 음악 형식을 빌려 유희적으로 노래하며, 실재했던 끔찍한 ‘죽음’을 서정적인 ‘은유’에 담아낸다. 시인은 자신들이 판 무덤 앞에 꿇어앉아 총살당하고, 죽어 가는 동료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했던 참혹한 유대인 포로수용소의 기억을 “검은 우유”를 마시고 “공중”과 “땅”에 무덤을 파며 “무도곡”을 연주하는 시적 상황으로 형상화한다. 시인은 이처럼 자신에게 상처 입힌 이들의 언어로 고통을 감당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한계를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한 차원 높은 경지를 이룩해 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 비극의 시대를 향해 외친 ‘소리 없는 아우성’    

첼란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극한의 고통을 직시하여 군더더기 없이 분명한 언어로 형상화시킨다. 고통의 맨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시어들 때문에 아픔은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너희 나의 나와 더불어 불(不)
구(具)된 말들, 너희
나의 똑바른 말들.
(중략)
우리 동요를 부르리, 그걸
네가 듣고 있어, 그 동요
인(人 )들과 간(間)들이 있는, 인간들이 함께 있는, 그래, 그
뒤엉킨 덤불과
눈 한 쌍이
거기 함께
눈물- 또-
눈물로 함께 있는 그 동요를.

—「…… 좔좔 샘물이 흐른다」에서
 
암호문처럼 은유가 집약되어 있는 그의 파격적인 시어는 후기로 넘어갈수록 ‘파괴’되고 ‘해체’되어 간다. 하지만 침묵, 생략, 비약 등으로 조각 나 “불구”가 된 말들은 실제의 부정적인 시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똑바른” 말이다. 이를테면 위의 시에서 ‘인’과 ‘간’으로 조각 나 있는 낱말 ‘인간’은 파시즘 시대 독일에서 인간에게 가한 일을 연상시킨다. 첼란에게 언어와 현실은 늘 불가분 관계에 놓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점 조각 나고 불안정해졌던 시어처럼 그의 의식도 점점 흐려지고 분열되어 갔으며, 그는 결국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시대를 지나며 겪은 쓰라린 고통을 침묵의 시로 표현했지만 마지막까지 구원을 얻지 못한 이 비운의 시인은, 결국 생을 마감하며 스스로 침묵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오로지 진실한 손만이 진실한 시를 쓴다. 나는 손도장과 시 사이에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도 없다고 본다.”(파울 첼란) 죽음의 문턱에 선 이가 남긴 이 손도장은 그 어떤 시들보다 묵직하고 진중하며 아름답다. 거기엔 극도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시들은 지금 각자의 ‘아우슈비츠’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있을 고된 인생들에게 그가 헌정하는 슬픈 진혼가다.

목차

죽음의 푸가  17
양귀비와 기억  45
문턱에서 문턱으로  69
언어창살  101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  133
숨결돌림   169
실낱태양들   185
빛의 강박   193
눈[雪]파트   203
시간의 뜨락   213
산문들   221
파울 첼란과 그의 시 세계   259
 
옮긴이의 말   277
작가 연보   281

작가 소개

파울 첼란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체르노비츠는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으로 독일어를 쓰는 지역이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체르노비츠는 유대인 거주 지역(게토)으로 확정된다.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첼란의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던 그는 부모의 처참한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또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간다. 종전 후 그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출판 일을 하다가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1948)를 발표한다. 그리고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 강에 몸을 던져 1970년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전영애 옮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이며 여백서원과 괴테의 집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연구원,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 재단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유서 깊은 바이마르 괴테 학회에서 수여하는 괴테 금메달을 동양 여성 최초로 수상했다.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파울 첼란의 시』, 『독일의 현대문학―분단과 통일의 성찰』, 『괴테와 발라데』, 『맺음의 말』, 『시인의 집』,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등 많은 저서를 국내와 독일에서 펴냈다. 옮긴 책으로 『장화 신은 고양이』(동화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나누어진 하늘』, 『파우스트 I, II』, 『괴테 시 전집』, 『괴테 서·동 시집』, 『나와 마주하는 시간』, 『은엉겅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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