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Der Besuch der alten Dame & Die Physiker
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옮김 김혜숙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1년 2월 28일
ISBN: 978-89-374-6265-8
패키지: 반양장 · 신국변형판 132x225 · 308쪽
가격: 12,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265
분야 세계문학전집 265
부조리한 현실을 희극으로 재현해 낸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현대 사회의 병폐와 개인의 좌절을 고발하는 위악적인 풍자와 통렬한 해학
전후 독일 연극의 부흥을 이끌어 낸 주역 뒤렌마트의 대표작들
▶ 뒤렌마트는 극장에 모인 관객 자신의 모습을, 그들의 모든 변덕, 무지, 악습,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현실 인식과 영민한 재능, 오랜 철학적 천착, 그리고 세월을 통해 숙성된 능력을 가진 철학자-시인이었다.—아서 밀러
▶ 뒤렌마트의 상상력 풍부한 작품들은 우아한 풍자 정신으로 조율해 낸 묵시적인 경고와도 같다.―《뉴욕타임스》
불온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으로 현대 시민 사회의 허상을 정면에서 고발한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대표 희곡을 모은 『뒤렌마트 희곡선』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65)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최대의 성공작이기도 한 「노부인의 방문」과 「물리학자들」로, 충격적인 설정과 기괴하고 과장된 전개, 인간 본성을 그대로 노출한 인물 군상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괴리를 예리하게 파헤쳐 보여 준다. 뒤렌마트는 전후 독일어권 연극의 중흥을 일으켰다는 평을 얻은 대표적인 현대 극작가로, 특별한 개성이 빛나는 희곡 외에도 탐정 소설, 방송극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드러내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개인이 소멸되는 사회’라고 파악한 뒤렌마트는 작품 안에서 복지에 대한 환상, 부조리한 법의 압제, 과학 기술과 윤리의 문제 등을 차례로 다루며 위악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시민 사회의 이상적인 청사진을 눈앞에서 전복한다. 세계적인 대부호인 노부인이 쇠락한 도시를 찾아와 막대한 기부금을 약속하며 그 대신 도시 주민들에게 단 한 명의 살해를 요구한다는 설정의 「노부인의 방문」, 정신 병원에 스스로를 격리시킨 세 명의 물리학자들을 통해 냉전 체제의 모순과 과학 기술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극단적인 형태로 질문하는 「물리학자들」은 그런 그의 작품 세계가 가장 명료하게 투영된 작품이라는 평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뒤렌마트의 희곡은 고전적인 의미의 비극이 의미를 잃어버린 복잡하고 불투명한 오늘의 세계를 희극으로 묘사하는 ‘희비극 기법’을 도입해 개인의 비극을 희극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약적인 상황에서 더욱 강렬한 비애를 느끼게 하고 왜곡된 세계상을 통해 반대로 우리 사회의 진실을 비추는 이 ‘불편한 희극’은 영원히 강렬한 시의성을 가지고 책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와 자신에 대해 건전한 회의를 갖게 하는 의미 있는 고전이 될 것이다.
■ 우리가 믿었던 세계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충격적인 폭로_「노부인의 방문」
몰락해 가는 소도시 귈렌. 한때 ‘행복 성공 제련 공장’이 도시의 재정을 윤택하게 하는 가운데 평화를 누리며, 괴테가 묵어 가고 브람스가 4중주를 작곡한 적이 있을 만큼 문화적으로도 풍요했던 이 ‘일급 도시’는 오늘에 이르러 공장은 문을 닫고 도시 전체가 저당 잡히는 운명에 처한다. 그런 귈렌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호 클레어 자하나시안 여사가 찾아온다. 자선가로도 유명한 그녀는 원래 귈렌 출신으로, 시민들 모두 노부인의 기부를 기대하며 환영회를 준비한다. 그리고 축하연에서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막대한 기부액을 밝힌 노부인은 오직 한 가지의 조건을 내건다. ‘자신을 버리고 사생아를 낳게 한 남자를 죽일 것.’ 누가 살해해도 상관없으며 언제 살해해도 상관없다. 다만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귈렌에 머무를 것이며 그가 죽는 순간 수표를 써 주겠다는 노부인의 말에 시민들은 모두 거부감을 표하며 대상으로 지목된 남자 일을 보호하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 전역에서 노부인의 기부를 믿고 누군가가 일을 죽여 줄 것을 기대하며 빚을 끌어다가 그간 누리지 못한 풍요로운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도시의 부흥을 건 살인 교사라는 그로테스크한 설정으로 군중과 그 속의 개인, 문명사회에 대한 믿음과 그 배신을 그린 『노부인의 방문』은 풍요의 욕망 앞에 무력한 인간과 현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여 당시 많은 관객에게 큰 충격을 안기는 한편 뒤렌마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집사 그래서 이제 당신은 정의를 원하십니까, 클레어 자하나시안?
클레어 자하나시안 내게는 정의를 향유할 능력이 있어. 누군가 알프레드 일을 죽인다면 귈렌에 10억을 내놓지.
(중략)
일 마녀 같으니! 그 따위를 요구할 순 없어! 그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단 말이오!
클레어 자하나시안 그 시절은 지났지,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 일 씨. 콘라츠바일러 숲도, 페터네 헛간도, 과부 볼네 비좁은 침실도, 당신의 배신도. 이제 우린 늙었어요, 두 사람 다. 당신은 연락했고, 내 몸은 외과 의사의 칼 아래 토막 났어요. 이제 나는 우리 두 사람에 대해 담판을 짓겠어요. 당신은 우리 삶을 선택했고, 내 삶을 결정지었죠. 당신은 시간이 멈추었길 바란다고 했어요. 바로 오늘, 우리의 젊은 시절 숲에서요. 무상한 일이었죠. 그런데 이제 내가 시간을 멈추었어요. 그리고 나는 정의를 원해요. 10억짜리 정의를.(53~54쪽)
이 작품에서 노부인이 도시에 내건 기부금은 자신을 버린 남자 일의 목에 건 현상금으로, 이후 시민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조금씩 변모해 간다. 처음에는 동지이자 응원자의 고결한 눈빛으로, 그리고 점차 자신들의 지겨운 가난을 종식시켜 줄 사냥감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특히 등장인물 중 하나인 교장이 비통함에 가득 차 속삭이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힘이 없어요. 그걸 알기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두렵소, 일 씨. 당신이 그랬든 두려워요. 아직은 압니다. 우리에게도 한 번은 저런 노부인이 오게 되겠지요. 언젠가는 말이오. 그러면 지금 당신이 겪는 일을 우리도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직은 알고 있어요.”(115~116쪽)라는 고백에서 우리는 인간 사회의 본질을 관통하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를 바라보는 분명하고 비판적 시선과 섬뜩하고 반어적인 상상력으로 점철된 뒤렌마트의 이러한 작품들은 책장을 덮은 후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전에 바라보던 것과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할 것이다.
■ 두려움과 전율 가운데 터지는 웃음, 비극적 상황과 해학이 만들어 낸 뒤틀린 희극_「물리학자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고위층 인사들을 수용한 정신 병원 세리제. 그곳에는 특이한 병동이 하나 있다. 바로 ‘물리학자들’을 수용하는 병동이다. 저마다 자신을 뫼비우스, 아인슈타인, 뉴턴이라고 착각하는 세 명의 정신병자가 지내는 이 병동에서 간호사들이 연쇄적으로 교살당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을 파헤치려는 수사 반장과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있는 병원 측 사람들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와중, 세 명의 물리학자들은 서로가 미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왜 자신이 정신 병원에 들어왔는지를 고백한다.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물리학적 발견과 그것을 노린 첩보 활동,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충격적인 반전.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성공한 독일어권 희곡이라는 평가를 받은 뒤렌마트의 또 다른 대표작 『물리학자들』은 냉전 체제로 인한 갈등이 가시화되어 있던 당시 국제 정세를 반영한 작품으로,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책임 문제에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뒤렌마트는 현대 사회가 너무나 복잡하고 뒤틀려 있으며 무정형의 사회로 변화했기 때문에 오늘날 고전적인 비극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현대 산업 사회에 어울리는 희곡 형식은 ‘비극적 코미디’, 즉 ‘희비극’밖에 없다고 판단, 사회에서 더 이상 개별적인 고유성을 가질 수 없게 된 개인의 비극을 웃음이 나올 만큼 과격한 상황 아래 묘사했다.
뉴턴 내 과제는 중력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지 여자를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수사 반장 알겠습니다.
뉴턴 거기다 나이 차도 엄청났고요.
수사 반장 그렇지요. 선생은 이백 살도 넘었을 테니.
뉴턴 (놀라서 반장을 바라본다.) 어째서요?
수사 반장 그야, 뉴턴이라면…….
뉴턴 바보가 되신 겁니까, 반장님, 아니면 그런 척하시는 겁니까?
수사 반장 이것 보시오…….
뉴턴 내가 뉴턴이라고 정말로 믿으시는 겁니까?(192쪽)
이 작품은 전후 사회 전반을 사로잡은 광기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를 정신 병원에 가둔 세 정신병자의 정체는 원래 자신이 발견한 이론의 위험성을 절감하고 정신 병원에 은거한 한 명의 천재 물리학자와 그런 그의 이론을 각각 자국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자 첩보 요원으로 잠입한 두 명의 물리학자다. 그들은 솔로몬 왕의 음성이 들린다고 떠들어 대며 아인슈타인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뉴턴인 양 중력 문제를 논하며 한가로운 요양 생활을 즐기지만 곧 그들이 정상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정상인이 광인을 흉내 내고 광인이 정상인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게 되는 이 모든 과정은 지극히 비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이토록 과장된 전개에서 느껴지는 우스꽝스러움이 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 우리 모두가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의 이야기로, 그 가운데 놓인 부조화가 냉소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 어느 투쟁의 역사, 사회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 행동한 지성 뒤렌마트
뒤렌마트가 작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히틀러 정권이 몰락한 다음 해였고 전 세계를 동과 서로 나눈 냉전 시대의 서막이 울린 때였다.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격변기에 사회를 잠식했던 문명에 대한 절망과 인간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는 평생 ‘반시민 사회적’ 성격을 견지하며 작품 활동을 해 나갔는데, ‘투쟁적인 작가, 눈치 보는 일이 없는 작가, 서구에서 가장 혹평을 받는 작가’라는 평판을 얻으며 실제로도 눈치 보는 일 없이, 혹평을 감수하며, 투쟁을 계속했다. 1969년 베른 주 대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연설을 통해 문학상 제도와 문화 정책, 노동자 정책 등을 비판하여 청중을 당혹시켰고, 받은 상금을 스위스 역사에 비판적인 역사 연구자, 스위스 사회를 비판하는 잡지 편집자, 대체 복무제를 주장하는 정치가 등에 전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문학상 수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투쟁적 성향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뒤렌마트가 작품에서 보여 주는 세계상은 하나같이 왜곡되어 있고,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하고, 거부감을 주고, 모욕감까지 느끼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묘사하는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음영을 극대화하여 평소에 ‘군중’으로서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의 진상을 명료하게 비추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의 논리 아래 개인의 희생을 말없이 강요하는 사회라는 ‘얼굴 없는 가해자’,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가운데 증폭되어 가는 문제들, 그 안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개별자의 절망. 뒤렌마트는 고전적 의미의 비극이 불가능한 현대 사회에 대해 언명하면서 “모두가 그것에 책임이 없고, 모두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말한다. 이 문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나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말이다. 철저한 관료제 체제 아래에서 각자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개인이 행위의 결과를 예상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한 결과는 결국 인류 최대의 비극이라 불리는 2차 세계대전과 잔혹한 학살극이었다. 뒤렌마트는 이러한 논리가 오늘의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치명적인 위험을 똑바로 직시한 작가다.
뫼비우스 결코 감수해서는 안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류의 멸망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세계는 이미 소유한 무기만으로도 피해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내 연구 결과가 불러올 피해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난 이런 고심 끝에 행동한 것입니다. 나는 가난했어요. 아내와 세 아이가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는 명성이 손짓했고, 산업계에서는 돈이 유혹했습니다. 두 길 모두 너무 위험했어요. (중략) 책임감이 내게 다른 길을 강요했습니다. 학문적인 경력을 포기했고, 돈벌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가족을 운명에 내맡겼습니다. 그러곤 어릿광대 모자를 선택했어요. 솔로몬 왕이 나타나는 양 굴었고, 그러자 곧 정신 병원에 갇혔습니다.(257쪽)
사회 안에 함몰되는 개인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의심할 것을 요구한 작가,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도 일관된 삶의 자세를 보이며 투철하게 싸워 나간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타계한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경각을 일깨우며 우리를 놀라움과 전율로 환기시키는, ‘여전히’ 문제적인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