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l’ignorance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0년 12월 15일
ISBN: 89-374-0363-3
패키지: 양장 · 46판 128x188mm · 204쪽
가격: 8,000원
분야 외국문학 단행본
밀란 쿤데라의 화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보헤미안 연인들의 랩소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20년 후의 이야기
발표하는 작품마다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독자들을 열광시키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최신작 『향수(鄕愁)』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불어로 씌어진 이 소설은 올해 초 프랑스보다 먼저 스페인에서 출간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스페인에서는 발간과 동시에 1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고, 비평가들로부터 \”쿤데라가 옛날의 활력을 되찾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보헤미아 연인들의 랩소디
『향수(鄕愁)』는 1989년 동구권 붕괴 이후 체코의 민주화 덕분에 20년 만에 조국을 찾은 두 남녀의 재회를 발판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모색한 작품이다. 이는 공산 정권의 붕괴 이후 20여 년 만에 조국을 방문했던 쿤데라 자신의 체험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자신의 역사적 체험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율리시스의 귀향에 비유하고 있다. 오랜 항해를 끝내고 율리시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 20년이라는 세월은 그가 그리워했던 대상 이타카와 율리시스 사이에 무지의 벽을 쌓아놓았다. 결국 율리시스가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은 지금의 이타카가 아니라 그가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일 뿐이다. 『향수』의 남녀 주인공도 해외 망명이란 각자의 오디세이아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옛친구와 가족들은 그들이 살아왔던 세월과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망명자들은 다시 그들 기억 속의 고향을 찾아 새로운 항해를 떠나게 된다. 이 작품의 원제가 \’무지(l\’ignorance)\’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쿤데라는 그의 해박한 언어학적 지식을 빌려 향수 즉 노스탤지어의 어원적 의미가 무지l\’ignorance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워하는 것과 자신 사이의 몰이해 혹은 무지 때문에 인간의 향수, 노스탤지어는 치유될 수 없는 숙명이 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20년 후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보헤미아 연인들의 랩소디\’ 혹은 \’잃어버린 유년에 대한 향수와 잊혀진 첫사랑에 대한 욕망을 간직한 채 떠도는 현대인의 오디세이\’로 정의될 수 있는 이번 작품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세 주인공 테레사, 토마스, 사비나가 되살아난 듯한 세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레나와 조제프, 밀라다가 그들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프랑스, 덴마크 등으로 망명을 떠났던 이들은 20년 동안 자신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국 땅 프라하를 방황한다.
1989년 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마침내 프라하도 자유화를 맞게 된다. 반세기에 걸친 냉전이 낳은 현대의 유목민들은 그들이 꿈꾸던 귀향을 시작한다.
파리에 망명해 살고 있던 이레나는 귀향을 주저한다. 20년 전 남편과 딸아이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그녀는 고향에 관한 두 가지의 꿈에 시달려왔다. 하나는 가족과 조국을 등진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한 무리의 여자들. 그들이 입혀주는 옷은 곧 죄수복과 같이 그녀를 조른다. 다른 하나는 시시때때로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는 고국의 아름다운 수풀, 그곳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 두려움과 그리움 이 상반된 감정 속에서 그녀는 귀향을 결정하게 된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그녀는 한 남자를 알아본다. 그의 이름은 조제프. 망명 전 프라하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들은 서로 호감을 가졌었다. 그 남자 역시 뒤늦게나마 체코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조제프는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덴마크로 망명했었다. 몇 년 전 아내를 잃은 그는 아내의 유언에 따라 고향을 방문하기로 한다. 파리의 공항에서 아는 체했던 그 여자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아는가? 고향에서 조제프를 기다리는 것은 공산 정권의 협력자였던 형과 그의 아내이다. 아버지의 유산과 자신이 두고 떠난 물건들을 차지한 형 부부에게 그는 여전히 가족을 버리고 떠난 도망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자로 만들며, 자신들의 힘겨웠던 삶을 인정해주길 바란다. 형에게서 돌려 받은 자신의 물건들 가운데 일기장이 눈에 띈다. 거기에는 사춘기 시절 자신의 방황이 적혀 있다. 한 소녀. 사랑에 눈을 뜬 그는 그녀에 대해 맹목적인 질투심을 느꼈으며 자신을 두고 학교 친구들과 스키 캠핑을 가는 그녀를 저주했다. 이 일기장에 있는 치기어린 조무래기와, 이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자신이 어떻게 동일한 사람일 수 있을까? 일기장의 그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일기장 속의 주인공인 밀라다는 이레나의 친구이다. 그녀의 귀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밀라다뿐이다. 이십 년 동안 밀라다는 변한 게 없다. 둥근 얼굴에 곱고 검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한쪽 귀를 덮고 있다. 이레나에게서 조제프의 이름을 들은 그녀는 회상한다. 오래 전, 학창시절에 만났던 한 소년. 그는 학교 행사인 스키 캠프에 가야만 하는 자신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그녀는 커다란 상처를 받고 죽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캠프장에서 벗어나 눈덮인 숲속에서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끔찍하게도그녀는 동상을 입은 왼쪽 귀를 잘라내야만 했다. 그후 그녀는 언제나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리고 살아가게 된다.
한편 이레나와 조제프는 만나 사랑을 나눈다. 이레나는 조제프를 통해 마침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택한 사람과 사랑을 하는 것. 그러나 이레나는 조제프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레나의 이름조차 모를 뿐더러 그녀와의 추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조제프에 대해 갖고 있던 추억은 공유되지 못하고 그녀는 절망한다. 같은 시간, 이레나의 어머니는, 파리에서 함께 온 이레나의 정부 구스타프를 유혹한다.
쿤데라는 이레나와 조제프의 귀향과 나란히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율리시스의 귀향을 환기시킨다. 역사상 가장 강렬한 향수병 환자이자 가장 위대한 귀환을 감행했던 율리시스. 그는 과연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 행복했는가? 십년의 모험 끝에 다다른 이타카는 예전에 그가 그리던 그 모습이었나? 그는 고향에서도 새로운 이방인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향수란 대상이 없는, 도달할 수 없는 그리움이며, 무지란 인간의 숙명 아닐까?
잠든 이레나를 두고 호텔을 나오는 조제프는 이레나의 얼굴에서 그가 그토록 고향에서 찾아 헤매던 이미지를 본다. \’누이>\’의 얼굴. 조제프는 그녀에게 남긴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쓴다. \”내 누이여\”
밀란 쿤데라에 대하여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작곡가 레오스 야나첵(Leos Janacek)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스물다섯 살까지 쿤데라는 무엇보다도 작곡을 좋아하였다. 동시에 청년기 초반에는 현대 예술 전반에 매력을 느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받아들였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 때, 쿤데라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의 조국이 러시아제국의 일부가 되는 것을 보았다.
소설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59년 첫 산문을 쓴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우스꽝스런 사랑 이야기』의 한 단편으로 수록되었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 한 순간에 희한한 안도감을 갖고 음악과 시를 과감히 포기하였다. 따라서 소설가 쿤데라는 서정성에 대해 매우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가 예술에서 좋아하는 것은 상상력, 자유로운 사색, 특히 \”무책임할 정도로 자유로운\” 정신이었다.
1968년 프랑스 갈리마르사에서 출판된 『농담』을 통해 그는 많은 프랑스 친구들을 얻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공식적으로 쿤데라를 초청하여 프랑스로 정착케 하였다. 1975년 부인과 함께 프랑스 렌느(Rennes)에 도착한 쿤데라는 자기의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행복을 느꼈다. 서서히 소설쓰기 작업에 들어가 『웃음과 망각의 책』을 썼다.
1978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여섯 번 째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썼고, 1980년에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쿤데라는 스스로 \’작가(crivain)\’가 아니라, \’소설가 (romancier)\’라 생각한다. 그에게 단 하나 중요한 것은 소설이고, 그 소설만이 삶 속에서 의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으로 귀화한 밀란 쿤데라는 그의 고국에서 금지되었던 소설 작품의 창작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해학과 지성, 반어와 철학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하나로 군림한다. 사람들은 흔히 오늘날 소설이 쇠퇴기에 이르러 절명상태를 맞고 있다고들 한다. 쿤데라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 비록 몇 번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고 상처입기 쉽도록 약한 면이 없지 않지만 소설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독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세르반테스, 디드로, 카프카 이래 인간을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켜주고 맹목적인 발전, 기세등등한 기술문명, 그리고 국가의 전횡 등 파괴적 기세에 맞서 싸우는 것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그리고 있는 인간은 양면적이고 애매하고 패러독스, 우연, 모순 그 자체일 뿐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레사와 토마스는 우연히 서로 만났다가 사고로 함께 죽는다. 그들의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 배경에는 60년대 체코와 70년대 유럽을 뒤흔들어놓은 시련이 깔려 있다.
쿤데라의 소설 세계는 환경과 시대를 사실에 충실하게 모사하는 세계는 아니다. 사회소설이나 역사소설도 아니다. 고해나 일기 또는 사적인 기록으로의 세계도 아니다. 쿤데라의 소설에서 각각 장면은 상상력과 지성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는 인물들이 주도한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와 사건들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엉켜 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 속의 인물을 온전히 묘사하거나 어떤 상황을 충분히 묘사하기보다는 사유와 성찰에 관심을 두고 역사와 인간의 갈등, 세계의 계략에 빠진 인간의 실존을 문제 삼는다.
소설의 모티브들은 고대 신화, 성경, 계몽주의 철학, 르네상스 이야기 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오래된 소재들을 부분적으로 끌어오면서 현대적 상황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쿤데라의 소설은 결코 19세기적 소설 전통에 근원을 두고 있지는 않다. 분절된 여러 장면들이 혼재하는 동시에 큰 어울림을 빚어내는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독특한 형식을 구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