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온 『난중일기』 중 가장 완전한 판본

난중일기

이순신 | 옮김 노승석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0년 4월 20일 | ISBN 978-89-374-2686-5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6x201 · 852쪽 | 가격 35,000원

분야 논픽션

책소개

가장 완전한 형태로 복원된 『난중일기』 국내 최초 완역
40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을미년(1595) 일기 및 누락 문장 모두 수록
 
우리나라 전쟁 문학의 백미인 『난중일기』가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노승석 교수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1592년 4월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되어 근세 아시아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7년간의 전쟁을 한 장수의 눈으로 기록한 『난중일기』는 전쟁을 맞은 인간 이순신의 고투를 남김없이 보여 주는 비망(備忘) 기록이다. 이순신이 초서로 몹시 흘려 쓴 일기의 친필 초고는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해일수록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당시의 긴박함을 생생히 보여 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후대인들은 이 일기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었고 오독되어 전해진 글자도 많았는데, 현대의 수많은 한글 번역본들 또한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지 못했다. 국내 제일의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교수가 이전의 번역을 보완하여 펴낸 이 책은 이전의 모든 판본을 종합하여 한 자 한 자 검토하였고 누락되고 오독된 많은 부분을 밝혀내어 처음으로 수정했다. 또한 2008년 『충무공유사』 판독, 번역 과정에서 새로 밝혀진 「을미일기」 등 32일치 일기를 반영하여 지금까지의 『난중일기』 중 가장 완전한 정본을 세웠다.

편집자 리뷰

처음 발굴된 「을미일기」까지 모두 반영한 새로운 정본
초고본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및 『서간첩』과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순신의 친필본인 초고본은 전편이 초서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쓴 글씨와 삭제,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자주 보이는데, 유난히 전쟁이 치열했던 임진년, 계사년, 정유년의 일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후대의 활자본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대부분 오독되거나 미상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러 군데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전해졌다.
정조 때 이 초고본을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했는데 ‘난중일기’라는 이름도 이 당시 편찬자인 윤행임과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서본은 이서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내용이 누락되거나 달라졌다. 민감한 사항이 담겨 있는 부분은 제외하려는 편찬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인해 지극히 불충실한 활자본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던 조선사편수회가 초고본을 다시 한번 판독하여 간행한 것이 바로 『난중일기초』이다. 이 책은 전서본의 문제를 해결하고 초고본의 형태와 체재를 최대한 살려 현재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전범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에도 미해독된 글자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 (교감 완역) 『난중일기』를 번역한 노승석 교수는 몇 안 되는 초서 연구가이자 우리나라 제일의 이순신 연구자로서 지금까지 나온 모든 판본을 종합, 검토하였다. 초고본 『난중일기』는 1967년 도난 사건 이후로 열람이 금지되었다가 2004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 초고본을 새로 판독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공개되었는데, 이 사업에 노승석 교수가 참여하면서 형태가 훼손되지 않은 미해독 글자들을 모두 판독해 냈다. 이 과정에서 기존 판본에 있던 인명, 지명 등의 오류 100여 곳도 발견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2008년에는 노승석 교수가 지금까지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알려져 있던 『충무공유사』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난중일기』 판본에 누락되어 있던 일기 32일치를 발견해 내 언론에 공개된 바 있다. 특히 그동안 전서본만 전해져 오던 「을미일기」의 일기초를 발굴해 낸 점이 주목할 만한 성과다. 지금까지의 『난중일기』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내용이었다면, 이 새로운 기록은 개인적이고 가정사적인 내용을 위주로 적은 것이다. 특히 권율과 원균 등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 준다.
(교감 완역) 『난중일기』는 이러한 최근의 성과까지 모두 반영한 가장 완전한 판본이다. 초고본에서 문맥과 문헌을 참고하여 91건을 바로잡았고, 전서본으로 29건, 『난중일기초』로 3건, 새로 발견된 일기초로는 58건을 교감하여 수정했다. 이렇듯 모든 판본을 일일이 대조하며 교감한 원문을 전부 수록하였고, 이에 기초한 한글 번역판에는 세심하게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철저한 교감과 충실한 번역으로 되살려 낸 인간 이순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파악하고는 변방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찾는다. 이때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사에 발탁된 이순신은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하는 등 침입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임진년 1월 1일부터 일기가 시작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난중일기』는 왜군의 내침 징후를 간파한 이순신이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기기 위해 7년 동안 의식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공문 발송 등이지만 가족에 대한 걱정과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의 심정도 곳곳에 녹아 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세심하게 기록하여 남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료인 동시에 성웅의 인간적 면모도 살펴볼 수 있는 우리나라 일기 문학의 정수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 새로 발견된 「을미일기」에는 이순신의 개인적 감정을 표출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기이한 꿈을 꾼 것을 적어 두기도 했고 이억기나 권준 등의 군관에 대해 전해들은 비방도 남겨 두었다. 또한 원균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새로 발견된 일기에서는 그 감정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권율에 대해 좋지 않게 언급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을미년 4월 30일,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 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눌러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주요 교감 내용
① 일기초에서 처음 발견된 일기 사례
을미년 1월 12일, 삼경에 꿈을 꾸니 선군께서 와서 분부하기를 “13일에 회(荃)를 초례(醮禮)하여 장가보내는 데 알맞지 않는 것 같구나. 나흘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는 완전히 평소 때와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을미년 10월 3일, 오늘 회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주도록 예방에 당부하였다.
→ 이 두 일기는 일기초에 들어 있는 새로운 일기다. 1월 12일 일기는 아버지가 꿈에 나와 이순신의 아들 회의 결혼식을 미루라고 말했다는 내용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10월 3일 일기는 아들 회의 생일상을 차리도록 관아의 예방에 일렀다는 언급이다. 이 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후대인들이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의 인간적 정(情)을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② 일기초 내용으로 교감한 사례
갑오년 1월 14일,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받아 보니 “아산의 산소에서 설날 제사를 지낼 때 패를 지어 모여든 무리들이 무려 이백여 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구걸하므로 제사를 뒤로 물렸다.”고 한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朝, 蕾姪簡 見之, 則牙山墳山正旦祭時, 嘯聚之徒, 無慮二百餘, 圍山乞食祭退云, 可愕可愕.]
→ 일기초에는 ‘제사를 물렸다.’는 뜻의 ‘제퇴(祭退)’라고 되어 있는 말이 『난중일기초』에는 ‘등퇴(登退)’로 잘못 판독되어 있었던 탓에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자들은 ‘올라왔다가 물러갔다.’라고 엉뚱하게 해석해 왔다.
③ 문헌 고증으로 교감한 사례
정유년 5월 21일, 과천의 좌수(座首)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상공(李尙公)에게 말과 스무 살 난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한다. 안(安)은 본디 죽을죄도 아닌데 여러 번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百錢)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一陌金餞便返魂]”는 것이리라.
→ 마지막 문장 ‘일맥금전(一陌金餞)’의 ‘맥(陌)’ 자가 난중일기초에는 ‘맥(脈)’ 자로 잘못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백전의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돈’으로 해석되어 왔다. ‘맥(陌)’ 자는 ‘백(佰)’ 자와 통하니, 곧 ‘일백전(一百錢)’을 뜻한다. 위 글에 인용된 시구는 구우(瞿祐)의 『전등신화(剪燈新話)』 「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에 나오는 7언 율시의 일부이다. 물건을 바치고 석방되는 행태를 풍자하기 위해 이순신이 인용한 것으로, 원래는 영호선(令狐譔)이 부유하고 탐욕스러운 자가 돈으로 환생한 것을 비판한 글이다.
④ 일기초 내용으로 보충한 사례
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伏兵將) 녹도 만호 송여종이 전함 여덟 척을 거두다가 적선 열한 척을 절이도에서 만나서 여섯 척을 통째로 포획하여 적군의 머리 예순아홉 급을 베고 용기를 발휘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七月二十四日,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尒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 이 일기도 초고본에는 없고 일기초에 들어 있는 새로운 일기다. 이 일기초 내용을 통해 절이도해전이 벌어진 날짜를 처음으로 정확히 밝혀냈다. 이 일기는 전쟁 막바지에 지금의 전남 거금도에서 벌어진 절이도해전에서 이순신의 휘하 장수인 송여종이 승첩한 내용을 적은 것인데 후대의 다른 문헌에는 단편적으로 이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그 예로 『이충무공전서』 권수(卷首) 세보연표(世譜年表)를 보면 무술년 7월 24일에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절이도에서 왜적을 격파하라고 명한 내용이 있다.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에 보면 이날 절이도해전에서 조선 수군만 왜적을 포획하고 명나라 군사들은 바람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진린(陳璘) 도독이 알고 매우 격분하자 이순신이 전공을 진린에게 모두 돌리겠다며 달래었고, 이날 송여종이 포획해 온 적선 여섯 척과 적군의 머리 예순아홉 급을 진린에게 보냈다고 한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이 지은 『연경재전집외집(硏經齋全集外集)』의 「이충무한산기략(李忠武閒山記畧)」과 「독부충의전(督府忠義傳)」에도 이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날짜가 7월 18일로 되어 있다.

목차

역자 서문
해제
일러두기
 
완역 난중일기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Ⅰ
정유년(1597)Ⅱ
무술년(1598)
 

 
교감본 난중일기
교감본 「임진일기」
교감본 「계사일기」
교감본 「갑오일기」
교감본 「을미일기」
교감본 「병신일기」
교감본 「정유일기」Ⅰ
교감본 「정유일기」Ⅱ
교감본 「무술일기」
 
난중일기 교감기
교감본 「임진일기」
교감본 「계사일기」
교감본 「갑오일기」
교감본 「을미일기」
교감본 「병신일기」
교감본 「정유일기」Ⅰ
교감본 「정유일기」Ⅱ
교감본 「무술일기」
 
참고 문헌
이순신 연보
찾아보기

작가 소개

이순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22세에 무인이 될 것을 결심하여 무예를 닦기 시작했으나 28세 때 응시한 훈련원(訓鍊院) 별과 시험에서 낙마하여 실격되었고 32세가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다 47세 때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왜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한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이순신도 왕명에 따라 참전한다. 경상도 옥포ㆍ합포ㆍ적진포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였고 이듬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군공을 세우지만 1592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죽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다. 그리고 곧이어 치른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삼십여 척과 싸워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을 맞닥뜨려 싸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그는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정조 19년(1795) 왕명으로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순신의 유고집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노승석 옮김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초서를 연구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논문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 한림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역서로 『이순신의 종가 유물 도록(초역), 『충무공 사료 집성, 『충무공유사, 『성암시고(性菴詩稿), 『단양 한시선(丹陽漢詩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이 있다.

독자 리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