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프가 휘두르는 매력은 힘, 해방, 자유다.” ―브랑쿠시 스티글리츠의 요정 같은 모델에서 당당하고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을 가시화한 꽃의 화가에서 두개골을 품은 강인한 모더니스트로 성녀인가 창녀인가? 편견과 예술 권력에 맞선 진정한 화가 조지아 오키프와 예술사진의 선구자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랑과 예술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원제 Full Bloom: The Art and Life of Georgia O’Keeffe

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 옮김 이화경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8년 12월 5일 | ISBN 978-89-374-1216-5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75x220 · 704쪽 | 가격 38,000원

분야 논픽션

책소개

“오키프가 휘두르는 매력은 힘, 해방, 자유다.” ―브랑쿠시
 
스티글리츠의 요정 같은 모델에서
당당하고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을 가시화한 꽃의 화가에서
두개골을 품은 강인한 모더니스트로
성녀인가 창녀인가?
편견과 예술 권력에 맞선 진정한 화가 조지아 오키프와
예술사진의 선구자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랑과 예술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 사이에서 남자들의 편견과 예술 권력에 맞서 냉철하고도 매혹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위대한 여성 조지아 오키프.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간파했기에 의심이 많았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정념에 몰두했으며, 당차고 오만했지만 스티글리츠의 정부로 수치의 세월을 견뎌야 했고, 독자적인 예술가로 서기 위해 적대적 시선과 평단에 맞서야 했으며, 어렵게 이룬 성공을 탐닉하며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성공과 다시 겨루며 무한성을 얻고자 했던 화가. 관계의 쓰라린 파국 앞에서 신경쇠약으로 쓰러지는 순간에도 내면의 힘과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시 그림으로 귀환하는 예술가. 절대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는 친구도 고향도 버렸고, 눈이 멀어 가는 천형 앞에서도 의연하게 그림을 붙들었으며, 그림을 그리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영혼의 한 편린도, 신경 한 조각도, 돈 한 푼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인생과 예술을 통합하는 데 최선을 다한 불굴의 여인. 저녁이면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서부의 들판에 서서 그곳이 바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며 완벽한 공허만이 있는 곳에서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화경(옮긴이/소설가)

편집자 리뷰

★ 미술 시장에서 가장 비싼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죽은 다음 해 1987년 그녀의 유화 한 점이 187만 달러라는 최고의 가격에 팔렸다. 2001년 오키프의 「붉은 아네모네와 칼라」는 200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620만 달러(당시 62억여 원) 경매가로 여성화가로서 최고가를 기록했으며, 그녀의 손을 찍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전설적인 사진은 2006년 소더비에서 147만 2000달러(약 15억)로 사진 경매가 최고를 기록했다.
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미국 모더니즘 화단의 독보적인 화가이며, 전설적인 사진들을 남긴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함께 20세기 미술사의 주요 인물이다.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는 아직 우리나라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 화가와 그녀를 중심으로 한 미국 모더니즘의 역사를 한국 독자에게 가장 잘 전해 줄 수 있는 책이다.
 

★ 현대판 피그말리온 신화
1908년 뉴욕 예술계 명사였던 스티글리츠의 291 화랑은 로댕을 전시하고 있었다. 291은 마티스, 브랑쿠시, 세잔, 피카소 등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진보적인 화랑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화단은 로댕의 작품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드러냈고 미대생들은 무례한 소견을 내뱉었지만, 오키프는 291과 은밀히 통한다는 느낌을 갖았다. 1915년 이 젊은 시골뜨기 화가 지망생의 수채화 추상화를 처음 본 스티글리츠는 즉석에서 전시회를 제안했다. “드디어 회화사에 진정한 여성화가가 나타났다.” 추상화가 인정받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생계를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교사 생활을 하던 오키프는 화가가 되기 위해, 아버지뻘 나이의 유부남이었으나,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면서 동시에 돈이 있는 스티글리츠를 선택한다. 사진분리파를 이끌며 사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던 스티글리츠는 2년 동안 200점이 넘는 오키프의 사진을 찍는다. 1921년 오키프의 사진을 전시한다. “이 전시회는 조지아 오키프라는 여자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전설적인 사진에서 스티글리츠는 마치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이상형을 빚듯이 오키프를 감수성이 강한 이상화된 여신이면서 연약한 성적 대상으로 연출했다. 이후 15년 동안 스티글리츠의 도발적인 사진과 성적인 해석에 영향을 받은 평론가들은 오키프의 그림을 육감적으로만 해석하려고 들었고, 오키프는 끊임없이 평단의 편견에 맞서 자신이 공부한 미술 이론에 입각한 지적인 화가임을 주지시키고자 분투했다.

서른여섯에 사실상 데뷔전을 가진 오키프에 대해 평론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의미를 띠었다. “오키프의 그림들에서는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명백한 사례로서의 억눌린 욕망이 보인다.” 그러나 오키프의 인기는 “그 옛날 마티스에 대한 환호만큼이나” 영향력이 컸고, 미술평론가 맥브라이드는 오키프의 그림이 “B.F.(프로이트 이전)”, 즉 정신분석학의 도움 없이도 해방을 이루어 냈다며 호평했다. 그러나 스티글리츠는 성(性)이 팔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티글리츠는 계속해서 오키프 작품의 직감적이고 감각적인 면을 강조했고, 오키프의 몸과 성에 대한 언급은 오키프가 진지한 예술가로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었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그림이 아니라 성에 대해 얘기했고, 오키프는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분노에 사로잡히고 좌절했다. 그녀는 스티글리츠가 창조해 내는 자신의 이미지와 반대로 자신을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그리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된다. 
 

★ 꽃의 화가, 예술 권력에 도전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고, 원하는 곳에 갈 수 없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학교와 교사 화가들로부터 배운 것은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 결국 나는 타인은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나의 그림을 그렸다.”[1부 4장]

1921년 오키프의 작품이 필라델피아 순수미술 아카데니의 “최신 경향의 회화와 소묘전”에 출품되었을 때, 한 관계자는 “이 전시회를 빌어먹을 여자하고는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초 19세기 교육을 받은 남성들의 성지였던 회화는 아직 여성이 진입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미국 화단에 오키프라는 여자가 등장했을 때《뉴욕 이브닝 그래픽》은 “립스틱도 칠하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단발머리도 아니고,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은 보헤미안도 아닌, 사실상 머리를 틀어 올린 새침한 촌구석 여교사가 바로 1928년 미술계의 화젯거리다!”라고 떠들어 댔다. 오키프가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화가로 인정받고 명예학위를 수차례 받은 후에도 1949년 그녀가 국립예술문화원(NIAL)에 뽑힐 때는 에드워드 호퍼, 존 슬론 같은 남성 화가들이 방해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오키프는 꽃의 ‘여성적’ 이미지에 전복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현대미술에서 꽃은 감상적이고 상투적인 여성성을 의미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예술 세계에서 ‘예쁘다(pretty)’는 말은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러나 오키프는 남자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예쁜 그림을 보여 줌으로써 ‘예쁨’을 여성적 창의성으로 평가절하해서 열등한 범주에 포함시키는 남자들의 억측을 전복했다. 오키프의 예쁜 꽃 그림들은 남성의 시기와 두려움을 자극했다. 오키프 이전의 모든 여성 화가들은 남성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오키프의 작품 양식은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다. 조지아 오키프는 화단에서 진정으로 남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난 첫 번째 여성 화가다.
 

★ 작은 조지아, 큰 예술가로 홀로 서다
오키프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건 세상의 편견과 오해뿐만이 아니었다. 스티글리츠는 원치 않은 결혼으로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오키프와 재혼했다. 그러나 오키프는 더 이상 스티글리츠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 나갔을 뿐만 아니라 스티글리츠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 속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가 오랫동안 해골바가지를 그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키프는 더 이상 스티글리츠의 모델도 스티글리츠의 “작은 조지아”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예술에 단호한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이때 어리지만 당차고 아름다운 도로시 노먼이 스티글리츠에게 홀딱 반했고, 스티글리츠는 자신을 숭배하는 이 부유한 유부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노먼은 더 이상 미국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대표하는 291 화랑의 정신이 되리라는 희망에 전율했다. 1933년 오키프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스티글리츠와 노먼의 관계는 오키프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노먼이 오키프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노먼은 오키프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키프는 결국 자신만의 세계를 찾는다. 뉴멕시코의 광활한 사막에 영원히 정착하면서부터 오키프는 대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 20세기 미국 모더니즘의 개척자
과감하게 확대하고 잘라 내라. 사물의 정수만을 파고들라. 오키프는 단순화를 통해 사물이 지닌 핵심적인 아름다움을 증폭시켰다. 이처럼 “사물의 지극한 단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능력”은 스티글리츠와 폴 스트랜드의 카메라 작업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며, 미국의 모더니티의 힘을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가장 먼저 진전시킨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 세계는 1940년대 추상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서부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하드에지, 팝아트, 옵아트,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미국 모더니즘 양식들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폴 스트랜드는 오키프의 “독보적으로 뛰어난 여성적 직관은 선이나 형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그림에서도 볼 수 없던 풍부한 표정을 지닌 색채를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라고 호평했다. 숫양의 머리와 흰 접시꽃이 폭풍우를 몰고 오는 구름들을 배경으로 매달려 있는 극적인 그림을 두고 멈포드는 《뉴요커》에서 “오키프는 주제와 병치를 초현실주의자들보다 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고, 수수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사용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오키프는 현대미술에서 아직 추상미술이 자리를 잡기 훨씬 전부터 추상화를 실험한 개척자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헨리 맥브라이드는 “오키프의 작품은 추상 예술이 모두의 인정을 받은 이후에 이루어진 첫 번째 위대한 승리였다.”라고 평가했다.

뉴멕시코 사막의 신비스러운 존재가 된 오키프가 대중에게는 그녀의 미술보다 더 많은 관심거리가 되기도 했다. 1968년 《라이프》 표지에 실린 오키프는 주름진 얼굴로 “개척자 화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표제를 굽어보고 있다. 1938년 《라이프》가 오키프를 처음 소개할 때 오키프는 “앨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오키프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라는 표제를 보고 화가 치밀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오키프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선택들을 강조함으로써 스스로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오키프를 말할 때 스티글리츠의 연약한 모델을 떠올리지 않는다. 공허의 사막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독립적으로 사는 단호한 인상의 한 여인이 두개골을 끌고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오키프의 삶에 또 한 명의 중요한 남자가 있었다. 여든다섯의 오키프 앞에 나타난 스물여섯의 젊은 예술가 존 해밀턴이었다. 그는 오키프의 예술을 이해했고 그녀가 죽기 전까지 그림을 계속 붙들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 준 사람이다. 서른네 살의 해밀턴은 오키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몰락에 낙담하여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돌려 결혼했다. 그러나 오키프는 해밀턴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키프로서는 해밀턴의 인생에 여자란 자신뿐이었다. 1986년 죽기 전에 오키프는 자신이 해밀턴과 결혼한다고 믿었고, 그녀의 어마어마한 유산은 해밀턴에게 돌아갔다. 강인한 태양이 작열하는 1997년 7월 18일 뉴멕시코 산타페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개관하던 날에는, 섭씨 40도의 무더위 속에서 2000여 명의 관객들이 세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렸다.

목차

1부 시작  1848년부터 1917년까지
2부 변화  1918년부터 1946년까지
3부 개화  1947년부터 1986년까지
옮긴이의 글

작가 소개

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이화경 옮김

196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97년 《세계의 문학》에 「둥근잎나팔꽃」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수화』와 인도 동화 번역집 『그림자 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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