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2년 1월 20일
ISBN: 978-89-374-7556-6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0x210 · 120쪽
가격: 10,000원
분야 세계시인선 56
“나는 기다렸다. 내 작품도 기다려 왔다. 발레리의 시를 읽었을 때 그 기다림이 끝난 것을 알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삭막하고 씁쓰름한 의식의 궤적 끝에 부드러운 관능이 있다.” ―김현(불문학자)
실 잣는 여인 LA FILEUSE 6
뚜렷한 불꽃이 UN FEU DISTINCT 10
똑같은 꿈나라 MÊMÉ FÉERIE 12
방 안 INTÉRIEUR 14
잘 구슬리는 2 INSINUANT II 16
제쳐 놓은 노래 CHANSON À PART 18
잃어버린 포도주 LE VIN PERDU 22
발걸음 LES PAS 24
꿀벌 L’ABEILLE 26
시 POÉSIE 28
띠 LA CEINTURE 34
잠자는 여인 LA DORMEUSE 36
나르시스는 말한다 NARCISSE PARLE 38
구슬리는 자 L’INSINUANT 46
석류 LES GRENADES 48
해변의 묘지 LE CIMETIÈRE MARIN 50
비밀의 시가(詩歌) ODE SECRÈTE 66
주(註) 71
작가 연보 83
작품에 대하여: 폴 발레리의 시와 방법(김현) 87
추천의 글: 밤하늘 아래에서 흔들리는 영혼(오은) 113
●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미를 장식한 시인
20세기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미를 장식한 폴 발레리의 시집 『해변의 묘지』가 민음사 세계시인선 56번으로 출간되었다. 샤를 보들레르에서 시작하여 스테판 말레르메, 아르튀르 랭보에 이어 프랑스 상징주의 시 계보를 이은 폴 발레리는 20대 때 말라르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시인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말라르메는 「나르시스는 말한다」를 읽은 후에 서신을 통해 “당신의 시에 매혹되었소. 계속해서 그 희귀한 톤을 지키시오.”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잘 있거라, 나르시스여…… 죽어라! 이제 황혼이다.
내 가슴의 숨결에 내 형태는 물결치고,
덮어 가려진 창공을 가로질러, 울며 가는
가축들의 아쉬움을 목동의 피리가 조율한다.
하지만 별이 불 밝히는 독한 추위의 수면에서,
완만한 안개 무덤이 생기기 전에,
숙명적인 물의 정적을 깨뜨리는 이 입맞춤을 받아라!
희망만으로 이 수정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하다.
잔물살이 몰아내는 숨결로 나를 호리니,
내 입김이여 가냘픈 피리를 생동케 하라
가벼이 피리 부는 이도 내겐 너그러울 것이니!……
―「나르시스는 말한다」, 『해변의 묘지』에서
발레리는 시를 사유 방법의 하나로 여겼다. 인간성을 지고(至高)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의식의 명확성이라고 생각했던 발레리는 의식이 어디까지 명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평생 이어 나갔다. 끝까지 사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던 발레리는 시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드러냈다.
어디로 가니? 죽음으로.
어떤 조치가 있겠는가? 그만두기,
개 같은 팔자로
더 이상 되돌아가지 않기.
어디로 가니? 끝장내러 간다.
무얼 할 것인가? 죽음.
―「제쳐 놓은 노래」, 『해변의 묘지』에서
발레리는 심적 위기를 겪으며 문학을 포기할 뻔하기도 하고, 말라르메의 죽음을 계기로 시와 이별한 20년간의 공백도 있었다. 그러나 산문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론 입문」, 「테스트 씨와의 저녁」을 통해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 주었고, 1917년에는 장시 「젊은 파르크」를 발표하며 문단의 호평과 명성을 얻었다. 시, 산문, 논문, 평론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던 발레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 비관의 회복,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애송되던 「해변의 묘지」는 폴 발레리가 고향 세트에서 영감을 받아 죽음에 대해 적은 시다. 세트의 공동묘지에 묻힌 발레리는 자신의 묘비에 「해변의 묘지」 1연의 마지막 두 행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다!”를 새겼다.
「해변의 묘지」는 발레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과 사유를 통해 점차 또렷해지는 의식을 보여 준다.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라며 삶을 비관하던 시인은 사유의 격랑 끝에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 『해변의 묘지』에서
이런 발레리의 비관과 삶의 의지로의 회귀는 윤동주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지브리스튜디오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영감을 얻어 은퇴작 「바람이 분다」를 만들어 일본 청년들에게 위로를 주고자 했다.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사유와 삶의 끝에서 발레리가 주는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위로는 냉혹하고 씁쓸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