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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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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카피: ‘칙릿은 이제 그만!’을 외치는 여성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마놀로블라닉도 스타벅스도 나오지 않는, 진짜 현실을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

원제 Arlington Park

레이철 커스크 | 옮김 김현우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8년 9월 25일

ISBN: 978-89-374-8200-7

패키지: 반양장 · 국판변형 140x210 · 316쪽

가격: 12,000원

분야 외국문학 단행본


책소개

모성은 여성의 본능인가
현모양처의 신화에 반기를 든 불온한 소설

▶세상과의 타협, 특히 어머니가 된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직면해 피하지 못하는 타협에 관한 소설.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꼭 읽어야 할 책.―《옵저버》

▶현대 사회를 사는 여성들이 겪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것인가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레이철 커스크는 이 파도 치는 험한 바다 위를 훌륭하게 항해해 냈다.―《더 타임스》

▶모성이 지닌 모호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매우 드문 소설.―《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현대 사회의 풍요 뒤에 도사린 위험, 그것이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그린 현명하고 영리한 풍자.―《엘르》

잘 닦인 길, 무성한 녹음, 예쁘장하고 아담한 집. 런던 근교의 안락한 베드타운 알링턴파크에는 안정된 수입을 가져다주는 남편과 이제 막 걷기 시작하거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들을 가진 여성들이 살고 있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 등교시키고, 집안일하고, 쇼핑하고, 손님 대접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만 빼고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어느 날, 마을의 다섯 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편집자 리뷰

2, 30대 여성의 성(性)과 사랑, 패셔너블한 아이템, 스타벅스 커피, 마놀로 어쩌고 하는 구두, 경쾌함…… 등등은 이제 그만 보고 싶어요. 네? 세상에는 하루를 견뎌 가며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고 남편 출근시키고 시부모에게 시달리고, 몸은 골병들어 목과 팔다리에서 침이 빠질 새가 없고, 허벅지와 어깨에는 움직일 때마다 출산으로 인한 영양가 없는 살들만 출렁거리는 한편 가뭄에 콩 나듯 유모차 끌고 외출하거나 혹은 찜질방에서 달걀을 까 먹으며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정도로 마음의 위안을 삼는 \’아줌마\’들도 엄청 많거든요??!! 커피 한 잔 사 먹으려고 지갑을 열면 손이 덜덜 떨리고, 그럼에도 좋은 책 한 권 사는 데에는 고르고 골라 마침내 지갑을 여는, 좋은 책 한 권 읽음으로써 삶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싶지 않고, 세상에 대해 닫혀 있고 싶지 않은, 그런 \’아줌마\’들도 엄청 많거든요! 아 소외감 느껴 증말. 드라마도 평범한 아줌마는 왕따시키고, 이제 문학마저 아줌마는 나 몰라라 하네. ― 어느 30대 주부가 요즘 유행하는 소설을 읽고 쓴 웹서점 서평

요즘은 쿨하고 톡톡 튀는 도시 판타지가 매력인 칙릿이 여성 문학의 대세다. 마놀로블라닉과 스타벅스와 프라다 가방뿐 아니라, 주인공들의 연애담과 일상의 에피소드 들이 21세기 새로운 문화 소비층인 20~30대 여성의 욕구에 호소력을 갖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더 이들 소설들에서 기시감과 상투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어떻게 삶이 늘 저렇게만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서서히 고개를 들 때,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조금 다른’ 소설은 어떤 것일까. 누군가 ‘칙릿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칙릿에 싫증’이 난다면, 그것은 이 소설들이 그리는 현실이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도시 판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즉 그것이 그들의 ‘진짜배기 현실’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이란 놈은 한 가지로 정리될 수 없고, 우리의 머릿수만큼 다양한 현실이 있으니, 각자의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할 ‘조금 다른’ 소설 역시 필요하다. 언제나 다양성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레이철 커스크의 장편소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그렇게 ‘칙릿은 이제 그만!’을 외치는 (여성) 독자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작가 레이철 커스크(Rachel Cusk)는 1967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후 영국으로 이주, 옥스퍼드 뉴칼리지를 졸업했다. 첫 번째 소설 『아그네스 구하기』를 발표하자마자 휘트브레드 신인소설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그녀는 이후 세 번째 소설 『시골 생활』로 서머싯-몸 상까지 수상한다. 그 외에 『덧없는 것』, 『운 좋은 사람들』(휘트브레드 소설상 최종 후보작), 『우리에 갇혀』(맨부커 상 후보작)를 비롯해 지금까지 모두 다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좋은 평을 받았다. 2003년 그녀는 《그란타》 선정 최고의 젊은 소설가 중 하나로 꼽혔고, 이 작품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로 오렌지 상 최종 후보작에 이름을 올렸다. 이미 2001년 『생명의 작업』이라는 논픽션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의 애매모호함, 아이를 돌보면서 겪는 고된 일과와 자아 상실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 그녀는, 이 소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보다 깊이 있게 발전시켰다. 이 작품은 여성, 그중에서도 아내-어머니인 여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의 결과물이다. 어머니 역할이 피곤하고 지겨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신성 모독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어떻게 애 키우는 엄마가 저럴 수 있나, 하는 폄하 등등), 커스크는 대담하게도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특히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팽배한 문명 안에서 주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논쟁을 낳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기도 분당이나 일산 정도가 될 영국의 가상 베드타운 알링턴파크를 배경으로 30대 주부들의 하루를 그린 이 소설은 겉보기에는 안온한 일상을 사는 여성들의 내면에 잠재된 아슬아슬한 불안과 분노를 매우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모성의 위대함이라니! 그것은 쓰레기 같은 헛소리일 뿐!
★★ 간략한 줄거리

녹음이 우거진 거리와 예쁘장한 집들이 모여 있는 알링턴파크에서 주민들은 문명이 성취한 미심쩍은 것들(물질적 번영, 개인적 자유 그리고 도덕적 무관심)과 함께 지내고 있다. 남자들은 일터로 출근하고,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고, 사람들은 대개 그들에게 기대되는 바를 수행한다. 어느 비 오는 하루의 흐름에 따라 이 소설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동하며 다섯 여성의 일상을 깊이 들여다본다.
첫 번째 여자 줄리엣. 남편의 전근을 따라 알링턴파크로 이주한 줄리엣은 문학반 지도에서 유일한 위안을 얻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다. 지역의 문제아 학교에서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멋진’ 교사인 남편은 자신의 일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정작 자기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무관심해서 모든 일을 아내에게만 맡겨 버린다. 남편의 근무지로 이동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남편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희생한 것만 같다. 순간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줄리엣은 오랫동안 길러 왔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린다. 머리를 자르면 자신이 이 모든 것, 얼룩진 카펫이 깔린 아담한 집, 쇼핑으로 일과를 보내는 이 마을과 그곳의 꼴 보기 싫은 주민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여자 어맨다. 어맨다는 결벽증 환자처럼 하루 종일 집 안을 쓸고 닦는 데만 몰두한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들 에디조차 청소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집안일에 몰두할 때만 죽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다. 자신과 남편 제임스 사이에 불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 근거 없는 불안감은 서서히 그녀를 포위하고 그녀는 알링턴파크에서의 자신의 현실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분열을 느낀다. 줄리엣과 마찬가지로 어맨더 역시 “황폐한 삶”에 넌더리를 낸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고 그녀의 삶은 너무나 평범하다.
세 번째 여자 솔리.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한 솔리와 그녀의 남편은 돈이 좀 더 필요하고 그 결과 이제 솔리의 삶은 사회의 기대라는 천박한 견해와 물질적 이득이라는 계속되는 독촉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그들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남는 방에 하숙을 치는데, 그 방에 들어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솔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어느 순간 자신이 시들어 버린 꽃과 같아진 반면, 그녀의 남편은 그만큼 더 강한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한 이탈리아 여자를 통해 자신의 묻힌 여성성을 다시 발견한다.
네 번째 여자 크리스틴. 알링턴파크의 부녀회장이라도 되는 양 늘 동네 여자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데 바쁜 크리스틴은 편협한 사고방식에 성찰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기가 보기에 바람직해 보이는 사람들(교양 있지만 너무 튀지는 않고 자기 색깔이 있지만 피부색은 하얀 사람들)을 알링턴파크에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런 품위 있는 사람들이 살아야 동네 수준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웃들을 초대한 디너파티 날, 식사 준비에 뭘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고 채근하는 남편에게 조용히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그녀는 그때그때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지녔다.
다섯 번째 여자 메이지. 복잡한 도시를 떠나 교외에서 살게 되면 뭔가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 최근에 이사를 해 온 메이지는 알링턴파크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히려 처음에 주저하는 듯했던 남편이 더 만족하고 있다. 상실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딸아이의 도시락통을 주방 벽을 향해 던져 버린다. 자신이 꿈꿔왔던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와중에 그녀는 런던에서 왔다는 이유로, 부유한 백인들과 친교를 맺고 싶어 하는 크리스틴의 표적이 된다.

얼핏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여성들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소설은 그들의 일상을 가득 채운 불만과 권태를 그린다.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는 30대 여성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남편과 아이에게 짓눌려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빗물에 푹 젖은 불길한 징조의 흐린 하루를 상징으로 삼아, 커스크는 남편에 의해, 이방인에 의해, 아이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상실감을 느끼는 여자들의 심리를 매우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다섯 여자들이야말로 진짜 ‘위기의 주부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과 가족의 역기능이라는 곤경에 처해 있다.
 
아내-엄마로만 남은 그들,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 어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이 여성들의 내면 변화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다이내믹한 풍경을 그린다. 커스크는 우리에게 익숙한 영토, 30대 중산층 주부들의 조용하고 절망적인 삶이라는 영역을 탐험한다. 이른 아침 그들이 준비하는 식사에서부터 아이들의 등굣길로 향하는 운전 중 장면, 쇼핑몰에서의 모임, 그리고 마침내 남자들이 모두 집에 돌아와 모든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 저녁의 디너파티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문장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갖춘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집안 문제와 이웃과의 문제,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생각들에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형성하며 신선한 무언가를 끌어낸다. 등장인물들은 결국 그러한 삶과 타협하는 것 외에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특히 많은 엄마들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내-엄마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다른 이에게 감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이다.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감히 입 밖에 내어 큰소리로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성의 지위가 현격히 신장되었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성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니 쓰레기 같은 헛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의 어려움”이 처음 다루어지는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은 대개 그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모성의 위대함’, 그들의 굳셈과 용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레이철 커스크는 다르게 말한다. 때로는 엄마들도 애들이 정말 꼴 보기 싫을 때가 있고, 남편이란 존재는 아내인 자신을 서서히 말려 죽이려 드는 살인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만약 모성이 본능이라면, 왜 부성(父性)은 아니란 말인가. 현모양처는 신화에 불과하다. 여성이 자아를 상실하지 않고도 그 신화를 실현할 수 있다면, 현부양부(賢父良夫)의 신화 역시 가능하지 않을 리 없다.

남편의 성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자신의 처녀 때 성과 함께 쓰기로 했을 때, 처음 얼마간은 용기가 필요했다. 솔리는 결혼은 그런 것이라고,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162쪽)

솔리는 마치 자신이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자유낙하하면서 예정된 위태로운 상황으로 점점 더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네 번째 아이를 가진 지금은 누군가 자신에게 억지로 바람을 불어넣는 것 같은 느낌, 자신의 몸이 너무 비대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면 남편에게는 가늘고 뾰족하고 단단한 남성성만 남는 것 같았다. 솔리의 전동믹서처럼, 같은 자리에서 회전하는 남편에 맞춰 그녀 자신은 거품처럼 점점 더 부풀어 갔다. (149~150쪽)

“뭔가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그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될 때가 있단다. 기다리는 동안 뭘 기다리는지도 정확히 모르지. 그냥 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결국 끝에 가서는 그 다음 단계라는 게 아예 없다는 걸 깨닫는 거지. 지금 있는 게 전부라는 걸.……너는 그렇게 안 됐으면 좋겠구나.” “절대 그렇게 안 돼요.” 새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나는 아기도 안 가질 거예요. 혼자 살면서 죽어도 결혼 안 할 거라고요. 결혼은 증오의 다른 말일 뿐이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줄리엣은 생각했다.(216~217쪽)

사랑을 하고 싶었던 마음은 남편과의 관계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작은 프로덕션에서의 파트타임 직으로 바뀌었다. 뭔가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방 세 개짜리 집이 되었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두 딸 클라라와 엘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그 요란한 바람이 불었다. 어찌나 불어 대는지, 그녀는 바람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메이지는 변화와 움직임을 바라는 자신의 그칠 줄 모르는 욕구가 잠재워질 수 있는 어떤 안정된 곳을 원했다.(237쪽)

가족은 흐린 날의 망망대해처럼 혼란스러웠다. 오락가락하는 믿음이 있고, 잔인함과 미덕이 교차하고, 감정과 도덕이 요동치는 곳, 끊임없이 폭풍우와 고요함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미친 듯이 폭우가 내리다가 다시 햇살이 비치면 결국 둘 사이의 차이를 잊어버리게 되고,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무엇이 되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결국엔 그저 살아남는 것, 헤치고 나가는 것만 중요할 뿐이다.(242쪽)
 
속물적이고 편협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현대인들의 초상

여성의 일상만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은 또한 경제적 안정과 자유로운 여가를 얻었으나, 도덕적 무관심과 인습, 타인의 기대에 때라 살아가는 타율적인 삶의 연속일 뿐, 진정한 행복과 성취를 이루지는 못한 현대인들의 삶을 신랄하게 해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은 불만족 속에 갇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은 너무나 ‘나이브’하다. 고작해야 쇼핑과 점심 모임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거나, 또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미용실에 가고, 이웃을 초대해 디너파티를 열 뿐이다. 자아상실이라는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의 문제를 다른 여성과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려 하지 않는다. 서로 연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계급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은 고삐 풀린 소비주의와 그리고 자기 합리화에 뒤따르는 변덕스러움에 휘둘린다.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너무나 객관적이어서 차라리 냉혹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전혀 이상적이지 않고 오히려 속물적이고 편협하며 자기 안의 문제에만 빠져 주위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이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작가는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러낸다. 바람직하지 않고 이상적이지 않기에 이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가족 내에서 겪는 개인의 갈등과 사회 전체에 만연한 도덕적 무관심과 물질 지상주의는 가장 속물적이고 편협한 크리스틴이 주최한 디너파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알링턴파크라는 대도시 근교 중산층 도시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듯 보이던 크리스틴조차 이 장면에서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취약한 것인지가 밝혀질까 두려움에 시달린다.

레이철 커스크의 이 장편소설은 다섯 여성들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이면서, 현대의 중소 도시의 삶과 계급의식, 결혼 생활, 부모 노릇의 위선과 비밀이라는 어두운 약점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의 머릿속을 능수능란하게 드나드는 작가의 솜씨에 힘입어, 작품 속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21세기 사회에 대한 뛰어난 비평으로도 손색없는 한 편의 단편으로서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다.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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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철 커스크

1967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후 영국으로 이주, 옥스퍼드 뉴칼리지를 졸업했다. 첫 번째 소설 『아그네스 구하기』를 발표하자마자 휘트브레드 신인소설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그녀는 이후 세 번째 소설 『시골 생활』로 서머싯-몸 상까지 수상한다. 그 외에 『덧없는 것』, 『운 좋은 사람들』(휘트브레드 소설상 최종 후보작), 『우리에 갇혀』(맨부커 상 후보작)를 비롯해 지금까지 모두 다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좋은 평을 받았다.

2003년 그녀는 《그란타》 선정 최고의 젊은 소설가 중 하나로 꼽혔고, 이 작품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로 오렌지 상 최종 후보작에 이름을 올렸다. 이미 2001년 『생명의 작업』이라는 논픽션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의 애매모호함, 아이를 돌보면서 겪는 고된 일과와 자아 상실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 그녀는, 이 소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보다 깊이 있게 발전시켰다. 이 작품은 여성, 그중에서도 아내-어머니인 여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의 결과물이다. 어머니 역할이 피곤하고 지겨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신성 모독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어떻게 애 키우는 엄마가 저럴 수 있나, 하는 폄하 등등), 커스크는 대담하게도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특히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팽배한 문명 안에서 주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논쟁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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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옮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협동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EBS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스티븐 킹 단편집』,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 『세계명화 비밀』, 『인상주의자 연인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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