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보석상자, 20세기 세계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의 지팡이

소설 쓰는 철학자 보르헤스 다시 읽기

양운덕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8년 9월 30일 | ISBN 978-89-374-2646-9

패키지 양장 · 신국 변형 125x205 · 412쪽 | 가격 20,000원

책소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의 무대로 끌어올린 작가이며 카프카와 나란히 전위적인 모더니즘 문학 세계를 이룬 20세기 거장으로 꼽힌다. 특히 1945년에 출간된 『픽션들』에는 수세기 동안 논의되어 온 세계 철학과 모든 종류의 문학 장르가 응축되어 있다. 보르헤스의 이야기들에는 실제 존재했던 철학자와 소설가가 나오는가 하면 상상 속의 백과사전과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학술적 고찰도 보인다. 또한 보르헤스의 추리소설은 존재론을 담고 있으며 그의 실험소설은 형이상학을 담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이 모든 지적 장치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지극히 문학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보르헤스의 철학자적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칼비노를 비롯한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정신적 아버지였던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는 것은 혼돈과 질서가 공존하는 무한한 우주에서 진리의 한 줄기 빛을 찾는 작업과도 같다. 저자 양운덕은 이런 보르헤스를 철학자로서 대면하지 않고는 이 미로에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보르헤스 소설의 철학적 해체와 독창적인 재구성을 통해, 그리고 보르헤스와 카프카의 변주를 통해 그동안 보르헤스 해석에서 미흡했던 보르헤스의 인식론과 문학론을 소개한다.

편집자 리뷰

★ 보르헤스라는 방대한 수수께끼에 접근하기
보르헤스는 베케트와 함께 권위 있는 ‘포멘토 상’과 ‘세르반테스 상’을 받는가 하면 추리소설 특별상인 ‘에드거 앨런 포 상’도 받았으며,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거장들’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시간, 정체성, 영원, 거울, 미로와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이면서 영속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방대한 유럽 문학과 역사, 신학과 철학을 담고 있다. 보르헤스는 또한 독자를 정형화된 관점에 묶어 두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렇기 때문에 보르헤스라는 거울은 독자가 자신을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산출하는 또 다른 거울을 창조하도록 이끈다. 이런 보르헤스에게 ‘20세기의 창조자’, ‘아이디어 보석상자’라는 수식어가 붙곤 한다. 이처럼 방대한 보르헤스의 세계에 다가가는 건 끊없는 미로를 탐색하는 작업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특히 보르헤스 독자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보르헤스의 지팡이』는 보르헤스와 독자 사이의 틈새를 좁히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보르헤스의 작품 앞에서 아득한 신비와 곤혹스러운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행로들을 안내하고자 한다.”

저자는 보르헤스 소설이 ‘철학적’이라고 하는 건 오해이며, 오히려 “철저하게 문학적”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철학자였다고 말하는 저자의 보르헤스 해석은 이렇다. 보르헤스는 철학을 문학으로 포장하거나 철학과 문학을 어정쩡하게 혼합한 게 아니다. “보르헤스가 형이상학적인 논쟁, 인식론적 질문들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는 점뿐 아니라 그런 질료들을 문학적으로 가공하고 변형시키는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의 ‘그릇’에 담긴 철학적 사고는 문학의 실험 도구로 쓰여서, 새로운 관점, 구체적인 사건과 이미지, 모험적인 재구성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의 문학적 시도들은 철학과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면서 구체성의 모험에 뛰어든다.” 질서, 의미, 필연을 담은 그릇으로 독자를 작가의 권력이 이끄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보다는 보르헤스처럼 무질서, 무의미, 우연, 역설을 담은 그릇만이 온갖 가능성과 창조를 낳는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 문학적으로 해체하고 독창적으로 재구성하기

「신의 글」(『알렙』 수록)은 지하 감옥에 갇힌 한 제사장의 독백을 통해 우주의 비밀, 우주의 존재 근거가 되는 ‘신성한 문장’을 찾는 노력을 다루면서 진리 찾기와 그것의 역설을 보여 준다. 마야 문명의 제사장이었으나 이제는 침략자들의 손에 의해 영원히 나오지 못할 땅속 깊은 감옥에 갇혀 있는 치나깐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우주의 모든 비밀을 집약한 신성한 비밀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치나깐은 개별적이고 제한된 관점을 넘어서는 보편적 관점을 추구하게 되는데 “결국 ‘전체의 상(相) 아래서’ 사고하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까지 넘어섬으로써 더 이상 개체, 자신의 특수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지팡이』는 이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목소리’라는 등장인물을 만들어서 소설의 주인공 치나깐과 대화를 시키는 극적 장치를 만든다. 저자는 여느 문학 비평서처럼 해설을 것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보르헤스 식으로 또 다른 창작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주인님은 보이지 않는 고독에 이끌려 허무의 심연에 떨어지려는 위험을 몇 번이나 이겨 내신 뒤 드디어 당신의 말상대를 고안하셨다. 목소리로만 있을 수 있는 가상의 존재와 대화하면서 당신의 고독을 망각하고 당신의 상황을 재구성하셨다. … 그런데 이 이야기 상대,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않고, 치나깐 님의 독백을 대화로 바꾸고, 부재하면서 존재를 이끄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이다.
(「진리의 침묵」 중에서)

‘신의 글’이란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변하지 않을 그 무엇일 텐데, 치나깐은 결국 “변하면서도 동일한 것, 살아 있는 수수께끼” 재규어의 몸에서 \’신의 글\’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 “모든 것을 담은 한마디”를 말하는 순간 치나깐은 그 모든 압제에서 풀려나 이 땅을 다시 통치할 수 있을 테지만, 치나깐은 그 단어를 말하지 않는다. 치나깐의 내적 분투에서 그의 마지막 결정까지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생생한 대화로 재구성하고 있다.

치나깐: 나는 결코 그 낱말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 어인 연유로 주인님 손에 쥐고 계신 진리를 내던지려 하시옵니까? 혹시 어떤 의혹에라도 빠지셨나이까? 그것을 금지하는 목소리라도 들으셨나이까?
(…)
치나깐: 서글퍼하지 말거라. 우주를 엮은 매듭을 본 자, 우주를 엿보았던 사람, 우주의 불타오르는 구상들을 보았던 사람이 그 안에 있는 한 인간에 사로잡혀서야 되겠느냐? 비록 ‘그’가 한때 그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하잘것없는 행운이나 불행에 집착할 까닭이 있느냐? 바로 ‘그 자신이었던 한 사람’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도 이 우주의 다른 것들과 다를 바 없거늘 무수한 것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에 어찌 미련을 두겠느냐? 만일 그가 이제 ‘아무도 아닌 자’이거나, 그가 ‘모든 이’라면, 그렇게 달라진 자의 운명 따위가 우주의 품에 안긴 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물며 그자의 조국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느냐?
(「진리의 침묵」 중에서)

독백과 대화가 ‘다른’ 형식이므로, 작가(보르헤스)의 원작(「신의 글」)과 필자(양운덕)가 각색하고 해설한 글(「진리의 침묵」)은 같은 내용을 다른 형식에 담았으니 서로 다른 글일까? 하지만 필자는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의는 다시 카프카의 소설들을 변주한 보르헤스의 작품론과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보다 더욱 원작에 가까운 『돈 끼호떼』를 쓰려는 보르헤스의 또 다른 주인공 삐에르 메나르의 문학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 소설 쓰는 철학자, 철학하는 소설가 보르헤스의 세계

『픽션들』에는 그 누구에게도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도서관을 안내하는 지도가 있다. 이 도서관을 상상의 도서관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몇 세기 전에 불타 버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카프카의 작품들 위에 겹쳐 쓴 글쓰기 도서관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황량한 삶의 사막에서 ‘한 권의 책’을 찾다가 지친 이가 사막 한가운데 그려 놓은 신기루라고 하는 이도 있다.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 중에서)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무엇일까? ‘바벨탑’이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듯 ‘바벨의 도서관’ 역시 혼돈과 무질서의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한편으로는 기하학적 질서로 무장한 얼굴과 모순과 무의미를 담은 역설적인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보통 책의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는 관념일 뿐이고 책 바깥에 그 뿌리가 되는 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우주에 비유함으로써 책의 세계를 곧 엄연한 현실로 바라보고 있다. “객관적 현실은 그것을 해석하는 관점에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저자는 「바벨의 도서관」의 화자가 관념적 허구와 객관적인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보르헤스의 인식론과 문학론을 해석한다.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의 한계 안에 갇힌 세계를 벗어나서 그것을 자유롭게(일정한 논리에 따라) 가공함으로써 스스로 전개되는 현실을 빚어내는 시도이다. 그것은 현실의 가능성 너머를 넘보면서 허구적 구조물로 현실의 구조를 드러내고 새로운 상상으로 현실을 다르게 보는 눈을 제시하려고 한다. 현실/허구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다면, 허구를 통해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새로운 관점과 가능성을 보다 풍부하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 중에서)

소설 속 화자가 전하는 미신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도서관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그 책’을 훑어만 보았을 뿐인데도 그가 신처럼 되었다고 한다. 다른 모든 책들의 열쇠가 되는 ‘그 책’은 기독교에서는 ‘성경’이요 물리학계에서는 ‘통일장 이론’이요, 생물학계에서는 지금 인간의 생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기 위해 게놈 프로젝트의 완벽한 보고서가 될 단 한 권의 DNA 책을 찾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완벽한 열쇠이자 모든 지식의 완전한 정리, 요약본이 있다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장악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인식의 힘으로 새로운 창조자나 모든 것의 지배자가 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막아도 이런 것을 찾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형이상학적 충동이라고 한다.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 중에서)

그러나 화자는 결국 ‘진리 찾기’를 포기한다. 바벨의 도서관에는 진리 대신 혼돈, 무질서, 우연이 있고, 진리의 이름으로 쓰인 책들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안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보르헤스가 혼돈의 적극적인 성격을 강조하거나 혼돈의 생산적인 측면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질서의 대명사로 불리는 진리의 보고에서 혼돈의 존재를 뚜렷하게 부각시켜서 현실의 혼돈과 우연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근대과학은 법칙의 이름으로 모든 혼돈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요즘은 질서에 불가피한 혼돈, 혼돈 속의 질서를 찾는 쪽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이것을 ‘카오스 이론’처럼 혼돈 속에 있는 더 깊은 질서를 찾는 작업으로 보든, 혼돈과 우연의 창조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든 간에 질서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순한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사고와 예술에 자양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혼돈을 받아들이고 혼돈의 어지러운 움직임에 익숙해져야 하며 혼돈을 부분적으로 조직하지만, 혼돈에서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과 창조적 활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혼돈 위에 위태롭게 세워진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질서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질서가 ‘혼돈의 바다’ 위에 있는 ‘크지 않은 섬’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 중에서)

보르헤스가 독특한 제목을 단 소설 「뜰뢴, 우끄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뜰뢴’이라는 가상 세계를 소개하면서 그것을 현실과 대비시킨다. 어떻게 논리적 사고와 철학적 개념들만으로 자족적이고 완결된 세계를 세울 수 있을까? 『보르헤스의 지팡이』의 저자는 여기서 가깝게는 영국 경험론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적 논의가, 멀게는 서구 철학사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뜰뢴이라는 관념론적 세계를 구축하는 뼈대가 된다고 설명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인터넷 공간에서 문학과 철학에 대해 논쟁한 내용을 옮기고 있다. 아래 인용은 반복되는 가운데 창조되는 원본에 대한 논의의 일부다.

베르고스(양운덕): 이처럼 관념론이 몇 세기를 주도했다면 그것이 현실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오. 두드러진 예를 하나만 보죠. 뜰뢴의 오래된 지역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잃어버린 물건 ‘복제하기’인데….
포에타: 요즘 디지털 복제 때문에 잠 못 자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무한하게 복제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카피레프트(copy left)에 대해서 카피라이트(copy right)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요. 아, 물론 생명을 복제하는 문제 때문에 시끄럽기도 하지만, 원본과 복제 사이의 관계는 묘해요. 원본만 진짜이고 복제가 가짜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복제된 생물의 권리가 문제 되면…….
라지오네: 같은 것을 얼마든지 ‘무한하게’ 복제한다면, 그런 되풀이가 내용을 ‘다르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어쨌든 요즘 디지털 문화에서는 복제를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어요. 어떤 것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과 복제된 것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경우는 많이 달라요. 원래 지식은 누구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단 한 사람만 아는 지식도 원리적으로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으니 얼마나 풍성한 자산인가요!
포에타: 유전자 복제를 보면 생명의 문제가 복제 문제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베르고스: 그런 얘기의 원조쯤 될지도 모를 얘기일 거요. 자, 잃어버린 연필 ‘하나’를 찾는 두 사람의 경우를 보죠. K가 그것을 찾고도 시치미를 떼고선 잠자코 있었어요. 그랬더니 M도 K가 찾은 것에 못지않은 것, 오히려 기대에 더 걸맞은 것을 찾았다더군요. 어떤가요?
포에타: 허 참, 잃어버린 물건 하나를 두 사람이 찾았으니…….
베르고스: 이런 일이 많다 보니 뜰뢴에서는 이런 이차적인 대상을 ‘흐뢰니르’라고 부르곤 한다지요. 이것은 그리 볼품은 없지만 실제의 것하고 거의 차이가 없어요. 물론 자세히 보면 약간 더 길긴 해요.
라지오네: 흐뢰니르가 복제물을 가리키는 이름인가요? 흐뢴과 그것을 닮은 흐뢰니르라! 앞에서는 M이 원본보다 더 잘 복제를 한 것이로군요! 하기야 복제가 원본을 슬쩍 밀어내는 경우는 많죠. 한 종교가 다른 지역에 전파되면 그곳의 엄격한 복제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판에 박히는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베르고스: 얼마 전까지는 이런 흐뢰니르가 방심이나 망각에 따른 것, 우연의 산물들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그것을 체계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100년밖에 안 되었다고들 하더군요.
포에타: 방심과 망각의 산물이라면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원본을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는가 봐요. 그러니 원본과 복제 사이에는 우연의 놀이가 끼어들 수밖에요. 그건 그렇고, 복제가 아니라 ‘생산’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조직적으로 생산하다니! 복사 회사나 복제 전문 업체가 생겼나요? 댁의 아드님을 다시 복제해 드립니다! 7년 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할까요?
라지오네: 이 복제 문제를 다양한 경우에 원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떤 사건과 그것에 대한 기억, 배우의 연기,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 같은 것이 그런 문제들과 비슷한 유형이니까요. 이를테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사건이 원래의 것과 같은지를 문제 삼는 것도 재생의 문제이니까요. 우리가 과거를 기억에서 불러 올 때 원래의 것과 똑같이 불러오는지, 다르게 불러오는지 잘 모르겠고…… 그리고 역사에 대한 기록이 과거를 보존하려는 것이라면, 그렇게 기록된 과거가 ‘있는 그대로’의 과거와 똑같을 수 있을까요?
포에타: 그러고 보니 요즘 유행하는 시뮬라크르 얘기하고 비슷하네요. 모조 진주가 진짜 진주 뺨칠 뿐만 아니라 진짜를 능가하니까 하이퍼리얼(hyper-real)이라느니,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라고들 하죠. 아니 그보다도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또 시뮬라크르가 원본의 부재를 숨긴다는 점이 더 재미있더군요. 그러니까 가면 뒤에서 얼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가면이……
라지오네: 가면은 얼굴이 아니라 얼굴의 부재를 숨기는 방식일 수 있어요. 그래서 가면 뒤에 어떤 얼굴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도록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형이상학이 환상 문학의 하나라면」 중에서)
 
★ 카프카-보르헤스-양운덕, 보르헤스 다시 읽기/쓰기
보르헤스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카프카의 「성」, 「소송」 등에 나타난 세계를 우연들의 세계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저자 양운덕은 「우연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책을 읽다가 ‘우연성’에 관해 궁금해진 영진과 지혜 두 명을 등장시켜 「바빌로니아의 복권」의 화자(노인)와 대화를 시킨다.

보르헤스는 카프카의 세계, 곧 어떠한 내용도 지니지 않은 채 스스로 작동하는 관료 기계로부터 비롯된 어처구니없음과 냉혹함을 낳는 현실을 보다 명료하게 표현한다. 그는 이것을 ‘회사’, 곧 우연을 조직하는 존재를 통해 복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를 가장 합리적으로 조직하려는 모습으로 제시한다. (…) 흥미로운 것은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 점보다도 이 세계를 조직하는 ‘회사’의 역설적인 모습이다. 완전하게 우연적일 것! 이런 원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그 소망을 구현하는 회사라는 조직은 모든 경우의 삶을 우연만으로 조합한다. 일종의 역사에 대한 패러디인 이 세계는 모든 것에서 법칙과 질서를 찾는 시도를 조롱하기도 한다. 복권의 이상 국가인 바빌로니아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그런 우연들의 조합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보통, 직접, 평등, 비밀 복권을 통해 어떤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복권을 공정하게 개혁하는 시도를 통해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두의 삶을 결정하는 우연의 왕국은 현실의 뒤집어진 이미지이자 예측할 수 없는 흥미를 자극하는 놀이판이기도 하다.
(「서문」 중에서)

「삐에르 메나르, 『돈 끼호떼』의 저자」에서 주인공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를 다시 쓰려고 시도한다. 저자는 보르헤스가 이처럼 무모한 다시 쓰기 형식을 빌려서 기존의 읽기 방식이 지닌 난점들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메나르의 영웅적인 노력을 형상화한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메나르가 바로 『돈 끼호떼』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한 얼굴의 기사, 돈 끼호떼를 글쓰기와 읽기의 무대에서 재현하려는, 펜을 들고 종이 위를 달리는 메나르. 그는 과연 어떤 글쓰기/읽기를 시도하는가?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와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글을 남긴 그는 어떤 점에서 ‘읽기의 혁신’을 이룩했는가?
(「서문」 중에서)

한편 보르헤스의 「아베로에스의 탐구」는 ‘비극’이라는 낯선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고민하는 무슬림 학자 아베로에스를 통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화의 눈으로 다른 문화를 해석, 이해, 오해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다시 에르네스트 르낭의 아베로에스 해석과 당시 이슬람 사회의 지적 흐름을 소개하고, 소설이라고는 본 적 없는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에게 아베로에스가 ‘소설’을 눈에 보이도록 기술하는 노력을 가늠해 보면서 보르헤스의 아베로에스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이처럼 『보르헤스의 지팡이』는 보르헤스 세계를 안내하는 지도이면서 동시에 보르헤스 다시 읽기/쓰기를 통해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최전선에 있는 보르헤스를 재창조하는 과감한 시도이기도 하다.

목차

서문
진리의 침묵 : 「신의 글」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 : 「바벨의 도서관」
우연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세계 : 「바빌로니아의 복권」
새로운 『돈 끼호테』의 모험―글쓰기 또는 읽기의 모험 : 「삐에르 메나르, 『돈 끼호테』의 저자」
실패의 기록으로 본 문화적 차이와 허구적 존재론 : 「아베로에스의 탐구」
진리의 문턱에서 만난 새로운 질문―‘끝없는 여행’의 이야기 : 「알모따심에 가까이 가기」
형이상학이 환상 문학의 하나라면―관념들로 빚은 또 하나의 세계 : 「뜰뢴, 우끄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작가 소개

양운덕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부교수를 지냈으며, 칸트, 헤겔, 데리다,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스 비극 등 철학과 문학 전반에 걸쳐 강의를 하고 있다. 피노키오의 철학 시리즈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아킬레스는 왜 거북을 이길 수 없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놀이판에 나섰을까』, 『라쁠라스의 악마는 무엇을 몰랐을까』와 『미셸 푸코』를 지었으며, 옮긴 책으로 『사회의 상상적 제도』,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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