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조영헌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1년 8월 20일 | ISBN 978-89-374-4455-5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464쪽 | 가격 28,000원

책소개

유럽에 대항해 시대가 있다면
중국에는 대운하 시대가 있다

저서 『대운하와 중국 상인』으로 중국 근세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조영헌 교수가 10년 만에 주저를 선보인다. 중국의 ‘명·청 시대’를 ‘대운하 시대’라는 획기적 개념으로 포착해 낸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이었던 중국은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18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운하를 통해 물자와 인력, 정보를 실어 나르며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대운하 시대는 중국의 ‘바다 공포증’을 더욱 강화해 제국의 쇠퇴를 불러온 역설의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는 황제와 관리, 상인, 해적, 선교사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생생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대운하 시대를 대항해시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사적 시간으로 끌어올린다.

편집자 리뷰

세계 최대의 내륙 수상 운송 네트워크 대운하,
변방의 도시 북경을 제국의 수도로 만들다

중국의 대운하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수나라의 대운하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대운하는 수나라의 대운하보다 약 800년 뒤의 것으로,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완성했다. 영락제는 즉위 직후부터 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남경(난징)을 떠나 북경(베이징)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많은 역사가가 북경 천도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북경은 몽골과 너무 가까웠고, 땅은 척박했다. 게다가 경제 중심지인 강남 지방과 지나치게 멀었다. 명은 금이나 원처럼 북방에 기원을 둔 정복 왕조도 아니었다.
저자는 북경 천도의 ‘과정’에 주목한다. 천도에 앞서 영락제는 대운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고도가 다른 지역의 수심을 고르게 했고, 방죽을 쌓아 범람을 막았으며, 갑문을 설치해 물줄기를 돌림으로써 막혔던 구간을 새로 개통했다. 이렇게 완성된 물길은 이전 시대의 대운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대운하가 북경 천도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 것이다. 공급 문제가 해결되자 영락제는 천도를 공식화했고, 이때 확립된 정치 중심지 북경, 경제 중심지 강남이라는 구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번영도 쇠퇴도 모두 대운하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은 왜 문을 닫아걸었는가?

앞서 보았듯이 수도 북경은 몽골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이때 안보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대운하의 염상(소금 상인)들이었다. 대운하가 재정비되면서 원대에 쇠퇴했던 소금의 생산과 유통도 다시 활발해졌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소금 전매권을 쥐고 있었는데, 이는 명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염상들은 조정으로부터 소금을 판매할 권리를 얻는 대신에 북변으로 군향(군량)을 직접 조달했고, 제도가 바뀐 뒤에는 은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국방에 기여했다.
대운하를 무대로 활동했던 청 초기의 상인 정유용은 눈여겨볼 만한 사례 한 가지를 제공한다. 정유용은 동료 상인들과 함께 사비를 들여 대운하의 도시 양주에 천비궁을 재건했는데, 천비는 항해신 마조를 가리킨다. 바다의 여신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내륙에서 운하의 여신으로 모셔질 정도로 대운하는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리도 아닌 일개 상인이 지역사회의 공익사업을 주도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하지만 대운하의 번영에는 이면도 있었다. 영락제는 대운하를 개통한 후 바닷길을 통한 조운(漕運)을 금지했다. 이에 명의 만력제 때 조운총독을 지낸 왕종목은 남쪽에서 수도로 곡물을 운반할 때 대운하뿐만 아니라 바다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황하의 범람은 대운하의 원활한 통행을 주기적으로 위협했고, 훗날 중국을 방문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증언했듯이 대운하는 지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선박들로 교통 체증이 일어날 정도로 미어터지는 상황이었다.
왕종목의 제안은 어찌 되었을까? 왕종목은 실각했고, 중국은 바다로 나아갈 기회를 또다시 포기했다. 표면적 원인은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저자는 그 진정한 원인을 마테오 리치가 제기한 “바다와 해안을 침범하는 해적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는다. 명과 청은 모두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는데, 동남 해안에서 창궐한 왜구나 임진왜란의 발발, 유럽 무장 세력의 진출 등으로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21세기 중국의 ‘해양 굴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684년, 청의 강희제는 상해(상하이), 영파(닝보), 하문(샤먼), 광주(광저우)에 각각 해양 무역을 담당할 해관을 설치하도록 허용했다. 전례가 없는 수준의 개방적 조치였는데, 전해에 대만의 정씨 세력을 무너뜨린 자신감의 발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서양인들은 지속해서 추가로 문호를 개방하라고 요구했고, 강희제의 손자 건륭제는 네 곳의 해관 중 세 곳의 문을 닫는 것으로 응수했다. 건륭제에게는 통상에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바다에서 오는 위협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당시에 청은 굳이 해양으로 진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조부 강희제가 강남으로 여섯 차례 순행한 것처럼 건륭제도 강남을 여섯 차례 방문했다. 강희제의 남순이 민심을 달래고 치수의 상황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면, 건륭제의 남순은 대운하를 따라 내려오는 유람의 성격이 강했다. 건륭제의 강남 순행은 대운하의 상인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황제를 융숭하게 대접함으로써 명예와 특권을 얻었다. 건륭제 또한 남순을 통해 강남의 유력자들과 유대를 다지면서 안정되고 통합된 제국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었다. 대운하 시대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저자는 중국이 해양 진출을 ‘주저’한 이유로 흔히 꼽히곤 하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논리, 즉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했기에 해양으로 진출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지닌 부족한 설득력이 대운하를 통해 높아질 수 있다고 본다. 대운하가 광대한 제국 내에서 남북 간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전함으로써 균형 발전을 유도해 ‘결핍’을 못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중국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해양 정책을 추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은 근래에 들어 영락제 시절에 아프리카까지 도달했다는 정화 함대의 원정을 재조명하는가 하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통해 육상 실크로드와 나란히 해상 실크로드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남중국해의 영유권 주장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신중화주의적 프로파간다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상황에서 대운하 시대의 흥망성쇠를 되돌아보고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해양 대국으로 거듭나려는 21세기 중국의 ‘해양 굴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추천평

“옐로 차이나(Yellow China)에는 해양 문명이 없다.”라는 세계 역사학계의 고정관념은 교역과 교류, 조운과 안보라는 대내외적 영역을 포괄한 거시적 조망과 역사적 실상에 대한 저자의 정밀한 탐사로 여지없이 무너진다. –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대운하 시대’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조영헌 교수가 처음일 것이다. …… 근대 중국은 자기 세계 내부에 갇힌 낡고 정체된 제국이 아니라 사상과 인력, 물자 등이 활발하게 오가는 열린 세계라는 사실이 흥미롭게 제시된다. –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서양사의 이론과 지식을 중국사와 교차해 가며 씨줄과 날줄로 삼아 대운하 시대라는 정교한 직물을 짜내는 솜씨는 가히 경탄할 만하다. 근현대 세계사를 보며 “아시아는 왜? 중국은 왜”라는 의문을 한 번쯤 품어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강희정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소장

남다른 연구자가 오랜 준비 끝에 내놓은 특별한 역사 이야기이다. …… 중국의 내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서구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을 제시하여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비교해 보는 기회까지 제공한다. – 구범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시아 문명권, 곧 차이나 내부의 연결망을 생생히 보여 준다. …… 지구를 한 바퀴 돌아 거미줄 같은 운하망을 타고 차이나를 한껏 누비는 기분이다. 다 읽고도 학문적 감흥이 쉬이 가시지 않는 책이다. –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원고를 읽으면서, 근대 전환기 서양 중심의 역사 이해를 극복하는 눈부신 빛이 터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이 책을 통해 우리 곁에 연구력과 문장력을 함께 갖춘 학자가 또 한 사람 탄생했다고 확신한다. –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목차

추천의 글

여는 글 중국의 ‘해양력’과 ‘대운하 시대’
정화는 해양 중국의 선구자인가? / ‘대항해시대’와의 비교 / ‘유럽의 성공’ 때문인가? / 유럽 중심주의와 중국 중심주의를 동시에 경계하면서 / ‘해금’도 ‘개해금’도 아닌 중국의 관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대운하를 통해 국내와 외부의 물류 추세를 가늠할 수 있게 된 시대 / 협의의 대운하 시대의 두 가지 특징 / 이 책의 구성과 서술 방식

1장 1415년, 영락제가 북경 천도를 준비하며 대운하를 재건하다
청강포의 개통과 ‘파해운’ / 파해운 / 정화 원정단이 가져온 기린 / 쿠데타와 살육의 어두운 그림자 / 북경 천도 / 북경 천도 성공의 시금석, 대운하 재건 / 북경 천도와 쿠빌라이 칸 / 왜 영락제는 해운을 금지했을까? / 대운하로 조운이 일원화된 의미 / 정화 파견과 조공국의 증가 / 왜 중국은 정화 이후 바다로의 진출을 주저했는가? / 1415년, 포르투갈의 세우타 점령

2장 1492년, 휘주 상인이 염운법의 변화로 새로운 기회를 잡다
1492년, 섭기의 운사납은제 실시 / 북변으로의 군향 조달과 연계된 명대의 소금 유통법 / 1449년, 토목보의 변을 통한 ‘육상 제국’화 / 개중법의 첫 번째 수혜자, 산서 상인과 섬서 상인 / 회양 지역의 중심 도시, 양주 / 휘주 상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 운사납은제 / 휘주 상인의 대외 진출과 은 경제의 확산 / 환관 노보의 파견과 염상계의 판도 변화 / 휘주 상인의 선택 / 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 휘주 상인이자 해상인 왕직이 시사하는 바 / 다시 1492년을 생각하다

3장 1573년, 조운총독 왕종목이 바닷길로 조운을 시도하다
1573년, 바다에서 조운선이 전복되다 / 해운에 대한 비방 의견 / 북경 민심을 달래기 위한 세 가지 해결책 / 장거정이라는 정치적 변수 / ‘파해운’, 해운이 다시 정지되다 / 1573년의 해운 ‘요절’이 지닌 세계사적 의미

4장 1600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대운하를 평가하다
1600년,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의 첫 만남 / 1600년, 리치는 왜 남경에 있었나? / 대운하를 이용하여 북경을 왕래했던 리치 / 외국인 조공단이 탑승한 선박 / 조운선의 ‘편법’ 운용을 발견한 리치 / 마테오 리치의 난제 / 바다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 (1) 왜구 / 바다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 (2) 임진왜란 / 바다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 (3) 유럽의 무장 세력 / 서광계의 변경 인식 / 1608년 무렵에 그려진 중국인의 해양 지도 / 1600년의 세계사적 의미

5장 1666년, 소금 상인 정유용이 천비궁을 다시 건립하다
1666년, 양주 천비궁의 이전 건립 / 정유용의 천비궁 재건 이야기 / 마조 신앙의 형성과 확산 / 해신에서 하신으로의 변화 / 위치 변화를 통한 양주 천비궁의 기능 회복 / 대운하의 말뚝 제거 사업 / 정유용의 노림수 / 아담 샬의 사망과 양광선의 공격 / 1666년, ‘경이로운 해’

6장 1684년, 강희제가 대운하를 이용해 강남 순방을 시작하다
1684년, 강희제의 첫 번째 강남 순행 / 남순의 목적 / 하공과 조운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묘책 / 네 곳의 해관 설치 / 정씨 해상 세력의 계보 / 천계령의 부작용 / 해양 교역에 대한 새로운 활력소 / 안보와 이윤의 ‘절충’ / 황제의 남순로가 된 대운하가 의미하는 것

7장 1757년, 건륭제가 남순 이후 서양 선박의 해관을 하나로 줄이다
영파에 출현한 영국 선박의 정체 / 제2의 마카오가 될 것을 우려하다 / 건륭제의 2차 남순과 그 배경 / 건륭제와 양주 염상의 유착 / 1757년, 네 곳에서 한 곳으로 줄어든 바다의 창구 / 건륭제의 두려움? / 우려와 두려움의 실체 (1): 늘어나는 해외 이주와 ‘불온한’ 서양 세력과의 결탁 / 우려와 두려움의 실체 (2): 기독교의 내지 전파와 확산되는 기독교 네트워크 / 왜 광주인가? / 서북 변경 정책과 연동하는 해양 정책

8장 1784년, 건륭제가 대운하를 이용해 마지막 강남 순행을 마치다
1784년, 건륭제의 여섯 번째 남순 / 마지막 남순에 대한 양주 상인의 아쉬움 / 1784년의 광주 교안 사건 / 서양인과 회교도의 연계 가능성에 노심초사하는 건륭제 / 미·중 교역의 시작과 ‘아메리칸 임팩트’ / 레이디 휴스호 사건의 여파 / 대운하 시대의 종점, 1784년

맺는 글 ‘대운하 시대’의 종결, 그 이후
‘주저’하다는 표현을 주저한 이유 / 해양 진출 동기의 결핍? / 북방 민족의 위협? / 남북 통합의 아이콘, 대운하를 통해 본 결핍론과 위협론 / 바다의 통제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과 ‘통제적 개방’ / ‘바다 공포증’에 대한 예의 바른 해석 /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 대운하’와 일대일로 정책 사이의 연관성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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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조영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2003~2004년)와 하버드-옌칭 연구소의 방문 연구원(2004~2006년)을 거쳐, 2006년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논문 「대운하와 휘주상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15년간 ‘인문학과 성서를 사랑하는 모임(인성모)’을 주선해 왔으며, 2021년부터 고려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북아시아 민족 및 지역사 연구회’를 구성하여 공동 연구 중이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앞으로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것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와 『옐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주제로 보는 조선시대 한중관계사』(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하버드 중국사 원·명: 곤경에 빠진 제국』과 『바다에서 본 역사: 개방, 경합, 공생 — 동아시아 700년의 문명 교류사』(공역) 등이 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21년 8월 25일

ISBN 978-89-374-4456-2 | 가격 19,600원

독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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