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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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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원제 Schriften zur Kunst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8년 3월 28일

ISBN: 978-89-374-0244-9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292쪽

가격: 16,000원

분야 괴테 전집


책소개

‘예술의 자율성’과 ‘이상적인 미’에 대한 심오한 탐구하이네, 루카치, 아서 단토 등 후세의 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대문호 괴테의 전 생애에 걸친 예술론의 집성!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예술론』이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예술론』은 국내 최초의 번역본이다. 이 책은 괴테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1771년부터 말년인 1832년까지 활동기 전반에 걸쳐 피력한 예술론의 집성이다. 그의 예술론은 회화, 조각, 건축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며, 건축물의 순례 기록, 단편소설, 전기적 스케치에서 서평과 학술적 논문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에서 고전주의, 의고주의에 이르는 사상의 변천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괴테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괴테의 예술론은 단순히 괴테의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와 분석 미학자 아서 단토(Arthur C. Danto)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 20세기 미학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민음사 판 『예술론』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판본인 함부르크 판 괴테 전집 12권 『예술론(Schriften zur Kunst)』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 민음사는 1997년부터 10년간 괴테전집 발간을 목표로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친화력』, 『색채론』, 『서동 시집』 등을 펴냈다. 앞으로 『시 전집』, 『시와 진실』, 『잠언과 성찰』 등의 작품들이 출간될 예정이다.


목차

독일적 건축술에 대하여줄처의 「예술의 근원과 본성 그리고 적용」(라이프치히, 1772)영국의 동판화괴테의 편지 가방에서단순한 자연 모방, 마니어, 양식건축술(1795)≪프로필레엔≫ 서문라오콘에 대하여예술 작품의 진실성과 개연성에 대하여미술품 수집가와 그의 친구들빙켈만마지막 전시회(1805)미론의 암소시인으로서의 로이스달라인 강과 마인 강가의 예술과 고대요제프 보시피갈리아의 부조고대와 현대독일적 건축술에 대하여만테냐가 그린 「카이사르의 개선 행렬」지오토의 「최후의 만찬」엑스테른슈타이네그리스도작품 해설-예술의 자율성과 이상미


편집자 리뷰

◆ 가슴으로 느끼는 자연의 숭고함을 강조하다-초기 예술론 젊은 시절 괴테는 공허한 형식미와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질풍노도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질풍노도 운동은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로, 섭리의 질서에서 파괴적 카오스로, 프랑스적 고전 비극에서 셰익스피어적 성격 비극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시대정신의 반영이었으며, 청년 괴테는 그 중심에서 자연의 소박함과 신선함을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당시 그의 예술관 역시 질풍노도 운동의 선명한 흔적을 내보이는데, 창조력의 핵심을 오성이 아닌 감정으로 여기고 예술 작품의 수용에 있어서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 ‘분석’이 아니라 ‘느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적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에서 탈피해 예술과 문학이 독일의 민족성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772년에 쓴 「독일적 건축술에 대하여」에서 괴테는 슈트라스부르크 성당을 찬양하며 이 건축물의 독일적 ‘단순성’과 ‘자연스러움’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배한 의고주의의 규칙이나 로코코의 인위성에 대립되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당대 예술의 허식과 과장을 공격하고 “강하고 거친 독일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례의 진실과 아름다움의 가장 심오한 느낌”을 찬미한다.  괴테의 초기 예술론에 나타나는 자연관은 줄처의 「예술의 근원과 본성 그리고 적용」에 대한 평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글에서 괴테는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무해한 것으로 순치하는 줄처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는 것은 자연의 계획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사납게 날뛰는 폭풍, 홍수, 불비, 지하의 이글이글 타는 불, 모든 요소에 들어 있는 죽음도, 풍성한 포도원과 향기를 풍기는 오렌지 숲 위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영원한 삶의 진정한 증인이 아닌가?

이처럼 젊은 날 괴테에게 자연은 무한한 힘이며 이 힘은 탄생과 성장뿐 아니라 파괴와 죽음, 추와 악도 내포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있어서도 우아한 것, 매끄러운 것보다 특징적인 것, 거친 것을 부각시킨다. 자연과 예술의 근저에 있는 압도적인 카오스적 힘의 강조를 통해 초기 괴테는 아름다움의 미학보다 숭고의 미학에 접근한다고 할 수 있다.
◆ “감정의 인간”에서 “눈의 인간”으로-중기 예술론 1786년 괴테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바이마르에서 거주하는 동안 괴테를 사로잡았던 불안과 초조는 이탈리아의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말끔히 가셨고,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다.”라고 느꼈다. 이 여행에서 괴테는 다양한 고대 미술품을 감상하며 고전주의에 눈을 뜸으로써 문학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감정의 인간”에서 “눈의 인간”으로 거듭났다는 그의 표현은 괴테 예술론의 중점이 주관성에서 객관성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한다. 예술에 관한 글의 어조도 더 이상 열광적이거나 풍자적이지 않고, 차분하고 명료해진다. 예술관이 변화함에 따라 그의 자연관 역시 달라진다. 이 시기 괴테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의 무한한 힘의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형태, 법칙, 이념의 관조와 인식이다. 괴테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단순한 자연 모방’을 비판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며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로 ‘양식’을 내세운다. 이 ‘양식’은 예술가가 스스로 만들어 낸 주관적인 표현 방식인 ‘마니어’와도 다른, “인식의 가장 깊은 기초, 사물의 본질에 토대를 둔” 미적 직관이다.  1798년에서 1805년 사이 괴테의 예술론은 점차 의고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이 시기 괴테는 고대 예술에 이념의 직관화로서의 양식과 자연의 이상화로서의 예술미가 모범적으로 구현되어 있다고 보고 그것을 현재에도 유효한 규범으로서 제시한다. 괴테는 의고주의적 예술 프로그램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정기 간행물 ≪프로필레엔≫을 창간하고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인물을 표현하라는 주제로 미술 공모전을 개최하지만, ≪프로필레엔≫은 별다른 반향을 낳지 못한 채 1800년 폐간되고 미술 공모전 역시 1805년 막을 내린다.
◆ 고전적인 것은 건강하고 낭만적인 것은 병적이다-후기 예술론 미술 공모전이 외면당함으로써 당대 미술의 흐름에 직접 영향을 미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괴테는 독단적인 의고주의를 접고 예술계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포기한다. 당시는 이미 낭만주의의 거센 조류가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의고주의를 벗어났다 해서 괴테가 낭만주의를 호의적으로 바라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고전적인 것은 건강한 것이고 낭만적인 것은 병적이다.”라고 했듯 괴테는 낭만주의 회화에 나타나는 죽음에의 경도와 종교적 알레고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고독일 예술에 심취하여 이론에서 역사로 관심을 옮긴 뒤에도 괴테는 “나로서는 폭넓고 심오하며 항상 생동하는 그리스 작가와 조각가의 작품보다 더 입에 맞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고대 지향적인 취향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후기에 괴테는 미론의 암소, 피갈리아의 부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만테냐의 「카이사르의 개선 행렬」 등 다양한 조형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이 명작들의 진솔한 건강미를 찬양하고 예술의 자율성과 양식의 추구에 있어 고전주의적 예술론의 기본 관점을 고수한다. 괴테에게 예술이란 충만한 감각적 미와 내재적 상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종교적·애국주의적 알레고리에 얽매이는 낭만주의가 배태한 훗날의 위험을 예견했기에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리스 로마의 균형 잡힌 시대를 향했을지 모른다.

세계관의 명료성, 세계 이해의 쾌활함, 전달의 가벼움 등이 우리를 매혹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 작품에서 가장 고상한 소재와 가장 품위 있는 내용에, 확실하고 완성된 처리 방식으로 성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고 우리가 이제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왜 언제나 그리스에서 출발하고 항상 그곳을 가리키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그리스인이 되라! 그리스인이!  -「고대와 현대」에서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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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아들의 교육에 헌신적이던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읽었다. 1757년,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문학과 미술에 더 몰두하였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재학 당시 헤르더를 통해 호머, 오시안, 그리고 특히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질풍노도 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다. 1772년 베츨라의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 생활을 하던 중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소설은 당시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나, 절망적인 사랑으로 인한 자살이 유행하기까지 했다. 1775년 카알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하고 교육, 재정, 건설, 군사, 산림 등 온갖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독일 문학계의 또 다른 거장 쉴러를 만나 그와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대표적인 교양소설이다. 1805년 쉴러의 죽음으로 “존재의 절반을 잃은 것 같다.”라고 말할 만큼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에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색채론』(1810),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1), 『이탈리아 기행』(1829) 등을 완성했다. 스물네 살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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