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그늘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1년 3월 26일 | ISBN 978-89-374-1377-3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5x205 · 324쪽 | 가격 14,000원

분야 한국 문학

책소개

 

여성의 삶에 드리운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존재를 건 각오, 여전히 유효한 용기

편집자 리뷰

이혜경의 네 번째 장편소설 『사소한 그늘』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사소한 그늘』은 1970년대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래 자란 세 자매의 이야기다. 다정하고 정밀한 시선으로 삶을 슬픔을 껴안는 소설가 이혜경은 『사소한 그늘』에서 차분한 서술과 유려한 이미지로 세 자매의 일상 속 희로애락을 그려 낸다. 경선, 영선, 지선 세 자매는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이지만, 그 시절의 많은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결혼이라는 같은 선택지에 다다른다.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욕망을 저버리고 꿈을 포기한 채. 좌절과 순응을 배운 어린 시절은 세 사람에게 짙은 그늘로 남는다. 그 그늘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력한 엄마에 대한 기억이고, 여성의 역할을 가정 안으로 제한하는 사회의 분위기이기도 하다.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에서 시작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가정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지는 세 자매의 삶에 드리운 그늘은, 오랫동안 사소하게 여겨졌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경선, 영선, 지선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세 자매의 비슷한 듯 다른 삶이다. 어려서부터 욕심 많고 똑똑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 진학에 실패한 첫째 경선은 성실하지만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다. 아득바득 돈을 모아 어떻게든 지민과 수민을 잘 기르는 것이 경선의 새로운 목표다. 철없지만 유쾌하고 낙천적인 둘째 영선은 결혼 생활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는다. 현실 감각은 떨어지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편과의 일상이 마음에 든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막내 지선은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입학하지만 대학에서 만난 의대생 진오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사소한 그늘』은 세 자매의 삶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자라난 여성들이 마주했던 고민과 선택 들을 보여 준다. 당시 여성들의 삶에 놓였던 선택지는 무엇인지, 그 안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결혼 이후까지의 일상적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다. 옛 골목, 낡은 집 한 켠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은 슬프지만 유쾌하고, 친숙해서 애틋하다. 하지만 소설은 이들의 생애를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유효한 용기

지선은 자신의 삶에 드리운 그늘을 걷어 내기로 다짐한다.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계속하던 지선이 새로운 시작을 결심한 이유는 경선의 딸인 조카 수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서다. 수민과 하룻밤을 보내면서, 지선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진오의 모습이 수민의 기억 속에 먼지처럼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민을 향한 경선의 체벌이, 자신에게 아버지의 폭력이 그랬듯 아이의 삶에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자신을 지켜보는 수민을 위해서라도, 지선은 먼지같이 삶에 끼어든 폭력을 떨쳐 내고 빛을 향해 가기로 결심한다. “크든 작든 저마다 해여서, 서로에게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곳으로.” 지선의 삶의 궤적을 따라 온 독자들이라면 알 수 있다. 사소해 보이는 지선의 행동은 소설가 김혜진이 말했듯 “존재를 걸 만큼의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것이 세 자매의 이야기가, 지선의 용기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 추천의 말

이 소설은 나보다 내 어머니 세대에 가까운 경선과 영선, 지선 세 자매의 이야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졌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뿌리 깊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침묵하고, 망설이고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도저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던 삶을 마침내 되찾으려는 막내 지선의 용기 있는 결단에 다다르면 우리는 이 소설이 다만 우리 윗세대 여성들의 상실과 좌절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선의 삶에 깃들어 있는 고요하고 끈질긴 갈등과 저항의 면면들을 따라가는 것은 아프지만 벅차고 안타깝지만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각자의 삶에 드리운 그늘의 너비와 깊이는 각기 다르지만 그 그늘을 벗어나는 데에는 존재를 걸 만큼의 큰 각오가 필요하고,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금 깨닫기 때문이다.

-김혜진(소설가)

 

■ 본문에서

 복숭아 같은 엉덩이를 제 동무 앞에 환히 드러낸 채 맞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아이가 이부자리를 적시는 횟수는 표가 나게 줄어들었다. 그는 그토록 효과적인 방식을 터득해 낸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북어하고 마누라는 사흘에 한 번씩 패랬다.

거기에 그는 한 가지 덧붙였다. 부모 말 안 듣는 아이도.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 또한 어릴 적 아버지의 매를 맞고 자랐다. 매 맞는 게 무섭고 싫어서, 매 맞을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때리기는커녕 언성도 높이지 않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 상순이 아이가 매 맞는 걸 보고 난 밤이면 무서운 꿈에 시달린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혹시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므로 흘려 넘겼을 것이다. 여름날 저녁밥을 먹고 빨갛게 잘 익은 속살을 드러낸 수박을 향해 뻗치려는 제 손을 아이의 마음이 억지로 붙들고 있다는 것, 제가 안 먹는 걸 식구들이 눈치채지 않게 먹는 시늉만 낸다는 것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변소에 가서 제 입으로 ‘쉬’ 소리를 내 가며 몸 안의 물기를 억지로 짜내려 한다는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오줌을 짜내느라 제가 입으로 내는 ‘쉬’ 소리를 들으며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면 아이 자신이 바람 새는 풍선처럼 후줄근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우리 지선이, 이제 다 컸구나. 밤에 오줌 싸지 않는 걸 보니. 질척한 이부자리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느 날, 엄마의 칭찬을 듣는 아이의 귀에 다시 그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도. (100~101쪽)

 

수민이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지선은 수민 옆에 누워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다.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처음 진오에게 느꼈던 친밀감의 정체, 뭔지 모르게 익숙하던 그 느낌을. 어떻게 그렇게 눈을 감고 있을 수 있었던 걸까. 진오의 섬약한 체구, 크지 않던 목소리가 위장복 노릇을 한 걸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한가롭게 걷던 들판에서 문득 위장복 차림에 총검을 치켜든 험악한 사람을 만난 듯한 섬뜩함.(268쪽)

 

수민이 아니었더라면 진오를 끝내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잊거나 애써 덮어 주었던 진오의 어떤 면을 볼 수 있었을까. 지선은 잠든 수민을 바라본다. 꿈을 꾸는지 닫힌 눈꺼풀 안쪽 안구가 도록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경선과 진오가 정삼각형의 세 변으로 서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닮게 한 것일까. (271~272쪽)

 

그 말간 눈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엄마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 영민한 아이가 입 밖에 내지 못한 생각은 아이의 가슴에 납덩이의 무게로 얹힐 것이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걸 보고 느끼는지, 어른들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한순간에 알아차리고 그걸 가슴에 담아 두는지 지선은 잊지 않았다.

(……)

오래전, 이모네 집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이모가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사는 일이 너무 적막하고 막막해서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장난친 거구나. 20여 년 뒤에야 깨닫다니.

그때 이모네 집에서 누렸던 평화는 먼지 안 묻게, 예쁜 보자기에 싸 두고 싶은 기억이었다. 어쩌면 수민도 20년쯤 뒤에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 몰랐다. 그래도, 그 기억엔 먼지처럼, 오점처럼, 그날 밤의 소란이 묻어 있을 것이다. 평화로운 기억만 주고 싶었는데, 목이 메었다. (315~316쪽)

 

종말 앞둔 지구에서 사과나무 묘목을 챙기듯, 지선은 저녁상을 준비한다. 가리라, 곧 가리라 다짐하면서. 또 다른 해가 있는 곳, 크든 작든 저마다 나름대로 해여서, 서로에게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곳으로. 이미 깃든 그늘을 걷어 내며.(319쪽)

목차

1장 그토록 쉬운 오해

2장 문 너머, 정체를 알 수 없는

3장 우아한 생, 그 언저리

4장 나의 동그라미는 너의 그것과 달라서

5장 나방이 펄럭거린 자리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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