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과거를 직시하는 웃음기 없는 얼굴
정확한 울음을 통과한 끝에 건네는
충분한 안녕
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가 민음의 시 279번으로 출간되었다. 수상과 함께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그 이름을 알린 시인 이기리는 첫 시집에서 담담하되 물러서지 않는 시선으로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고, 당시 어렴풋하게 떠올랐던 감정들에 형체를 부여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진 것들과 다가올 것들에 향해 아프지 않은 안부 인사를 건넨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한다는 제목과 달리, 시집 초반부의 시들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차마 웃을 수 없는 어린 화자의 상황이다. 시인은 자신을 향한 교실 안의 폭력과 차가운 현실을 더 없이 구체적인 묘사로 그려 낸다. 지워 버릴 수도 있는 장면을 끝까지 눈을 뜨고 지켜보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빈 자리의 구겨진 자국을 오래 응시한다. 4부의 시 제목이기도 한 ‘괜찮습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라는 인사말들은 이 물러섬 없는 돌아봄의 결과물이다. “마주볼 용기가 가장 어렵고 필요한”(유계영) 지금, 이기리가 그리는 풍경은 가장 어려운 것을 해낸 바로 그 지점에 독자들을 데려다 놓는다.
■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반 아이들의 시선이 허공에 뜬 내 몸을 향해 쏠렸다
어느새 교실 문 너머 몰린 무리들이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입꼬리들이 나를 천장까지 잡아당기는 기분
어때? 재밌지? 재밌지?
―「구겨진 교실」에서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라는 말은 ‘너의 웃음을 나도 좋아한다’라는 동조일 수 있지만, 갖지 못한 ‘그 웃음’에 대한 선망일 수도 있다. 이기리의 시에서 ‘그 웃음’은 마치 ‘당신들의 천국’처럼 내가 가질 수 없는 무엇이다. 시 속 어린 화자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다. 교실부터 복도, 화장실까지 괴롭힘이 들러붙는 와중에, 잔인하게 치켜 올라간 아이들의 입꼬리는 나를 천장까지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그런 화자에게도 ‘너’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 빈 교실에 함께 남아 있는 너,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적어 전하는 너, 함께 있는 시간을 계속하고 싶은 너. 그러나 ‘너’의 웃음은 알 수 없는 채로 남고 나는 아직 네가 듣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차마 웃을 수 없는 자신의 낯선 표정을 숨기기 위해 서랍을 열면, 그 속엔 “이미 숨겨 두었던 정체들”(「싱크로율」)이 가득하다. 이기리의 화자는 웃음을 짓는 대신 구름을 보며 “비를 맞는 표정”을 짓는다. 붉어진 저녁 하늘을 보며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하고 생각한다.
■ 충분한 안녕
손목을 심장 가까이 구부렸다가
아이들을 향해 원반을 던진다
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원반은 빛의 모서리들을 껴안고
아프지 않은 모양이 된다
―「충분한 안녕」에서
같은 웃음을 지을 수 없어서일까, 이기리의 시 속에서 화자는 자주 혼자 남아 있다. 빈방에 문을 닫은 채 홀로 누워 있고,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유리온실」) 숲에 혼자 남기도 한다. 그 공간은 마치 유리온실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현실에서도 화자가 보는 것은 누군가가 떠난 “구겨진 자리”(「오로라」), 함께 있지만 입속에서는 “차갑고 딱딱한 것이 깨”(「재회」)져 버리는 한순간, “당신과 멀어질수록 환해지는”(「빛」)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혼자 남아 “더 정확한 울음”(「번안곡」)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 비로소 시인은 “아프지 않은 모양”(「충분한 안녕」)으로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구겨진 얼룩 위에 조금 다른 무늬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진 주름을 펼 수는 없으니 그것은 새롭게 구겨지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의 말은 당신에게 온전히 가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물러섬 없이 마주한 끝에 시인이 건네는 안부 인사는 그만큼 더 단단하고 따뜻하다.
■ 본문에서
나의 외투가 외롭게 걸려 있는 날이 많아질수록
겨울방학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감고 있던 파란 목도리를 벗어
네가 늘 앉던 자리에 올려 두었다
모르는 목소리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주머니에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코러스」에서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서
그렇구나,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과
그렇지만, 말하며 다시 데려오고 싶은 순간들
추분과 춘분의 차이를 알지 못했고
우리는 마음을
척력으로만 쓰는 일도 그만두었다
괜찮다고
반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얼른 건강해져서 나랑 같이 맞추러 가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단지 반지 하나를
손에 오랫동안 쥐고 있다가
식탁에 놓는 소리를 듣고 싶을 뿐이었다
죽어 본 적 없는 꽃에선 향기가 났다
―「꽃과 생명」에서
눅눅하고 주름진 베갯잇을 펴 보지만
한번 구겨진 자리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조금 다른 무늬를 가져 보는 수밖에 없다
아직 이 침대에서 우리가 매일 밤 나눴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는데
―「오로라」에서
겨울엔 자주 순록이 달려오는 상상을 해 밤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구불구불한 뿔을 닮은 우리의 눈빛은 또 얼마나 많은 얼굴에 구멍을 낼지
순록이 눈과 얼음 사이에 낀 이끼를 먹는 동안
우리는 매일 도시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보이지 않는 별자리를 손으로 그린다
우리는 한 사람을 질리게 미워해서 만든 노래를
입속에서 돌돌 굴려 보기도 했으니까
―「더 많은 것을 약속해 주는」에서
■ 추천의 말
“이 시집의 결정적인 매력은 이상한 균형감에서 나온다. 정직하되 거칠지 않고, 섬세하되 나약하지 않은 정서에서 올라오는 언어는 어두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밝으면서도 슬픔을 놓지 않는 이상한 풍경 앞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김언(시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 사이 행간을 벌려 놓고, 여전히 ‘진행 중인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태도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는 마주볼 용기가 가장 어렵고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계영(시인)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끝까지 읽었을 때, 이상하게도 이 사람을 변호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가 그리는 시 속 화자는 세상에서 늘 져 온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납작해지느라’ 온 시간을 쓴 사람이라고. 멀끔한 꼴은 아니지만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박연준(시인)
1부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가넷 —탄생석 13
여름 성경 학교 15
두 개의 얼굴 17
어린이날 18
번안곡 21
올해 마지막 태풍 23
명당을 찾아라 25
구겨진 교실 28
코러스 31
거기서 만나 34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37
싱크로율 40
정물화를 그리는 동안 43
계절감 45
2부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
방생 49
유리온실 50
러브 게임 52
? 54
성실한 굴레 57
우리 집에는 식물이 없다 60
염소가 사는 좌표평면의 세계 63
호수의 아침 68
긴긴 70
사랑 72
3부 부르지 않아도 태어나는 이름이 있었다
일시 정지 75
꽃과 생명 77
유실 —어느 날의 후렴 80
다른 모습 84
비밀과 유리병 85
대화의 자리 87
좋은 화분 90
자각몽 92
오늘 대출했으므로 당분간 아무도 빌릴 수 없다 94
떠올릴 만한 시절 96
궐련 98
월간 미식회 100
바구니 하나 103
어느 하루 104
그래도 다 듣는다고 했다 106
강물에 남은 발자국마저 떠내려가고 107
4부 우리가 더 아름답게 지워질 때까지
빛 111
저녁의 대관람차 112
오로라 115
너는 꼭 가지 않아도 돼요 116
더 많은 것을 약속해 주는 118
괜찮습니다 121
재회 124
백년해로 126
식기 전에 128
더 따뜻한 차를 130
우리가 아직일 때 132
세밑 134
누나에게 135
충분한 안녕 138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 140
작품 해설–조대한(문학평론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