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태천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0년 11월 13일 | ISBN 978-89-374-0897-7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72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슬픔의 소화기관을 지나며
흡수되고 저장된 삶의 예감들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매일에서 슬픔의 목록을 보는 사람이 있다.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만큼의 슬픔이 더해진다는 것. 거꾸로 말하면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살아 내야 할 슬픔이 하루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슬픔의 소화기관”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마음은 슬픔을 소화하도록 진화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가 있다고, 슬픔이 관통한 몸에서 시가 탄생한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모든 시가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슬픔에는 시적인 것이 잠재되어 있다. 여기, 시가 되려는 슬픔의 순간이 지금 막 깨어나려 한다. 여태천 신작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2008년, 시집 『스윙』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관중 없이 홀로 마운드에 선 올해의 김수영”이라 불렸던 여태천은 ‘야구시’라는 개성적 호명을 이끌어 내며 치열한 시단에 전에 없던 위치를 만들었다. 이후 출간한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에서는 침묵과 기다림이라는 정적인 에너지를 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명랑한 운동으로 탈바꿈시키며 완숙한 서정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2020년의 여태천은 오늘이 내일로 사라져 가는 감정에 깃듯 슬픔의 탐구자가 되어 돌아왔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 어긋난 마음들, 미지근하게 식어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진 “삶의 허기”를 직시하는 그의 눈빛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편집자 리뷰

■ 내일이 없는 사람들
‘우리’는 종종 비어 있다. 여태천 시인에게 ‘우리’는 오늘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일이 오지 않도록 시간을 멈추고 싶어 한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은 오늘을 사수하기 위한 애끊는 노력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그들은 “얼릴 수 없는 기침 같은 말”을 아쉬워한다.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는 기침 같은 말이 없어지고 말 오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맹세코 오늘을 지키기로 했네./ 내일이 오지 않도록/ 오늘을 위해/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는 우리를 지켰네.” 이들에게 내일은 사라진 오늘에 대한 증거물에 불과해 보인다. ‘내일은 없다’거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산다’는 말은 관습적이리만큼 일상적인 표현이지만 ‘오늘의 공동체’에게 이러한 말은 내일 속으로 사라져 버릴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실체적 슬픔이다.

■ 쌀쌀하지만 상쾌한 실험적인 단어

그러나 악착같이 붙잡고 놓아 주지 않으려 해도 오늘은 내일에 자리를 내어주고 이웃이자 시민으로 만났던 우리 역시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만다. “깊은 밤 잿더미 속에 불씨를 감추어야 하는/ 나이”에 이르면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달아나는 속도는 더 빨라지고 더 선명해진다. 오늘의 공동체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사라지는 현재에 대한 두려움을 ‘저녁의 감정’으로 표현한다. “아침의 이슬과 꺼지지 않는 촛불/ 어렵지만 느낌을 전해 줄 수 있는/ 뭐랄까/ 실험적인 단어가 필요해./ 쌀쌀하지만 상쾌한” 하루의 끝에서 도래하는 또 다른 하루를 기다리는 마음의 온도는 쌀쌀하지만 상쾌하다. 집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한겨울 추위가 아니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조금 더 밖에 머물게 만드는 추위. “슬픔을 오래 쌓아 두면 몸이 상한다고들 했지만” 온도 차는 슬픔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여태천이 관조하는 슬픔의 목록을 읽은 독자들은 시집의 어느 화자처럼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리 싫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 감히 슬프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슬픔을 소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라고.

■ 시인의 말

날씨에 대한 생각을 하자
구름이 하나둘 떠오르고
공기가 축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하얘졌다.

■ 해설에서
시인은 온전한 ‘나’인 채, 가족·이웃·시민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모색한다. 삐걱댈 수밖에 없다 해도 그러지 않으면 시민은커녕 “이웃도 가족도 잊은 채/ 우리가 외계 생물체”가 되어 버리는 탓이다. 문제가 있는데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 “오늘의 내가 내일의 우리가 되는” 전환의 계기는 생겨나지 못한다. “옥상으로 전광판으로 타워크레인 위로” 결국은 “하늘로 올라”간 한 사람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하나같이 외롭다는 표정”으로 오직 개인의 내부로만 침잠하는 사회를 그는 「지상의 감옥」에서 묘파한다. 여태천은 우리에게 수인으로 영영 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봄은 오지 않았다/않는다.”라고 적힌 문구를 지우고 새로운 글귀를 적어 넣을 것인가를 묻는다. 명백히 그는 후자를 지지한다.
-해설에서/ 허희(문학평론가)

■ 본문 중에서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더라.참혹한 일을
언제나 그렇듯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알아채고
일그러진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구나.
-「햇빛 한 줌」 부분

우리는 맹세코 오늘을 지키기로 했네.
내일이 오지 않도록
오늘을 위해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는 우리를 지켰네.
-「우리가 우리를 읽을 때」 부분

풍선처럼 떠오르며
우리를 통과하고 있는
저건 운명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피스키퍼가 아니랍니다.
-「태양의 기울기에 대한 만국 강아지들의 생각」 부분

세상은 외롭고 쓸쓸해서
밍루 위에서도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매일매일 제 얼굴을 들여다보듯
위태롭게 한 사람의 내일을 읽으릴라.
-「희망버스」 부분

목차

시인의 말

1부
암흑물질
하는 일과 있는 것들
휴일의 감정
어디 있을까
아주 작은 실수
매직 쇼
읽을/힐 수 없는
Out There
Out here
잃어버린 열두 개의 밤
운명이라고 하기엔
고양이군의 엽서
겨울잠
희망버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낫아웃
말과 사물의 그늘

2부
하쿠나 마타타
보호구역
이웃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우리를 읽을 때
유령들
태양의 기울기에 대한 만국 강아지들의 생각
시민의 두려움
이웃이 되어 주세요
목소리들
햇빛 한 줌
혼자이거나 아무도 없거나
안녕에 대해
지상의 감옥
건너는 사람
쓸데없는
빈손
희망고문

3부
발자국
기념일
우정의 세계
끊임없이, 말
손이 크다는 것
연필을 깎으며
어디에 있을까
없는 것보다 못한
두 개의 유리창과 하나의 얼굴
누구의 시간
연기가 필요할 때
모란 작약
쌀을 씻으며
누가 그를 울리는가
우리들의 풍선
프놈 바켕의 일몰
슬픔은 자란다

4부
문 앞에서
이토록 긴 편지
변신
감을 수 없는 두 눈으로
그녀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스투디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메아리
히스토리
그 이후에
외로운 이름들
기억-가만가만
기억-그날 이후
기억의 테크놀로지
두 개의 기억
저기 너머로
문밖에서

작품 해설_오류와 오차를 위한 여정
허희(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여태천

197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국외자들』이 있다. 2008년 제27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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