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순간, 검은 예감

게오르크 트라클 | 옮김 김재혁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0년 8월 30일 | ISBN 978-89-374-7546-7

패키지 소프트커버 · 변형판 140x210 · 228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몰락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움켜쥐고 진실과 마주한 자

실존의 고통을 색채와 음악으로 구현한 표현주의 대표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 대표 시선집

편집자 리뷰

●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시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았다!

“이 아름다운 시 속의 모든 시작과 흘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민음사 세계시인선 46번으로 게오르크 트라클 대표 시선집 『푸른 순간, 검은 예감』이 출간되었다. 게오르크 트라클은 유럽 표현주의 대표 시인으로,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다. 당시 유럽은 전통의 쇠락과 새로운 시작이 길항하고 있었고, 특히 오스트리아는 미술, 음악, 문학, 정신의학, 철학 등 예술과 사상의 전 분야에서 미증유의 탐험과 특이한 문화적 동요가 함께 일어나던 공간이었다. 유복한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건강하고 바른 시민의 삶에 그다지 잘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세기의 전환을 온몸으로 살아 내며 끝까지 ‘몰락하는 자’로서 노래했다. 그의 시에서는 바깥으로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하는 고통, 우울과 전망 없음이 자연의 다채로운 색채와 음향이 뒤섞인 독특한 감각으로 구현된다.

저녁에 박쥐들의 울음소리 들려오고.
두 마리 가라말이 초원에서 뛰어논다.
붉은 단풍나무는 바람에 살랑거린다.
나그네에게 길가의 작은 선술집 나타나고.
새 포도주와 견과들은 맛이 훌륭하다.
어둑해져 가는 숲에서 술에 취해 비틀대는 것은 멋지다.
검은 가지사이로 고통스러운 종소리 울린다.
얼굴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 「저녁에 나의 마음은」에서

그의 시는 말로 에워싸여 있지만 침묵에 가깝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트라클 시의 특징을 “한없는 말없음을 둘러싼 몇 겹의 울타리”라고 칭하기도 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똑바로 가리키는 명확함 대신, 우리가 끝없이 마주치는 것은 바로 색채와 소리다. “트라클의 시는 색채로 연주하는 음악이다.”(「작품에 대하여」에서) 트라클의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언어에 앞서 이미 모든 ‘존재’가 말 없는 소리로 인간에게 다가온다며, 이 ‘존재의 언어’와의 관계에서 언어의 본질을 찾았다. “한 시인의 시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는 어떤 하나의 시 전체로부터 말하며, 매번 이 전체를 말한다.”(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이러한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가능성으로 꼽은 것이 바로 트라클의 시작(詩作)이다. 그는 트라클의 시에 대해 “시야의 폭, 사유의 깊이, 말 행위의 단순 소박함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밀하고도 영원하게 빛난다.”고 남겼다.

영혼은 지상의 나그네. 결딴난 숲 위로 성스럽고
푸른 어스름이 지고, 마을에서 들려오는
길고 검은 종소리. 평화로운 동반자.
망자의 하얀 눈꺼풀 위로는 조용히 도금양이 피어난다.

가라앉는 오후 속에 물소리 나직이 울린다.
물가의 황야는 더욱 짙게 파래지고, 장밋빛 바람 속 기쁨.
저녁 언덕에 들려오는 오빠의 부드러운 노랫소리.
― 「영혼의 봄」에서

● 실존의 고통을 색채로 그린 표현주의 대표 시인
프란츠 마르크, 에곤 실레,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읽다

트라클 시의 색채는 그 무렵 막 일어나기 시작한 표현주의 미술과도 겹친다. 표현주의 회화는 현실을 뛰어넘어 주관적 감정과 감각의 주체를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구도나 구성에 있어서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하고 강렬한 색채가 특징이다. 트라클 역시 당시 표현주의 화가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고,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경우는 그의 시 「밤」과 연결된 한 쌍이다. 동시대의 정신이 시와 그림이라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구현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새로운 모더니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책에는 표현주의 미술의 대표 화가들의 작품이 함께 실렸다. 자연, 특히 동물로서의 순수를 그린 프란츠 마르크, 자아의 불안한 욕망을 화폭 위에 옮긴 에곤 실레, 색채와 음향을 조합하고자 했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은 모두 트라클 시와 닿아 있고, 닮아 있다.

끝없는 고통에
너는 신을 사냥하러 나섰다,
부드러운 정신이여,
폭포 속에서,
물결치는 전나무 숲에서 한숨지으며.

종족들의 불꽃은 사방에
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검게 물든 벼랑 위로
죽음에 취해
작열하는 바람의 신부가 곤두박질치고,
빙하의
푸른 파도,
계곡 사이로 굉굉 울리는
세찬 종소리.
― 「밤」에서

●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기존 세계의 몰락을 아프게 예감했던 예술가의 상징

트라클은 제 시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작가였다. 그는 구체제에 완전한 종말을 가져온 사건인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생장교로 참전했던 첫 전투에서 그는 끝없이 밀려드는 부상병들의 피에 젖었다. 재앙과도 같은 충격에 완전히 정신이 무너졌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의 짧은 생은 타고난 우울과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죄의식, 실존의 고통이 언제나 함께했다. 이러한 고통은 저물어가는 시대와 궤를 같이 했고, 가장 예민한 존재로서 시인은 기존 세계의 파멸이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완전히 다른 새 세계의 도래를 가장 아프게 맞이했다.

오, 저녁 바람은 얼마나 쓸쓸하게 그치는가.
올리브나무의 어둠 속에서 머리는 죽어 가며 기운다.
종족의 몰락은 충격적이다.
이 시간에 바라보는 자의 눈은
그의 별들의 황금빛으로 가득 찬다.
저녁에 종소리는 잦아들어 더는 울리지 않는다.
광장 옆의 검은 장벽들은 무너지고,
죽은 병사는 기도를 외친다.
― 「헬리안」에서

세계가 이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면, 그러나 그 도래할 다음 세계도 장밋빛으로 전망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트라클의 시는 몰락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고이 쥔다. 그렇게 눈앞의 진실을 더욱 똑바로 바라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언어 그 이상, 그 너머의 언어로 무너져 내리는 세계, 그리고 다시 탄생할 세계를 예언자처럼 노래한다. 새로운 시대는 부드럽고 유순하게 오지 않는다. 변화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있은 후에야 가능하다. 위기와 변화는 같은 뜻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대격변의 시대와 공명하는, 혹은 이 시대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우리 영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디에 머물게 될까? 100여 년 전 가장 예민한 정신이 진리를 찾기 위해 헤맸던 기록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리 파란 짐승이 늘 따라오니까,
어둑한 숲속에서 지켜보는 짐승이다,
이 어두운 오솔길에서,
밤의 화음에, 부드러운 광기에
깨어 움직이며.
또는 어두운 황홀의 음조가
현악기를 가득 채워
속죄하는 여인의 서늘한 발치에 닿는다,
돌로 된 도시에서.
― 「수난」에서

목차

1부 시집
까마귀들
미라벨 궁전의 음악
겨울의 황혼
아름다운 도시
가을에
저녁에 나의 마음은
가을의 변모
겨울에
인류
심연에서
트럼펫
화창한 봄
우울
오후에게 속삭이다
누이에게
조락
저녁 노래
밤 노래
헬리안
2부 꿈속의 제바스티안
어린 시절
풍경
소년 엘리스에게
엘리스
꿈속의 제바스티안
봄에
란스의 저녁
카스파 하우저 노래
공원에서
겨울 저녁
고독한 사람의 가을
안식과 침묵
탄생
종말
서양의 노래
변용

침묵하는 자들에게
수난
겨울밤
잡힌 지빠귀의 노래
3부 1914년과 1915년 《브레너》에 발표한 시들
마음

뇌우
저녁

귀향
그로덱
4부 유고
노발리스에게
주(註)
작가 연보
작품에 대하여: 독일 표현주의 서정시의 스타 (김재혁)
추천의 글: 트라클을 만나러 가는 길 (박상순)

작가 소개

게오르크 트라클

유럽 표현주의 대표 시인. 1887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유복한 철물상의 여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부터 약물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이와 관련이 있을 어두운 광기와 우울, 죄의식이 그의 길지 않은 생을 가득 채웠다. 누이와의 비틀린 관계가 영향을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랭보 등을 좋아하여 시와 극작 창작에 열중하는 한편, 약제사가 되기 위해 빈 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한다. 1914년 위생병과 장교로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는데, 전투와 그에 따른 수많은 부상병들의 끔찍한 광경은 재앙과 같은 충격이었고,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이는 실패로 끝났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결국 스물일곱의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실존의 고통, 우울, 사념의 무상 등은 그의 시에서 색채와 음악성을 통해 구현되었다. 푸른색, 붉은색, 황금빛, 은색, 검은색, 갈색의 색채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시인의 감정과 존재의 상태는 구체성을 갖게 된다. 각각의 색깔에 맞는 음이 있고, 그 음들이 울려 하나의 교향곡이 된다. 20세기 중반에 이미 세계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 시인으로 평가받았고, 잉에보르크 바흐만, 파울 첼란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재혁 옮김

1959년 충북 증평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릴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4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아버지의 도장』이 있고 저서로 『바보여시인이여』,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등이 있으며 역서로 『푸른 꽃』, 『넙치』, 『릴케전집』(1, 2권) 등 50여 권이 있다. 현재 고려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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