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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문학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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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부제: 근대, 인간, 소설, 속악

김연경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0년 8월 14일

ISBN: 978-89-373-4433-3

패키지: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228쪽

가격: 22,000원

분야 학술 단행본


책소개

소설가 김연경의 러시아 대표 문학 깊이 읽기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서울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는 소설가 김연경의 『19세기 러시아 문학 산책』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러시아 문학뿐 아니라 문학 전반의 이해력과 통찰력을 갖추고 모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글쓰기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저자의 첫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은 러시아 문학의 정수라 할 러시아 근대 소설의 주요 작품들로, 「스페이드 여왕」,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우리 시대의 영웅』, 『아버지와 아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안나 카레니나』, 체호프의 단편 등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소설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작품들에 나타나는 근대와 함께 탄생한 인간-개인의 속물성에 주목하며 특유의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해석을 펼친다.
이 책의 토대는 지난 15여 년 동안 서울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며 학술지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이다. 그러나 연구서이면서도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적 성격을 갖도록, 또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지적인 독자도 흥미를 갖도록 작가의 전기를 소개하고 전체 형식과 문체를 대폭 수정했다. 학술 정보와 전문 자료가 필요한 독자를 위해 책 끝에 참고 문헌을 붙였다.


목차

서문 근대, 인간, 소설, 속악

1부 러시아 근대 문학의 형성
1 근대, 인간, 환상: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
1) 푸시킨과 「스페이드 여왕」
2) 「스페이드 여왕」
㈀ 기법으로서의 환상 — 환상과 실제, 시학적 망설임
㈁ 세계(페테르부르크)와 인간(게르만) — 선과 악, 윤리적 망설임
㈂ 환상(농담)에서 현실(진담)로, 시(운문)에서 소설(산문)로
2 우리는 왜 이토록 속물인가: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1) 고골의 딜레마와 죽음의 침상
2)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 세계 속의 인간 — 「넵스키 거리」, 「코」
㈁ ‘작음’의 희비극 — 「외투」, 「광인 일기」
㈂ 근대, 예술, 종교 — 「초상화」
3 ‘나’의 발견: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1) 요절한 천재 시인 레르몬토프와 소설
2) 『우리 시대의 영웅』
㈀ 대상-객체로서의 페초린 — 「벨라」, 「막심 막시므이치」
㈁ ‘밖’에서 ‘안’으로, 다시 ‘밖’으로 — 「페초린의 일지」
㈂ 레르몬토프 – 페초린과 시대정신으로서의 권태와 환멸

2부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
4 돈키호테가 되고 싶었던 햄릿: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1) 지주 귀족 작가 투르게네프
2) 『아버지와 아들』과 바자로프 8
㈀ 잡계급 의학도 바자로프와 니힐리즘
㈁ 바자로프의 사랑 — 낭만주의 대 반(反)낭만주의
㈂ 햄릿 – 돈키호테 바자로프의 죽음 — 니힐리스트의 최후의 실험
㈃ 부자(父子), 그리고 바자로프 — 부정과 배반의 운명
5 죄와 벌, 그리고 구원: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인간 도스토예프스키: 가난, 유형, 간질, 도박
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부친 살해와 카라마조프시나 — 표도르 카라마조프
㈁ 드미트리(미탸)의 모험과 수난, 에피퍼니
㈂ 이반의 이론과 실제 — 반역, 「대심문관」, 살부
㈃ 어둠-무(無)의 육화로서 스메르댜코프
㈄ 알료샤의 에피퍼니와 기적에 대한 시험 — 기적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가
6 생활의 발견, 결혼의 생리학: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1) 톨스토이 백작과 소설가 톨스토이
2) 『안나 카레니나』
㈀ 오블론스키 공작 집안과 결혼의 생리학
㈁ ‘위대한 순간’과 열정 — 안나의 입장에서
㈂ 열정의 법칙과 생활의 법칙 — 브론스키의 입장에서
㈃ 카레닌을 위하여 — 석조 페테르부르크의 상징
㈄ 위대한 순간과 그 이후 — 안나의 자살과 그 이후
㈅ 가정의 행복 — 레빈과 키티, 혹은 톨스토이와 소피야
7 우수의 윤리학: 체호프의 단편 소설과 희곡
1) 「어느 관리의 죽음」과 작가 체호프
2) 소설가 체호프
㈀ ‘삶 공포증’ 혹은 ‘진부함’의 공포
㈁ 지식인 소설과 진부함의 공포 — 「문학 선생」, 「상자 속의 사나이」
㈂ 체호프의 우수 — 「검은 수사」
3) 극작가 체호프와 「벚꽃 동산」
㈀ 체호프의 드라마투르기 여정
㈁ 희극 「벚꽃 동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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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이 책은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대표 작가, 대표 작품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들을 아우르는 핵심어는 근대, 개인, 소설, 속물성이다. 앞의 세 요소는 르네상스, 특히 세르반테스–돈키호테와 셰익스피어–햄릿 이래 형성된 서유럽의 19세기 문학과 유사하다. 문제는 네 번째 항목이다. 근대와 함께 탄생한 인간–개인은 ‘주인공–영웅’이든 ‘대중–단역’이든 이 속물성–속악을 피해갈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에 자리한 러시아는 아시아에 등을 돌린 채 유럽을 지향해 왔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본격화된 이 모방 욕망은 그들의 속물성의 기저에 깔려 있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묘파한 속물성은 훨씬 더 다층적이다. 그것은 특정 정체(政體) 등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문제다.
그렇기에 인간과 세계의 대립 구도는 더 복잡한 희비극이 되고, 여기에는 또 다른 개념인 신-구원이 요청된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예다. 등단부터 생활 밀착형 소설을 쓴 톨스토이는 노년에 이르러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몰입한다. 세기말 작가로서 체호프의 문학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그는 우리가 모두 ‘작은 인간’이며 이 ‘작음’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체호프는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를 여는 작가가 된다.―「서문」

* * *

근대, 인간, 환상: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의 삶과 문학 전반은 근대의 초입으로 들어선 러시아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운문 장르에서 산문 장르로 넘어갈 때 그의 혁신성은 더 부각된다. 푸시킨의 문학 활동이 절정을 이룬 1820~1830년대에 서유럽 문학을 모방한 다양한 소설이 쏟아지는데 이들은 서유럽의 감상주의와 낭만주의의 아류작에 가까웠다. 고도로 압축된 형식과 엄격한 운율의 준수를 요구하는 귀족 장르인 시에 비해 당시 소설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은 ‘평민-민중 장르’였다. 이 무렵 이미 ‘위대한 시인’의 직함을 갖고 있던 푸시킨이 산문에 손을 댄 것은 그 자체로 ‘내려섬’이라 할 대사건이었다. ‘동화’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음을 명민한 푸시킨은 천재적인 직관력으로 간파했다.

“폴!” 하고 백작 부인이 병풍 뒤에서 소리쳤다. “아무거나 새 소설 좀 보내 주렴, 제발 좀 요즘 건 빼고.”
“어떤 거 말씀이세요, grand’maman(할머니).”
“그러니까 주인공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지도 않고 물에 빠져 죽은 시체도 안 나오는 소설 말이야. 나는 정말 물에 빠진 사람들이 무서워 죽겠어!”
“요즘은 그런 소설은 없는데요. 아니, 러시아 소설은 어떠세요.”
“아니, 러시아 소설이라는 것도 있냐? …… 보내 봐라, 얘야, 아무렴 좀 보내 다오!”—「스페이드 여왕」

백작 부인은 책을 두어 쪽 읽다가 무슨 소설이 그 모양이냐고 투덜댄다. 괴기스러운 고딕-환상 소설도, 신파적인 감상 멜로 소설도 아닌, 그렇다고 서투른 러시아 소설도 아닌 진정으로 ‘새로운 소설’이 요청되던 시기, 바로 그 성취가 「스페이드 여왕」임을 푸시킨은 자신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서 불가해한 사건, 즉 환상의 발생과 해명에 있어 ‘저 세계-신’에 맞서는 ‘이 세계-인간’의 몫이 커졌으며, 「스페이드 여왕」에서 희생양으로 설정된 게르만은 근대 세계와 마주한 문제적 개인, 즉 러시아 문학 최초의 근대적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우리는 왜 이토록 속물인가: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고골은 러시아 문학에서 ‘정신’에 맞서 ‘육체’를 어떤 미화도 없이 소설화한 최초의 작가이다. 대도시-페테르부르크의 ‘생리학’과 더불어 가난한 하급 관리, 즉 ‘작은 인간’의 삶을 다루며 확립된 고골적 생리학-유물론은 문학사적 관점에서 혁명적인 성취였다. 세계 문학사가 아끼는 고골의 문학은 근대 세계의 풍경이 엿보이는 『아라베스키』(1835)에서 시작한다. 이 문집에 수록된 「넵스키 거리」, 「초상화」, 「광인 일기」, 뒤이어 발표되는 「코」(1836), 「외투」(1842) 등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묶어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라고 부른다. 고골은 「넵스키 거리」에서 세계의 형상을 포착하고, 「코」, 「외투」, 「광인 일기」에서 자신의 인간학을 표현하며 「초상화」에서 자신의 작가적 고뇌와 이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넵스키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오, 이 넵스키 거리를 믿지 말라! (중략) 모든 것이 기만이고, 모든 것이 꿈이고,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 여러분은 훌륭한 프록코트를 입고 산책하는 저 신사가 몹시 부자일 거라고 생각할 테지? 천만의 말씀. 그 자체가 그 프록코트로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다. (중략) 제발 가로등에서 멀리, 더 멀리 떨어져라! 그리고 가능한 한 더 빨리, 어서 빨리 그 곁을 지나쳐라. 그 녀석이 여러분의 멋진 프록코트에 악취 나는 기름을 질질 흘리는 정도에만 그쳐도 차라리 다행인 거다. 하지만 가로등 말고도 모든 것이 기만을 내뿜는다.
이 녀석, 이 넵스키 거리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밤이 응축된 덩어리처럼 그 위에 드리워져 하얀 크림색 건물들의 벽이 도드라질 때, 도시 전체가 굉음과 광채로 변하고 무수한 마차가 다리 쪽에서 몰려오고 마부들이 고함을 치며 말 위에서 날뛸 때, 그리고 악마가 오직 모든 것을 가짜의 모습으로 보여 주기 위해 직접 램프의 불을 밝힐 때는 더욱더 그렇다.—「넵스키 거리」

근대가 만들어 낸 각종 신화는 넵스키 거리와 마찬가지로 ‘기만’이고 ‘꿈’에 불과하다. 가로등조차 그것이 비추는 대상들처럼 기만에 불과할 뿐, 어떤 진리와 이상을 현시해 주지는 못한다. 물론 이런 현상의 기저에는 모든 가치가 계량화됨으로써 정작 본질은 무의미해지는 자본주의의 물신 숭배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깔려 있다. 그러나 고골을 괴롭힌 근본적인 문제는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약점으로서의 속물성, 그리고 악마조차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삶의 본원적인 옹색함이다.

“저어기 좀 이상해서 그러는데…… 당신은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알고 계실 겁니다. 한데 제가 갑자기 당신을 발견하고 보니 교회이지 뭡니까.”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알아먹을 수가 없군요.” (중략)
“물론 저는…… 그러니까 저는 소령이올시다. 코 없이 다니는 건 저로서는 불쾌한 일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보스크레센스키 다리 위에서 껍질 벗긴 오렌지를 파는 아줌마라면 코 없이 앉아 있어도 무방하겠지요. 그러나 조만간 틀림없이 도지사 자리에 앉게 될 인물이 이래서야 어디 말이 됩니까……. (중략)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소.” 코가 대답했다. “좀 속 시원히 설명해 보시오.”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아니면 굳이 제 입으로…… 그러니까 당신은 바로 제 코란 말입니다!”
코는 소령을 바라보더니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이봐요, 잘못 아셨소.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오. ”—「코」

「코」의 모든 대화들이 다양한 말장난과 ‘무성의함’에 기반한 의사소통의 결렬을 보여 준다. 코발료프의 정체성은 코 위의 여드름에서 코로, 코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인간으로, 더 넓게는 존재 전체로 확장된다. 사회적 코드(관등) 역시 몸이나 몸의 특정 부위와 같은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를 구성하는 ‘부분’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전체’, 즉 텍스트 바깥에 상정된 본질적인 이데아로서의 ‘인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이상의 현상적 투영인 ‘유형’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닌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장악하는 것은 부분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조합, 즉 생리학적이고 사회적인 틀 속에서만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 비전일적이고 파편적인 인간들이다. 고골의 소설들은 본질적으론 촘촘한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 또 그럴 수도 없는 ‘이’ 세계의 본질을 겨냥하고 있다.

생활의 발견, 결혼의 생리학: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는 제목 그대로 한 ‘여자의 일생’을 다룬 소설이고, 우리는 안나의 최후에 관한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안나는 왜 자살해야 했는가. 안나의 자살을 읽어 내기 위해 그녀의 삶의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안나는 어떤 인간인가. 심지어, 어떤 ‘여자’인가, 라고 물어야 할 만큼 그녀는 ‘인간’이기에 앞서 ‘여자’로 창조된 인물이다. 삶을 사유하지 않고 삶을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살 뿐이고, 그 사회적 표현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딸이거나 어머니이거나 약혼녀이거나 아내이거나 정부, 하여간 ‘여자’일 뿐인 존재다. 톨스토이의 많은 여성 주인공 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임에도 안나가 자신의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역시나 여성적인 것(불륜)에 국한된다. 그녀가 자신의 기존의 삶(각종 기만과 허위의 거미줄)을 파괴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사랑은 새로운 삶의 동의어이고 그 쟁취의 과정이 곧 소설이 쓰이는 과정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을 ‘두 결혼’이라고 지으려고 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대조되는 두 결혼은 안나-카레닌의 결혼과 레빈-키티의 결혼이다.
소소한 일상과 사물에 대한 레빈의 사유와 고뇌는 안나의 죽음 이후 소설 후반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존재와 삶의 의미를 캐물을수록 더 큰 회의에 부딪치지만 레빈은 꿋꿋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말-사상’을 압도하는 ‘일상-생활’의 징글맞은 저력이야말로 톨스토이가 파악한 우리 삶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건강한 삶을 일궈 가는 레빈-키티의 모습은 ‘위대한 순간’, 즉 우리 삶의 극성(劇性)과 시성(詩性)의 앞뒤에 굳건히 자리한 산문성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레빈의 상념은 그 깨달음을 전한다.

‘이 새로운 감정은 나를 바꾸지도, 나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아. 그리고 내가 상상하던 것처럼 갑자기 나를 계몽시키지도 않아. (중략) 난 여전히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겠지.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여전히 내 생각을 부적절하게 표현할 거야. 나의 지성소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와의 사이에도 여전히 벽이 존재할 거야. 난 여전히 나의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비난하고 그것을 후회하겠지. 나의 이성으로는 내가 왜 기도를 하는지 깨닫지 못할 테고, 그러면서도 난 여전히 기도를 할 거야.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안나 카레니나」

그럼에도 “행복한 민족들은 역사가 없다.”라는 말처럼 “다 엇비슷하게 행복한 가정”은 가정 소설과 사회 소설의 종합인 『안나 카레니나』 속에서 “제각기 불행한 가정”에 비해 소설적 차원의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을 대위법적 구성에 걸맞게 ‘두 결혼’에서 ‘안나 카레니나’로 바꾼 것은 소설가 톨스토이의 직관력을 보여 준다.

우수의 윤리학: 체호프의 단편 소설

“전부 무서워요. 나는 타고나길 깊이가 없는 사람이고 사후 세계라든가 인류의 운명이라든가 하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대체로 저 높은 하늘의 문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저 진부함인데요,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서 몸을 피할 수 없거든요.”—「공포」

냉혹한 유물론자 체호프는 저 세계와 영혼이 아니라 이 세계와 몸에 주목했다. 훗날 문학사는 그를 클래식과 모더니즘 사이를 가르는 작가로 평가하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나란히 대가의 반열에 올렸다. 그런데 세기말 작가로서 체호프의 문학은 이전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체호프의 소설은 대체로 ‘작은’ 사람의 ‘작은’ 공포, 즉 진부함의 공포에 지배된다. 그는 우리가 모두 ‘작은 인간’이며 이 ‘작음’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예, 좋은 날씨입니다. 지금은 5월이니까 곧 진짜 여름이 올 겁니다. 여름은 겨울과는 다르지요. 겨울에는 난로를 때야 하지만, 여름에는 난로가 없어도 따뜻합니다. 여름에는 밤에 창문을 열 어 놔도 따뜻하지만, 겨울에는 이중창을 해도 춥지요.”/
“일어나요, 출근해야지요. (중략) 잠은 침대에 자야지요, 옷을 벗고서…….”/
“지금까지 당신은 결혼한 몸이 아니어서 혼자 살았지만, 이제는 결혼한 몸이니 둘이 살게 될 겁 니다.”/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흘러갑니다. …… 말은 귀리와 건초를 먹습니다.”— 「문학 선생」
이렇듯 노총각 교사 이폴리트의 말은 각 상황에 따라 나름 진정성을 담고 있음에도 그로테스크한 동어 반복에 가까워 부조리극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소한 만큼이나 철학적인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의 말이 지녔던 의미와 무게, 그 지나친 ‘있음’에 대해 ‘없음’으로 맞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매일 학생들이 그린 지도를 고쳐 주고 연대기를 작성하는 것이, 숙고 끝에 흔한 말만 내놓는 것이 그토록 한심한가!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도 뭔가 깊은 생각을 한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대단히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필요악과 같은 환상이 아닐까. 누구나 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다는 사실에 저 진부함의 공포와 비극이 환기될 뿐이다. 이렇게 체호프는 인간과 세계의 ‘작음’을 ‘위’가 아니라 ‘밖’에서 그려 내는 문학적 겸손함으로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를 여는 작가가 된다.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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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197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미성년』, 『내 아내의 모든 것』, 경장편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등이 있다. 현재 소설 쓰기와 번역, 러시아 문학 강의 및 연구를 병행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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