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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 표정


첨부파일


서지 정보

정영훈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8년 2월 7일

ISBN: 978-89-374-1229-5

패키지: 반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36쪽

가격: 22,000원

분야 민음의 비평, 한국 문학


책소개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가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문학과 삶을 연결하는 윤리의 비평
문학의 무용함에 질문을 던지는 비평가의 윤리


목차

책 머리에

1부 훤화하는 소리
문학의 전통과 비평의 자리
2000년대 비평의 존재 방식
비평 공론장의 꿈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을 넘어
윤리의 표정
앓는 시대의 소설과 윤리

2부 윤리의 시험대
나르시시즘의 윤리학―김영하론
윤리의 기원―이승우론
망각하지 못하는 자의 우울―권여선론
부재의 흔적들―한유주론
보르항에 이른 길―이윤기론
속악한 현실을 포회하는 문학의 언어

3부 세속의 신학
역병의 징후와 기우의 윤리학―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부재를 위한 알리바이―한지혜 『미필적 고의에 관한 보고서』
법 앞에서 ―한지혜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재론
어떤 방황, 소수자의 통과의례―김이듬 『블러드 시스터즈』
춤추는 가족, 그리고 이후―안보윤 『우선 멈춤』
욕망의 변증법, 소설을 읽는 세 가지 방법―이승우 『지상의 노래』
불의 신학, 칼의 미학―조성기 『라하트 하헤렙』
전쟁과 기억, 그리고 윤리―전상국 「남이섬」


편집자 리뷰

2004년 <중앙 신인 문학상> 평론 부분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 정영훈의 첫 번째 비평집 『윤리의 표정』이 ‘민음의 비평’ 시리즈 일곱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민음의 비평’은 하나의 테마로 동시대의 문학을 비평하는 테마 비평집 시리즈다. 이번 책에서 정영훈은 ‘윤리’를 주제로 문학 작품만이 아닌 비평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메타적으로 접근한다.

『윤리의 표정』에서는 정영훈이 《세계의 문학》 편집 위원으로 활동하며 읽고 쓴 2000년대 이후 한국 소설에 대한 스무 편의 글을 묶었다. 1부 ‘훤화하는 소리’는 정영훈이 생각하는 비평가로서의 윤리에 관한 글로서 문학비평과 비평하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냉철하게 제기한다. 2부 ‘윤리의 시험대’는 김영하, 이승우, 권여선 등의 작가론을 다룬다. 그들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상황을 통해 만들어진 윤리적 시험들을 톺아보는 비평적 시선이 흥미롭다. 3부 ‘세속의 신학’에서는 개개의 작품을 두고 분석하며 그 속에서 작동하는 윤리의 메커니즘을 좇는다.

정영훈이 읽어 내는 작품 속 ‘윤리’는 현재 이 세계에서 작동하는 것을 문학으로 다시 재현한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힘, 추상적 개념이었던 윤리를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논하면서, 무엇이 옳고 선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한 일조차 다시 한번 의심한다. 따라서 그의 비평은 작품에서도 삶에서도 유리되지 않고 두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문학 비평과 비평가의 ‘윤리’를 다하는 일이다. 『윤리의 표정』은 문학 작품을 통해 삶의 윤리를 다시 정립할 수 있는 비평집이다.

 

 

■책머리에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 앞에 문학은 얼마나 무력한지. 하도 자주 인용되어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옛 문장을 다시 꺼내 읽어 보자면,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않느냐고 물어 올 때, 딱히 돌려줄 적당한 말이 없고, 문득 문학의 가난함이 깨우쳐질 때 흔히들 끌어다 쓰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 말은 위안을 줄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는 별로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고픈 거지가 있다고 쓸 시간에 차라리 배고픈 거지를 구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할 것이다. (중략)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런 감각 속에서 내가 문학에 대해 발언하고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문학이 무력하다는 자각은 문학이 현실 속에서 지닐 수 있는 힘보다 문학을 손에 쥔 대가로 방기해야 했던 것들에 눈길이 가게 했고, 어떻게든 그것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문학을 하게 했고, 무력함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어떤 문학적 가능성을 타진해 보게 했다. 작품을 읽고, 읽은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끼적거리면서 ‘윤리’라는 단어를 그토록 자주 써야 했던 것도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리에 대한 사유는 이미 마련된 삶의 자세들을 회의하는 데서 오고, 회의는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 무력한 자들에게 어울리는 몸짓이며, 문학은 이들이 들어와 살기에 가장 어울리는 집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윤리를 이야기하는 비평들도 결국은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윤리라고 명명한 것들은 기실 자기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위로하고 돌보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물론자기를 단장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윤리라 부르는 것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령 푸코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기원을 갖는 윤리에 논의를 위한 정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예술은 주체를 모든 책임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즐거움의 원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체는 예술 속에서 타자뿐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예술은 주체를 비인격적 익명적 ‘있음’의 상태, 즉 책임질 수 있는 인격이 없는 상태로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오직 비평만이 타자의 관계라는 윤리적 조망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작품에 인격성을, 주체를 지반으로만 성립 가능 한 책임성을 부여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이런 생각대로라면 우리의 비평은 비평이 떠맡아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나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타자로부터 촉발되고 타자에 의해 매개되며 타자를 향해 반응하고 타자를 책임지는 윤리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요청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비평은 좀 더 “윤리적 불면”에 시달려도 좋을 것이다. ―91~92쪽
자기 고통을 전시할 때 그 고통은 타자로서의 타인의 고통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최근 소설에 점증하는 고통에 공감하는 대신 우려를 표하게 되는 이유이다. “아무것도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을 때 불행을 흉내 내는 것이 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그 이유는, 그럼으로써 진정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자들의 위치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 107쪽에서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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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훈

1973년 마산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 소설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중앙 신인 문학상> 평론 부분에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타자의 윤리학으로: 김영하의 단편들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계간 《세계의 문학》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