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신화

이재훈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6년 8월 12일 | ISBN 978-89-374-0845-8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16쪽 | 가격 9,000원

책소개

원시적 감각부터 신화적 상상력까지

환멸을 견디는 꿈의 언어, 현실의 의지

벌레가 된 시인이 읊조리는 기도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명료한 이미지와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들을 선보여 온 이재훈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가 출간되었다. 『벌레 신화』를 통해 시인은 세계의 쏟아지는 폭력에 대해 등을 말고 웅크린 채 견디는 식물적 능동에 대해 말한다.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 내기 위해 환멸을 끌어안고 더욱 적극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방식을 택한다. 땅바닥에 가장 낮게 엎드린 벌레의 목소리로 이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편집자 리뷰

■지옥을 사는 시인의 태도

지옥이라 부를까.
창이 내 옆구리를 찌르고, 꼬리는 빠져 시큰하고
벌건 불속에서 뼈를 드러낸 채
날뛰는 날들을 일상이라 부를까.
(……)
일상이 일상을 읽는 밤.
내 몸이 불어 터져 고통을 읽는 밤.

―「뿔」에서

고통을 생생히 느끼며 견디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감각을 잊은 채 떠밀려 사는 것이 견디기에는 적합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게 마취와 환각을 허락한다. 감각과 생각을 예리하게 느끼는 순간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이 지옥임을 애써 잊으려는 시대. 반성이 낯설고 머쓱해진 시대에 시인은 다시,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마취되어 둔해진 사람들을 깨우는 시. 지금 여기를 생생히 감각하게 하는 시는 아프다. 그러나 시인은 각성을 모르는 타인을 야단치거나 계몽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향해 조용하지만 끊임없이 물을 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짐승의 피」)라고 말이다.

■무너진 곳에서 시작하는 기도

당신과 내가 오래되고 깊은 성에 무릎 꿇고
오래오래 기도하면 된다.
(……)
무릎 꿇는 일과 화답하는 일이
저 마을의 시간을 바꿀 수 있을까.
성벽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스며든다.
전쟁으로 성벽은 무너졌으나
그곳에서 사랑은 늘 시작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시인이 온 시간을 다해 살아온 이 세계는 부패했고, “무너졌”다. 그야말로 폐허다. “꼰대들”과 “위정자들”(「녹색 기사」)로 가득하다. 그토록 비겁하고 사악한 세계를 살아온 시인은 지쳤다. 그러나 시인은 무너진 곳에서 다시 기도를 시작한다. 환멸을 느끼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래 나쁜 채로 있던 세상이 과연 바뀔까 하는 의심을 하지만 결국에는 “무릎을 꿇고 오래오래 기도하면 된다.” 라고 결론 내린다. “오래오래 기도”하는 것. 그것은 “당신과 내”가 바꿀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세계에 남은, 세계를 바꿀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시인은 “전쟁”과 같은 폭력에 의해 무너진 세계가 사랑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추천의 말

이재훈의 시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주하는 꿈의 언어들이 아닌 현실을 견디기 위한 꿈의 언어들이다. 환멸의 세계는 그의 신화적, 인류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일깨운다. 교묘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에 뿔을 잃고 난도질당하는 그는 언어 이전의 원시의 감각으로부터 온몸에 긴 시간을 새기고 밤을 읊조리며 고통을 읽는다. 범벅에서 더러운 꽃으로 필 때까지. 풀이 음악이 될 때까지.
― 정재학(시인)

세계의 쏟아지는 폭력을 웅크리고 엎드린 채 등으로 견디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는 식물적 능동이 탄생한다. 마흔 살이 되고 뿔을 잃은 채 좌절하고 방황하면서도 시인은 세상의 추위를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의 온기로 견디겠다는 염결한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 아아, 이것이 바로 뿔이 아니겠는가. 시인에게 여전히 뿔이 달려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읽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 시인을 좇아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해설에서)
― 장은수(문학평론가)

■본문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당신의 기별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는 날들. 먼 시간을 건너왔을까. 천 년 전부터 서로의 몸을 기억했을까. 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 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

―「짐승의 피」에서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불혹」에서

변명은 늘 부끄러우니까요. 아프면 그냥 아파야 합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죠. 게으름을 좋아하는 저는, 참는 것이 제일 쉬운 저는,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말,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악행극」에서

목차

■차례

1부
벌레

기이한 탄생들
짐승의 피
치미는 몸
햇칼
녹색 기사
주술적 인간
밀랍
수메르
빙하의 고고학
가운데 땅
허공의 사다리

2부
평원의 밤
신비한 비
거리의 왕 노릇
맘몬과 달과 비
유형지
나르치스
대리자
기복
노예선
스틱스
나쁜 병
번제
녹색섬광

3부
향연
불혹
구렁
저자의 말
벌레장
동화의 세계
맛보는 공동체
풀이 던진 질문
미적인 궁핍
황금의 입
하이델베르크
악행극
작은 뿔

작가 소개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으며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현대시작품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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